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8일, 은퇴를 앞둔 아무로 나미에

2018년 9월 18일, 은퇴를 앞둔 아무로 나미에 ⓒ namieamuro.jp


2017년 9월 20일, 갑작스러운 은퇴발표에 대략 정신이 멍해졌다. 하마사키 아유미는 뚜렷한 하락세이고, 우타다 히카루는 평범한 '인간'으로서 8년이라는 공백기를 가졌다. 시이나 링고는 자신만의 세계에 자리를 마련했고, 코다 쿠미는 스스로 명성을 걷어차 버렸다. 한때 톱의 위치에 있었던 일본 여성 솔로 가수들의 부침을 생각해 본다면, 25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왕관을 내려놓지 않은 아티스트는 그녀 이외엔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최근만 해도 100회 투어를 마친 그런 여제의 은퇴식이라, 정말 상상해본 적도 없는 그림이었다.

사실 꾸준한 인기에 가려져서 그렇지, 사반세기를 돌아보면 정말 고전의 연속이었고 변화의 체감도도 심한 커리어였다. 팬들조차 아무로 나미에를 과거의 인물이라 단정하던 시기가 있었음에도, 개의치 않고 자신에 대한 채찍질을 아끼지 않아 지금의 위치에 오른 것일 뿐. 그렇다보니 나에게 있어 그녀는 온갖 수식어보다, '철인'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오로지 대중을 위한 엔터테이너로 존재하기 위해 수많은 고난을 극복한 강인함. 그녀의 화려함만을 접한 이들에겐 분명 낯선 모습일 것이다.

그녀가 가장 빛났던 순간은 데뷔와 함께 < Sweet 19 Blues >(1996)로 최연소 최다 판매기록을 세웠을 때도, 1997년 < 홍백가합전 >에서 200만장이 넘게 팔린 히트 싱글 'Can you celebrate?'를 부르며 눈물을 흘릴 때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어 베스트 앨범인 < Best Fiction >(2008)으로 연간차트를 1위로 장식하고 레코드 대상에서 최우수상을 받던 2008년, 그때가 아마 팬을 넘어 일반 대중들과도 함께 환희와 희열을 나눌 수 있던 때이지 않았나 싶다.

아무로 나미에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준 사건

지금은 이래저래 꼴이 말이 아니지만, 당시 거대한 영향력을 뽐낸 코무라 테츠야 표 신스 뮤직에, 태닝한 피부와 미니스커트 및 통굽 부츠로 무장한 스타일로 그녀의 잠재력은 개방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동시대 여성들에게 '아무라(アムラ)'라는 신조어를 사용하게 만들었던 1997년, 갑작스런 결혼 소식이 전해졌다. 아무로 나미에가 어떤 사람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지금에서야 할 수 있는 말이긴 하지만, 이때부터 이미 자신이 한 말에 책임져야 하는 것은 자신임을 분명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속도위반 임신, 그리고 그 상대가 15살 연상의 백댄서 샘(Sam)이라는 것을 알게 된 대중들은 마치 1970년대 최고의 하이틴 스타였던 야마구치 모모에의 결혼발표가 20세기 말에 재현되는 듯한 기시감을 느꼈을지도. 큰 충격을 받은 일본 사회는 조금씩 애정을 거두기 시작했다.

그런 시선에 대한 화살받이가 되어야 했던 것은 역시나 본인이었다. 아티스로서의 인기와 함께 일상에서의 행복 또한 지키고자 했던 소신은 비난 여론에 결코 꺾이지 않았다. 다만 활동을 중단하는 와중에 치고 올라오는 후배가수들의 기세를 막을 길은 없었다. 그것이 고난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1999년, 친어머니가 재혼상대의 동생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은 열도를 충격으로 몰아넣음과 동시에 본인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절망으로 다가왔다.

급히 모든 활동을 정리하고 안정을 위한 긴 휴식에 들어가는 듯했지만, 복귀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2주였다. 그해 < 홍백가합전 >에서 부른 노래가 바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날 발매되었던 'RESPECT the POWER OF LOVE'. 2년 전 같은 무대에서 흘린 눈물과는 대조적인 아픔이 흘러내리고 있었음을 많은 이들이 느꼈을 것이다.

이 즈음의 여성 솔로 신은 그야말로 격동기였다. 미시아를 필두로 하마사키 아유미, 여기에 700만장이라는 다시는 없을 판매량을 역사에 남긴 우타다 히카루까지. 아무로 나미에의 이름이 차트에서, 브라운관에서, 모든 곳에서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 Break the Rules  >(2000)와 < Love Enhanced ♥ Single Collection >(2002)의 부진, 코무로 테츠야와의 결별, 그리고 남편과의 이혼. 21세기라는 백 스테이지엔 1990년대 가수를 위한 대기실이 없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지켜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자신과 피를 나눈 아들이었다.

 현재 아시아 투어 진행 중. 안타깝게도 한국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현재 아시아 투어 진행 중. 안타깝게도 한국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 namieamuro.jp


훗날 한 인터뷰에서 "친어머니 관련사건 당시 충격이 너무 커 모든 걸 내려놓은 채 연예계를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 와중에 자신을 다잡게 한 것은 바로 하나 있는 아들. 한 명의 어머니로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모성애는 결국 위기를 극복해낼 수 있었던 심연의 한줄기 빛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변화를 모색했고, 이전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 Style >(2003)이라는 새로운 작품으로 컴백했다. 왼쪽 팔에는 아들의 이름을 문신으로 새긴 채.

바로 이 작품을 통해 블랙 뮤직으로의 노선 변경이 이루어졌다. 한번 스타일이 정립되면 그것을 고수하는 것이 일반적인 제이팝 시장에서 던진 과감한 한수였다. 미국의 유명 작곡가 겸 프로듀서 댈러스 오스틴(Dallas Austin)의 지휘 아래 전개된 작업은 예전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는 데에 성공했지만, 그런 아무로 나미에의 모습이 어색했던 탓인지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대신 음악적 진화를 체감케 하기엔 안성맞춤이었으며, 신규 팬을 유입시켰다는 점에서 일장일단의 결과물이었다.

전과는 다른 오리지널리티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 시점이라면 < Queen of Hip-pop >(2005)과 < Play >(2007) 때라고 할 수 있는데, 나오와이엠티(Nao'ymt), 티쿠라(T.Kura) 이 주도한 악곡으로 2000년대의 아무로 나미에를 새롭게 완성시켰다. 'Want me, want me', 'Girl talk', 'Hide &seek' 등 퀄리티 높은 곡들이 연달아 탄생했다. 다소 주춤했던 기세 역시 이 무렵 회복세를 타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베스트 앨범 < Best Fiction >(2008)으로 밀리언셀러를 달성하고 연간차트 1위에 등극하게 된다. 그야말로 끊임없는 자기진화가 만들어낸 정상탈환이었다.

이렇게 커리어의 후반으로 오면서 그간의 경험과 노력 덕분인지 목소리는 두꺼워졌고, 무엇보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발음과 멜로디와의 유착감은 어느덧 장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음을 실감케 했다. 감각적인 비트와 세련된 워딩, 안주하지 않는 노력이 빚어낸 퍼포먼스는 로컬과 인터내셔널의 취향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일본 여가수로서의 자리를 굳건히 하는 일등공신이었다.

2017년 9월 소리소문없이 날아들 비보

역사란 참 두고 봐야 하는 것 같다. 하마사키 아유미와 우타다 히카루가 < A Best >(2001)와 < Distance >(2001)로 세기의 라이벌전을 펼치고 있었을 때만 해도 이미 한물갔다고 생각했던 아무로 나미에가 2018년에 이르기까지 이토록 전방위적 활동을 벌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가 있었을까.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방법을 순탄치 않은 경력 동안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변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명백히 구분할 수 있는 지혜였다.

2012년 15년만의 돔투어를 기점으로, 다시 한 번 변화의 계절이 찾아온다. < Uncontrolled >(2012)를 넘어 < Feel >(2013)을 통해 완연한 EDM으로의 체질 개선을 완료한 것. 이와 함께 완연한 공연형 가수로서 정착하며 단일 투어로 100회 공연을 달성한 < namie amuro LIVE STYLE 2016-2017 >의 업적을 남기는 등 화려하게 25주년을 장식했다. 그리고 2017년 9월, 비보가 소리소문없이 대중들에게 날아들었다.

이만큼 진폭이 큰 가수도 없다. 올라갔다 싶으면 땅을 쳤고, 아플 새도 없이 다시금 디딤발을 내딛어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그 과정 속에는 모든 상처를 홀로 끌어안아야 했던 인간 아무로 나미에의 인생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굴곡을 겪었음에도 그녀는 밝다. 긍정적이다. 20년 동안 그 미소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Get myself back'의 가사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상처받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야 / 지금까지도 잘 극복해왔어 / 눈물은 닦자 지금부터가 진짜 아니겠어 / 이제 괜찮아 모든 게 다 잘 될 거니까' 많은 시련 속에서도 결국 웃는다. 긍정의 한켠에 부정적인 일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조그맣게 세를 내어주는 것, 그것이 다른 이들과 달랐던 점이다.

현재 아시아를 포함한 마지막 투어를 진행중이나, 아쉽게도 한국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 2004년 콘서트 당시 정산과 관련해 문제가 발생한 이후 내한 공연은 성사되지 않고 있다. 한국에 있는 팬으로서 큰 소리로 "그동안 수고했고 고마웠어요!"라고 외쳐주고 싶으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다. 그럼에도 이젠 아티스트가 아닌, 인간 아무로 나미에의 행복을 빌어주고 싶다. 대중을 위해 젊은 날을 모조리 바친 그녀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상처와 역경을 감수해야만 했던 그녀에게, 이젠 아낌없이 박수치며 제이팝 여제의 퇴장을 예우해주고 싶다. 은퇴날인 2018년 9월 18일, 'Can you celebrate?'이라 묻는 그녀에게 'I can celebrate'라 답하며.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개인 브런치(brunch.co.kr/@sunuphwang)에도 업로드되었습니다.
아무로 나미에 제이팝 JPOP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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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평론가 |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 대중음악웹진 이즘(IZM) 에디터(2010~2017) - < 당신이 알아야 할 일본 가수들 > 집필 - 멜론X서울신문 주관 KPOP 100대 명곡 기획 참여 - 빌보드 매거진 코리아, 롤링스톤 코리아, 일본 뷴슌 등 기고 - 브런치(http://brunch.co.kr/@sunuphwang) 운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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