영화 <리틀 포레스트> 포스터.

영화 <리틀 포레스트> 포스터.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바쁘게 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더라."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 혜원(김태리 분)의 자조다. 커피를 끼고 살며, 밥도 거른 채 시간을 쪼개 하루를 보내는 우리의 모습은 멀리서 보면 눈물 날 정도로 똑같을지도 모른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오는 이유는 제각각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심리에는 얼추 비슷한 구석이 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반복적으로 펼쳐지는 장면처럼, 시골은 도시의 삶과 다르다. 1년 내내 허리 굽도록 논과 밭에서 일해야 하고, 추수한 음식을 요리하는 데 한나절이 걸린다. 식재료 하나, 조리 도구 하나를 사기 위해 한 시간도 더 걸리는 읍내를 나가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삶은 도시 사람의 관점으로 봤을 때 비효율적이다.

게다가 노력한다고 결과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주인공 혜원의 고모는 태풍으로 쓰러진 농작물을 보고도 화도 내지 않는다. 무엇을 재배한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 갖은 애를 써도 결과는 그저 자연이 결정하는 것이다. 수십 년간 이런 걸 반복해서 보다 보면 시골 어르신들이 그런 것처럼 자연스레 운명 순응론자가 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혜원이 어머니의 공간에서 떠나고자 했던 이유는 주어진 대로 산다는 그 자조와 체념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었을까 싶다. 게다가 심리적 거리 없이 무차별적으로 좁히고 들어오는 옛 어른들의 질문("남자 친구는 있냐", "시험은 붙었냐", "앞으로 계획은 뭐냐")들에 젊은 청춘이 무엇을 느꼈을 지 예측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가끔 명절 때 듣는 것으로도 충분한 스트레스이니 말이다.

시골의 삶이 먹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하는 것이라면, 도시의 삶이란 그저 남들만큼 먹고살기 위해 필요한 돈이 얼마인지 계산하는 것의 연속이다. 무엇보다 도시는 허기지다. 이건 돈이 많아도 마찬가지다. 도시에도 먹거리는 넘치고 이국적인 맛집은 더 많지만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프랑스의 미식가이자 법관인 브리야 사바랭은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하라. 그럼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말해주겠노라"라는 말을 남겼다.

당신이 오늘 먹은 것이 무엇인가 묻고 싶다. 혹은 스테인리스 식판을 들고 길게 줄을 서서 방부제와 조미료가 잔뜩 들어간 음식을 먹었거나, 혹은 편의점에서 간단한 레디메이드 음식을 섭취하지는 않았나? 잠깐 이화여대 석좌교수 이어령 교수님이 쓴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는 에세이를 인용해보자.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프랑스의 빵은 참 맛이 있다.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바게트를 사 든 신사 숙녀들이 마치 깃대를 들듯 어깨에 메고 지나는 광경을 볼 수도 있다. 아니 그냥 들고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숫제 길거리에서 빵을 떼먹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한솥밥'을 먹는다는 정겨운 말이 있듯, 밥은 곧 한 가족의 단위와 그 정을 측정하는 구실을 했다. 추운 겨울 집안 식구 한 명이 늦게 들어오면 그때까지 아랫목 이불 아래 밥그릇을 놓아둔다. 사람이 집 안에 없어도 밥은 그 방 안에 있었다. 한솥밥을 먹는다는 것, 그것도 매일같이 되풀이해서 먹는다는 것은 가족을 묶는 확인이었다.


나는 프랑스 파리에서 손수 자취를 했다. 전기밥솥을 사다가 혼자 밥을 지어서 먹었다. 그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가족 생각이 났다. 밥을 푸고 밥그릇에 옮길 때 내가 홀로라는 것을 실감했다. 내가 프랑스에서 태어나 빵을 먹고 자란 사람이라면, 한국 빵 가게에서 빵을 사다 먹었다면 아마도 내 눈에 눈물이 고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 한국 사회도서양과 같은 레디메이드 음식, 그것도 밥으로 만든 삼각김밥이나 편의점 도시락과 같은 상품이 흔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 같은 음식은 무척이나 편리하지만 또한 매우 차갑다는 공통점이 있다.

잠깐 등장한 편의점 아르바이트 생 혜원이 전자레인지에 데운 도시락을 혼자 먹는다. 자신이 직접 밥을 싸주던 남자친구는, 실은 자신을 전혀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관계임을 알게 된 후 더 이상 밥을 싸주지 않는다. 자존심을 굽히고 시골로 돌아온 혜원은 왜 왔냐는 질문에, "배가 고팠다"라고 답은 이 같은 도시에서의 삶과 그 안에서 느낀 혜원의 감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이다.

왜 우리는 허기진 도시의 삶을 감수하는가

허기진 도시의 삶을 감수해야 한다면 마땅히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공기도 나쁘고, 물가도 비싼 이곳에서의 삶을 감수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볼거리, 즐길 거리야 몇 년이면 충분히 누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자의적이건 타의적이건, 지금 이 시간에도 공시촌이나 대학가, 직장의 불빛은 커피를 마시며 공부나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 불빛이 훤하다. 직장에서 늦은 시각까지 불을 킨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그것을 이끄는 것은 미래의 희망일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노력하면 더 나은 미래를 쟁취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때로는 현재의 행복을 유보하고 건강도 일부 버려가며 꿈을 쫓는다. 하지만 실은, 그것은 괜찮은 미래를 보장하기는커녕 모두를 경쟁으로 내몰아 개별 구성원들 삶의 질을 악화만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은 경제성장기가 아니다. 노력한다고 해서 더 나은 미래를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경제 호황기에 젊음을 불태웠던 전 세대라고 해도 마찬가지. 지금 중년들은 도서관과 일터에서 온 시간을 바쳐왔던 그들의 삶을 그저 좋았던 것만으로 기억할 수 있을까? 배우자나 자녀와 대화가 잘 통하는 가장은 얼마나 되는가? 빨간 네온 사인의 도시가 주는 화려한 삶에 대한 유혹이란 실은 사람들을 허기지게만 만드는 것은 아닐지.

바쁘게 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자조하고 허기가 져 견딜 수 없었다는 주인공 혜원의 자조에는 시대를 관통하는 비극이 있다. 직장 상사로부터의 모멸과, 도회적인 여자 친구의 책망 속에 결국 도망치듯 도시를 떠난 재하(류준열 분)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시골의 삶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 메가박스 플러스엠


이처럼 시골에서의 삶은 도시의 삶과 대척점에 놓여 있다. 도시가 더 많은 노동을 시키기 위해 구성원들이 먹는 데 쓰는 시간을 극단적으로 줄였다면, 시골에서의 시간이란 먹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일단 농사를 지어 사시사철을 기다려야 한다. 사소한 재료 하나를 사는 데도 멀리 나가야 하고, 직접 물을 길고 장작을 패서 끓여야 하며 직접 과일을 깎고 쌀을 씻어서 요리를 해야 한다.

이러한 삶은 흔히 촌스러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틀 포레스트>는 이런 삶이 정말 나쁘기만 한 것인지를 묻고 있다. 일단 평생 농사만 짓고 요리만 하다가 생을 마감한 무학의 농사꾼 할머니의 절명시를 한 번 감상해보자. 참고로 이 분은 임태주 시인의 어머니셨다.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
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중략)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젊은 날 이 시를 읽고 퍽이나 패배주의적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맙소사, 마음대로라는 것이 없다니 이 얼마나 비참한 삶이야, 이게 웬 처량이야. 하루 종일 요리하며 자식들이나 먹이는 게 인생의 전부라니! 배우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그러나 나이 먹을수록 내가 저 임태주 시인 어머니의 삶보다 제대로 살고 있는지 심각한 회의를 느끼게 되더라. 바쁘게 살아도 인생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더라.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그 말이 맞았다. 지금 자기 자리, 스스로의 운명에서 만족감을 느낄 수 없다면 사놓은 전자 화폐가 수십, 수백 배가 된다고 해도 고작 몇 달 즐거울 수 있을 뿐이다.

자신이 재배한 음식을 직접 지어서 먹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본인과 직면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자 배움이겠지. 괜히 이 영화에서 요리를 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내면을 성장시켜 그것을 나누어 먹음으로서 배부를 수 있다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주제. 심고 키운 것이 먹음직스러운 요리가 되는 것은 자기 삶을 온전히 성장시켜 넉넉한 인품으로 다른 사람을 안을 수 있다는 것과 그 의미가 동일하다. 어머니(문소리 분)를 원망하는 혜원에게, 어머니는 곶감을 차분히 꽂으며 뜬금 없는 답변을 한다.

"추운 겨울을 버티고 이겨내야 진짜 맛있는 곶감이 되거든!"

고생하지 않고, 그 지루한 시간을 묵묵히 보내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사람은 맛있는 곶감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 시고 떫고 설익은 '왕재수'나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인생 별 거 없다는 거, 다 연이고 운명이고 그냥 기다리며 자신을 익히는 것 이외에는 별 다른 답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본인도 좀 더 편안할 수 있으려나.

담백한 영화, 침묵이 때로는 더 많은 것을 내포한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 메가박스 플러스엠


이 영화는 참 담백하면서도 아름답다. 주제가 엉망이어도 영상이 아름다우면 범작 이상의 평가를 받는데 이 작품은 영상도 유려할 뿐 아니라 주제에도 숙고할 데가 있으니 수작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입김만으로 사계절의 변화를 표현하고, 그 입김만큼이나 미묘한 젊은이들의 애정과 질투를 담아내는 감독의 역량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한국적인 미를 이렇게 잘 담아낸 작품이 있었나 궁금하다. 은유와 은유, 표정과 표정, 광경과 광경. 반딧불이 비치는 시골의 계곡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인다. 류준열의 전 여자 친구가 등장했을 때 혜원과 은숙(진기주 분)의 반응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보듯 유머 감각도 충분하다.

감정이란 꼭 말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침묵이 더 많은 것을 웅변적으로 드러낼 수도 있다. 진리라는 것도 그러할 것이고 아마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지금이라도 시골로 갈까?

이렇게 영화를 잘 감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마 시골로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도시에서의 삶이 별 거 없음은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말이다. 혜원은 '아주심기'의 장소로 시골을 택한다만 아마 나는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임순례 감독의 전작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리틀 포레스트>와 전혀 상반된 영화다. 스포츠와 국가주의 그리고 악역의 괴롭힘 속에서도 언더독이 강자를 이긴다는, 뻔한 흥행 방정식이 버무려져 있었던 <우생순>이 흥행하지 못했다면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나올 수 있었을까. <리틀 포레스트>는 흥행 가능성은 미지수지만 훨씬 감독의 진짜 생각을 잘 드러내는 아름다운 영화라고 생각한다. 실로 역설이다.

이 영화는 흥행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이 본 사람은 흥행할지 의문이라고 말했지만, 물론 조미료를 팍팍 넣은 음식이 잘 팔릴 때도 있지만, 여하튼 지금은 슬로우 웰빙 시대 아니던가.

리틀 포레스트 임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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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투자자, 소설가, 아마추어 기자. "삶은 지식과 경험의 보고(寶庫)이자 향연이다. 그러므로 나 풍류판관 페트로니우스가 다음처럼 말하노라." - 사티리콘 中 blog.naver.com/admljy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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