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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식의 거짓발언으로 보도연맹원 소집에 응해 학살된 영화배우 박희서
▲ 박희서 신형식의 거짓발언으로 보도연맹원 소집에 응해 학살된 영화배우 박희서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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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 영운동에 거주하던 박윤하는 신형식을 불렀다. 박윤하는 청주시 유지로 평소에 신형식과는 잘 아는 관계였다. "신군! 보도연맹원 소집이 있는데, 이에 응해도 되겠는가?" 성균관을 나와 박사직책을 맡은 박윤하는 자신의 아들 박희서가 걱정이 되어, 신형식에게 자문을 구한 것이다.

신형식의 답변은 담담했다. "박 선생님, 절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제분을 청주경찰서 무덕관으로 보내세요. 그냥 의례적인 소집입니다" 이 말을 철썩 같이 믿은 박윤하는 아들을 무덕관으로 보냈다. 하지만 아들 박희서는 그 뒤로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청원군 어디에선가 죽음의 구렁텅이로 떨어진 것이다. 미남 영화배우 박희서는 젊음을 그렇게 끝내야 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07년 유해 발굴 보고서』, 2008)

피난길에 신형식 명함 때문에 죽을 뻔했던 홍관의

현재 충청일보의 전신 충북신보 주간 홍원길은 충북 보은에서 해괴한 경험을 치렀다. 여름 난리에 피난을 가던 홍원길은 보은에서 헌병대와 군정보기관원을 만났다. 이들은 피난길에 섞여 있을지도 모르는 5열(五列: 간첩)을 잡겠다며 피난민들을 일일이 수색했다. 그런데 홍원길 직장 부하였던 홍관의 한테 문제가 생겼다. 홍관의 양복주머니에서 충북 보도연맹 간사장 신형식의 명함이 나온 것이다.

군인들은 홍관의가 당연히 보도연맹원일 것으로 생각하고 검거했다. 그리고 즉결처형하기 위해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홍원길은 분통이 터졌다. 헌병들을 향해 외쳤다. "생사람 잡지 마시오. 이 사람은 신문기자라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접촉 할 수 있는 사람이니 누구의 명함인들 없겠소"라며 항의했다. 그런 연후에 자기가 신분을 보장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헌병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에 홍원길은 그들의 상관인 헌병대위를 만나, 다시 사실 정황을 설명하고 홍관의를 구출할 수 있었다. 홍원길은 충북지역 언론계의 대부이며 후일 치러진 초대 지방선거에서(1952년) 충북도의원에 당선되었다. 또한 1956년 초대 민선청주시장에도 당선되었고, 1960년에도 시장에 재선된 정치인이다. 이런 유명인사가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면, 홍관의는 신형식 명함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즉결처형 당했을 것이다.

홍역을 치른 홍원길이 다음 날 보은군 원남면으로 갔을 때의 일이다. 이시환 충북도경찰국장이 피난 와 있다는 소리에 인사차 갔더니, 신형식이 거기에 있었다. 경찰이 신형식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야전주연(野戰酒宴)이 벌어졌다. 신형식은 태평스레 그 자리에서 술을 마시며 즐겼다. 자신이 주도해 만든 충북보도연맹 맹원 약 5,800명이 충북지역 곳곳에서 학살되고, 피난길에서도 보도연맹원의 신분이 드러나면 즉결 처형되는 상황에서 말이다(홍원길, 『청곡회고록』, 1978).

좌익에서 전향(轉向)해 충북보도연맹 수장(首長)이 되다

신형식의 본적과 나이가 기록된 재판자료
▲ 신형식 프로필 신형식의 본적과 나이가 기록된 재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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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시절 청주농고생 신형식은 청주고보생들과 함께 독서회 활동을 했다. 일제경찰에 의해 검거되어 「적우연맹」 사건으로 엮이어, 징역 5년을 선고받아 1932년부터 1936년까지 감옥생활을 했다. 출감 후에 조선일보, 중앙일보, 만주일보 기자를 하다 해방을 맞이했다. 1945년 11월 근로인민당 충북도당 부위원장을 맡았고, 충북인민위원회, 조선공산당 충북도당 간부를 맡았다. 또한 충북민주주의민족전선 선전부장을 맡기도 했다. 즉 해방 후 청주에서 좌익운동의 대부역할을 한 것이다.(신형식 재판자료)

그러던 그가 1946년 9월 사상전향 선언을 했다. 근로인민당 직책을 제외하고는 모든 직에서 사임했다. 지식인의 사상전향은 무서웠다. 신형식은 이때부터 양지(陽地)만을 찾아다녔다. 1949년 12월 이시환 충북도경찰국장과 김윤수 청주지검장의 제의를 받아들여 충북보도연맹 간사장에 취임했다.

보도연맹이란 무엇인가? 과거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을 전향시켜, 공산당과 김일성으로부터 보호해, 국민으로써 잘 이끌겠다는 취지가 아니었나? 하지만 본래의 취지는 온데 간데 없었다. 좌익활동가를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색출해 섬멸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선 충북보도연맹 간부진이 경찰 경력을 가진 자와 우익단체 간부 출신으로 채워진 것이다.

총무부장 김연호는 청총 2대 회장을 역임했고, 조직부장 이용규는 충북도경 사찰과 주임이었다. 또한 감찰부장 차근호, 정보부장 박계택, 선전부장 민한기 역시 청주의 내노라하는 우익단체의 간부였었다. 즉 신형식을 제외하고는 간부진 모두가 전직 경찰과 우익활동가로 채워졌다. 이는 보도연맹이 본래의 취지대로 구성된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즉 보도연맹은 관(官)을 이용해 좌익을 색출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보도연맹 조직 확대를 위해 백마 타고 강연 다녀

신형식의 이력이 기록된 판결문
▲ 신형식 이력 신형식의 이력이 기록된 판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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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렇다보니 충북보도연맹은 경찰·검찰과 연계해 과거 남로당원들에게 탈당성명서를 내게 하고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했다. 또한 보도연맹 확대를 위해 여러 가지 묘안을 짜냈다. 정부의 지역할당제에도 적극 호응해, 좌익 활동 경력과 무관하게 농민들과 시민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특히나 간사장 신형식은 전향자 단체인 보도연맹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위함인지, 맹원 증대를 위해 열성이었다. 김기반(1924년생. 2015년 작고)의 증언에 의하면 맹원 확대를 위해 신형식이 청원군 강내면에 백마를 타고 왔다고 한다. 신형식은 주로 반공강연을 하며 맹원을 증대했다. 김기반의 증언이다. "교육이 있어서 보련사무실에 가서 신형식 강연을 들었지. 당시 신형식은 무장을 갖춘 부하를 2~3인씩 거느리고 시내를 활보 했는디, 마치 그 위세가 도지사였지. 신형식의 강연 내용은 주로 김일성 욕하는 거였지 뭐" 김재권(80세. 증평군 증평읍 덕상리)의 증언도 유사하다. "어느 날엔가 보련 간사장 신형식씨가 마을에 강연하러 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청주경찰서 사찰과와 충북도경 대공과에 근무했던 신수인(1923년생)은 신형식이 반공강연을 도맡아했다고 한다.

"보도연맹 사무실에서 수시로 반공교육과 강연을 했어. 그때는 교육용 책자나 자료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찰과에서 반공관련 자료를 긴급히 만들었는데, 차트를 제작하기도 했지. 교육은 주로 신형식이 맡았었는데 대단한 웅변가였어. 신형식이 연설을 하면 말도 잘하고 아주 감동적이었어"

이렇게 신형식은 보도연맹 결성과 운영에 수동적으로 대처한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해 맹원 확대를 꾀했다. 그러다 6.25가 터지자 동료들을 보호하기 위해 애쓴 것이 아니라 자신만이 살기 위해 몰래 도망갔다.

부산에서 CIC 문관으로 활동할 때 권총차고 다녔지

충북지역 보도연맹원 약 5800명이 저승길에 갈 때 총살 집행자나 지시한 사람이 신형식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신형식은 충북지역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다. 보도연맹원 처형 당시 현장에 신형식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감찰부장 차근호를 포함해 주요 간부는 현장에서 군인과 경찰의 보조 인력으로 참여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보도연맹원이 죽음의 길로 갈 때 신형식은 모든 사실을 알았으며, 보도연맹원 분류작업에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보통 시·군 단위에서 보도연맹원을 학살할 때 군·경에게 협력했기 때문이다.

충북지역 보도연맹원의 생과 사를 가를 때 신형식의 관여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청주시 영운동 박윤하가 자신의 아들이 소집에 응하는 것이 어떤지 자문을 구했을 때, 신형식은 박희서를 구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약 5800명의 충북지역 보도연맹원들이 황천길에 갔을 때 본인은 보은을 경유해 부산으로 피신했다. 그것도 충북도경찰국장의 도움을 받아 경찰의 호위 속에서 말이다.

부산으로 간 신형식은 특무대(CIC) 문관활동을 했다. 학생연맹 충북지부장을 역임한 이종찬(1924년생)은 "신형식이 부산에서 CIC에 근무할 때 군복을 입고 권총차고 다녔지"라고 한다.

자신이 수장으로 있던 단체 구성원 대부분이 황천길로 갈 때, 신형식은 보은에서 술 파티에 참여했다. 또한 피난길에서 황천길에 갈 뻔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신형식은 부산에서 권총을 차고 다녔다. 사회주의자에서 반공투사로 전향한 것을 뭐라 할 수는 없다. 다만 보도연맹 결성 취지대로 조직을 운영해, 비상사태 하에서 보도연맹원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게 그가 역사애서 책임질 일이다. 해방 후 양지(陽地)만을 찾아 해바라기처럼 살은 신형식의 역사적 책임에 대해서 묻고 싶다.


태그:#신형식, #전향, #보도연맹 간사장, #특무대, #백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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