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염력>의 스틸컷. 이 영화의 액션씬은 별로 감흥이 없다. CG나 특수효과의 문제는 아니라, 보여 주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

영화 <염력>의 한 장면. ⓒ (주)NEW


초능력을 지닌 영웅물이라는 소재에 한국사회를 녹인 영화 <염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지난 1월 31일 개봉 직후 하루 만에 27만 명을 모으며 흥행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으나 주말을 지나며 예매율과 좌석점유율이 하락, 지난 4일부터 <그것만이 내 세상>에 1위 자리를 내줬다.

이와 함께 포털사이트 기사와 SNS 상에선 <염력>에 대한 다양한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개봉 직후 일부 기사에 '덕분에 불면증이 나았다', '<리얼>은 피했는데 <염력>은 미처 못 피했다'는 조롱 투의 댓글이 달리거나, 1020세대 중심의 SNS에는 사진을 이어붙이거나 영상을 거꾸로 돌리는 식의 이른바 <염력> 따라하기 게시물이 올라오고 있다.

한 작품에 다양한 평가가 나오는 건 분명 반가운 일이며 개봉 중 이런 얘기가 오가는 건 감독이나 출연배우 입장에서도 긍정적인 현상이다. 다만, '역대 급 망작'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영화 <리얼> 때 두드러졌던 일종의 '악플놀이'가 <염력>에까지 미친 건 다소 억울할 수 있는 상황. <돼지의 왕> <사이비> 등의 성인 애니메이션으로 잔혹한 한국사회와 약자 간 아귀다툼을 묘사해 온 연상호 감독의 작품이기도 하고, 우리 사회 비극 중 하나인 용산참사를 꽤 진정성 있게 녹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단순히 흥행만을 기준으로 바라볼 작품이 아닌 만큼 <염력>에서 발견할 수 있는 키워드들을 정리했다.

[하나] 히어로물 비틀기

 영화 <염력>의 한 장면

석헌은 산책 중 떠 먹은 약수로 인해 우연히 초인적 힘을 갖게 된다. ⓒ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초인적 능력을 가진 히어로물은 엄연히 이제 하나의 장르다. DC코믹스, 마블코믹스 등 각종 코믹북은 물론이고, 할리우드 영화에선 이미 다양한 소재와 캐릭터를 활용한 영웅물 사례가 많다. 일종의 장르로 자리 잡았기에 여기엔 일정한 공식이 있다시피 하다. 예를 들면 선악 구도가 분명하다는 것, 주인공을 상징하는 특정 유니폼이 있다는 것, 빠른 이야기 전개와 강한 액션이 나온다는 것 등이다.

<염력> 속 석헌은 우연히 능력을 얻는다는 점에선 기존 히어로물의 진행과 유사하지만 초능력을 얻은 후 그 어떤 수트도 입지 않는다. 헐렁한 바지와 낡은 점퍼가 전부다. 여기에 더해 그가 상대하는 대상도 죽어 마땅한 악인들이 아니다. 연상호 감독 역시 이것을 의도했다. 인터뷰 자리에서 그는 "절대악이 아닌 시스템과 싸우는 주인공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기에 모든 사건이 끝난 뒤 석헌이 하는 선택이 의미 있다. 초능력으로 경찰과 용역업체 직원들을 쓸어버릴 수도 있었음에도 그는 제 3의 선택을 한다. 자칫 우울한 결말로 생각할 수 있는데 딸 앞에서 당당한 아빠 역할을 하고 싶었던 그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패배가 아닌 진정한 승리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둘] 도시개발

 영화 <염력>의 한 장면

석헌의 딸 루미(심은경)는 치킨 장사로 대박을 터뜨리지만 이내 재개발 이슈로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 ⓒ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초능력자가 맞이할 수 있는 여러 시련 중 감독은 왜 하필 재개발 혹은 도시개발이라는 설정을 차용했을까. 분명 <염력>의 특정 장면들은 2009년 발생한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한다. 가족 관계의 회복을 그리면서 그 배경으로 도시개발을 묘사했는데 이 '도시개발'이라는 키워드는 떼어놓고 생각해 볼 만하다. 

<염력>의 시나리오는 영화 <부산행> 촬영을 끝낸 직후인 2016년 초 무렵 나왔다. 얼핏 해당 설정이 시나리오 집필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연상호 감독의 답이 흥미롭다. "96학번인데 그때만 해도 기존의 운동권 형, 누나들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며 연 감독은 "민주화 이슈 이후 소위 운동하던 대학생들 사이에서 새롭게 떠오른 이슈가 바로 도시개발이었다. 또 용산참사 여기저기 뛰어다녔던 활동가 분들도 이미 그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답과 함께 연 감독이 언급한 작품이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1988)과 기타쿠보 히로유키 감독의 <노인 제트>(1991)였다. 전자는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사회적 폭력을 당한 상계동 철거촌 주민들의 아픔을 다룬 작품이며, 후자는 가족에게 버림받은 한 노인이 사이보그로 재탄생하며 폭주하는 이야기를 그린 판타지 애니메이션이다. 적어도 <염력> 속 철거촌 모티브는 연상호 감독이 20여 년 전 부터 품어왔던 카드인 셈이다.

[셋] 한국형 디스토피아

 <염력>의 스틸 사진

<염력>의 스틸 사진 ⓒ NEW


할리우드 영웅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결말 하나. 모든 악당을 물리치고 위기에서 벗어난 주인공은 자신의 가족 혹은 친구의 곁으로 돌아간다. 그 순간 따뜻한 음악이 흐르고, 행복감을 느끼는 등장인물들을 멀찍이서 보여주거나 다음 시리즈를 암시하기도 한다.

<염력>의 결말은 이와 다르다. 앞서 언급한대로 공권력과 용역 업체 직원을 쓸어버리지 않는 석헌의 모습, 그리고 자기 삶을 찾아 흩어지는 이웃들을 보여준다. 관객에 따라서는 '새드 엔딩'으로 여길 수 있는 지점이다.

연상호 감독 전작들을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정서다. 딸을 구하고 관계를 회복하려는 대중적 정서가 <염력>의 큰 축이지만 동시에 연상호 감독은 영화 곳곳에 거대 시스템에 순응한 채 살아가는 서민들, 그리고 이들이 쉽게 연대하지 못함을 암시하는 장면들을 넣어놨다. 용역 업체 직원들과 경찰이 들이닥칠 때 자신의 몸을 못 가누게 된 한 주민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장면이 그런 예 중 하나다. 

"더 강한 신도 있었는데 편집했다"고 연상호 감독은 전했다. 서로 돕지 않는 서민, 연대하지 못하는 약자들 정서는 이미 그의 전작 <돼지의 왕>, <사이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연 감독은 "일종의 계급 피라미드가 (한국사회에) 있는데 피라미드 위에 속한 계급일수록 (이해관계가 공통적이니) 연대하기 쉽고, 아래일수록 연대하기 어렵다"며 "<염력>에서도 그걸 보이는 몇 개의 신이 있었는데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뺐다"고 밝혔다.

정리하면 <염력>에도 연상호 감독이 줄곧 전작에서 묘사해왔던 일종의 한국형 디스토피아가 담겨있다. 이걸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 건설사 임원인 홍 상무(정유미)의 대사다. "저나 아저씨나 모두 이 사회의 노예라고요. 진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기도록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석헌을 윽박지르는 홍 상무의 모습은 곧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이 공고해진 우리 사회 불합리성과 비상식성을 상징한다.


염력 연상호 류승룡 심은경 용산참사
댓글2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