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매켄로라는 테니스 선수가 있었다. 테니스 실력은 출중했지만 코트 위에서 '튀는 행동'으로 악명 높았다. 심판에게 항의를 하다가 라켓을 집어던지기도 하고 상대선수에게 욕을 하거나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그의 별명은 '코트의 악동'이었고, 그 유명세는 테니스의 변방이었던 한국에도 꽤 널리 알려졌다.

이후 나브라틸로바, 스테피 그라프, 앙드레 애거시 같은 테니스 선수들의 이름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최근에는 러시아의 여자 테니스 선수 사라포바가 상당한 인기였다. 한국의 예능프로그램 MBC <무한도전>에 출연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좀 주춤하지만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미국 Showtime 채널에서 제작한 드라마 <튜더스(Tudors)>는 잉글랜드의 튜더왕조 시대를 배경으로 헨리 8세와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드라마에는 왕실의 사람들 그리고 그와 가까운 귀족들이 테니스를 즐기는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테니스는 원래 중세 프랑스의 귀족이나 성직자들이 즐겨하던 공놀이에서 유래했다. 그러다가 영국으로도 전파되었는데, 초기에는 장갑을 끼고 손으로 공을 쳤다. 그 이후 라켓이 고안이 되면서 폭발적으로 보급이 됐고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영국의 중산층들이 즐기는 스포츠로 일반화되었다.

사실 테니스는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스포츠다. 영국은 미국이나 인도 호주 등 자신들의 식민지에 수많은 테니스 코트를 지었다. 실제로 1873년에 인도에 주재했던 영국의 군인 윙필드가 지금과 같은 경기 체계를 세운 이후 테니스는 급성장했다.

이른바 그랜드슬램이라고 하는 윔블던, US오픈, 프랑스오픈 그리고 호주 오픈 등 4대 메이저 대회가 열리는 지역들을 보면 테니스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뙤약볕 아래에서 코트의 흙을 평평하게 다지는 식민지의 노예들, 그늘 밑에 앉아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그 모습을 바라보는 귀족들의 모습이 테니스의 이미지였다. 한국에 전파된 초기에도 그와 같은 귀족 스포츠의 이미지가 강했지만 대중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최근 이 테니스 덕분에 많은 국민들이 즐거워했다. 과거 앙드레 애거시나 사라포바 그리고 최근의 조코비치, 페더러, 나달 같은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들은 외신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다. 우리와 별 상관 없는 종목의 선수들이라고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선수가 세계 4대 메이저 테니스대회 중 하나인 호주오픈에서 전(前)세계 1위 노박 조코비치를 꺾고 4강전에 올랐다. 그가 결승 진출을 겨룬 선수는 무려 '테니스의 황제' 로저 페더러였다. 복싱으로 치면 우리 선수가 파퀴아오를 이기고 메이웨더와 경기를 가진 정도의 사건이었다. 조코비치를 이겼다는 소식에는 많은 이들이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정현 선수의 대단한 도전이었다. 이제 한국 나이로 스물세 살이 된 청년이 앞으로 어떤 스토리를 써 나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성의 전투(Battle of the sexes)

배우 엠마 스톤이 주연한 영화 <빌리진 킹-세기의 대결>(2017)은 1973년 당시 여자 테니스 랭킹 1위였던 미국의 테니스 선수 빌리진 킹의 실화를 소재로 한다.

여자 테니스선수 랭킹 1위였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터무니 없이 적은 상금을 받았던 빌리진 킹은 협회의 테니스대회를 보이콧하고 직접 WTA(세계여자테니스협회)를 설립한다. 윔블던 챔피언이었던 왕년의 테니스 스타 바비 릭스는 은퇴 이후 도박에 빠진 채 그저 자신의 명성을 이용한 쇼 비즈니스를 통해서 살아가고 있었다.

남성 우월주의자인 바비는 빌리진 킹에게 자신과 테니스 성 대결을 해보자고 제안한다. 목적은 물론 돈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여자는 남자와의 게임에서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속내가 숨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빌리진은 이 제안을 거절한다. 설득에 실패한 바비는 당시 빌리진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여자 테니스선수 마가렛 코트에게 같은 제안을 하고 게임은 성사된다. 결과는 바비 릭스의 완승으로 끝났고, 기세등등한 남자 테니스협회장은 말한다.

"여자가 테니스를 못 친다는 게 아닙니다. 심리적으로 약하다는 거죠. 오늘 보셨듯이 여자는 남자를 못 이깁니다. 사업, 정치, 스포츠 등 어느 분야에서도 최고의 자리는 항상 남자의 몫이죠. 앞으로 똑같은 상금을 요구하는 일은 다시는 없길 바랍니다."

언론은 이 게임을 여성해방운동에 대한 완벽한 남성의 승리라고 선전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빌리진 킹은 바비 릭스와의 게임에서 반드시 이기겠다고 결심한다. 두 사람의 경기는 대중의 엄청난 관심을 이끌었다. 실제로 1973년에 TV로 중계된 이 경기를 9천만 명의 시청자가 지켜봤고, 달 착륙 이후 최고의 시청률로 기록되기도 했다.

이 영화의 원제는 < Battle of the sexes >, 문자 그대로 '성(性)의 전투'다. 여권 신장을 위해 경기에 임하겠다는 빌리진 킹 그리고 여성의 열등함을 증명하겠다는 바비 릭스, 경기의 승자는 누구였을까?

힘겨운 2030의 전쟁

호주오픈에서의 정현 선수가 보여준 발군의 경기력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게임 이후 인터뷰에서 보여준 정현의 재치 있고 당당한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2030세대의 자유분방함을 느꼈다고도 했다. 그토록 대담한 강심장이기 때문에 듀스 상황이나 타이 브레이크 게임에서 거의 대부분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은 테니스의 불모지나 다름이 없다. 세계 테니스의 패권은 여전히 유럽과 미국의 선수들이 대부분을 독점하고 있다. 아시아권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체구가 작고 체력이 뒤지기 때문에 서구 유럽의 선수들을 이기기 힘들다고들 말한다. 그리고 정현 선수는 지금 이와 같은 인종주의적 편견에 도전하고 있다.

영화 <빌리진 킹-세기의 대결>에서 빌리진 킹은 "여자는 코트에서 공이나 주우면 된다"던 당시의 편견과 차별에 도전했다. 20대의 현역 여성 선수가 50대의 은퇴한 남자 선수와 대결하는 것에 대해 공정하지 않다고 문제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영화에서 빌리진 킹은 "남자가 더 우월한 것은 사실 아닌가?"라고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전 여자가 더 우월하다고 말한 적 없어요. 그저 정당하게 존중해 달라는 거죠. 당신은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나요?"

호주오픈 4강 진출에 성공한 정현선수에게 문재인 대통령은 축전을 보냈고 이를 SNS에 올린 정현 선수는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저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을 응원하겠습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워야 한다는 말씀에 테니스 선수로서 깊이 공감합니다."

모두에게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가 하루 빨리 오기를 바랄 뿐이다.

정현 빌리진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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