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부터 새 천 년까지. 이 시기에 나온 영화는 '사이버 펑크'라고 불리는 것이 대다수였다. 사이버 펑크는 주로 어두운 느낌의 배경에, 현재의 도시와 미래의 기술을 반반 섞어 놓은 듯한 장르다. 가로수길에 안드로이드가 걸어 다니고 63빌딩에 미디어 파사드(대형 홀로그램)가 펼쳐져 있다고 상상해보면 쉽다. <12 몽키즈>, <블레이드 러너>, <공각기동대> 등.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 이 영화들은, 한결같이 기술발달 탓에 도태된 것을 그리고 있다. 아마도 새 천 년에 다가올 기술발전이 마냥 긍정적이진 않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암울한 현재를 박살 내고 밝은 미래를 고대했던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며 허탈해하고 있을까? 당연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의 생각을 알 수는 없어도, 우리는 그들의 생각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우리의 과거였고, 그들의 생각이 사이버 펑크라는 이름 아래 낱낱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키라>(1988)는 그 기록 중의 하나다. 








이 영화는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했으며, 애니메이션이다. 동시대에 나온 여러 사이버 펑크 영화 중에서 특출나게 잘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 들어간 자본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애니메이션임에도 실사 영화 못지않은 부드러움이 관객을 놀라게 한다. 셀 애니메이션이 사람 손으로 한 땀 한 땀 그려낸 것이라는 걸 떠올려 보자. 이제 막 버블이 꺼지기 직전의 일본은 한 땀 한 땀에 돈을 쏟아부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그만한 퀄리티에도 정작 일본에서 적자를 내고 만다. 대신 해외 반응이 좋아 흑자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외면받고 해외에서 인정받았다는 건, 둘 중의 하나다. 그만큼 일본 사회에 공감을 얻지 못했거나 혹은 불편해서 피하고 싶었던가. 작품의 내용으로 짐작해보면 아마 후자에 해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영화는 모종의 사건으로 폐허가 된 일본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기 때문이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지만 그 원인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그것으로 나라가 망해버린다는 점에서 2차 세계대전 끝자락의 일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작품이 진행되며 밝혀지는 폭발 원인이 부국강병을 위해 연구하던 초능력자의 폭주 때문이었다는 점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아마 당시 일본의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며 어딘지 모를 뜨끔거림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경제력으로 미국과의 격차가 아주 실금만큼 좁혀졌을 그 시기, 그들이 미국으로부터 패망했고 현재도 보호받는다는 사실이 이 영화를 외면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영화가 사람들에게 '한 땀 한 땀' 장인 영화로만 비치는 게 상당히 아쉽다. 이 영화는 프레임 수가 많다는 것 말고도, 그 시대를 읽어내는 아주 좋은 텍스트다.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의 세계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략적으로 읽을 수 있다. 이 글은 그러한 맥락을 짚어내고, 그것이 지금 현재 우리에게 어떤 담론을 이끌어내는지 알아볼 것이다.   






<아키라>가 보여주는 상징들


작품에 여러 인물이 나오지만, 아무래도 주인공이라 부를만한 건 두 사람뿐이다. 쇼타로와 테츠오는 네오도쿄를 방황하는 청소년 폭주족이다. 망가진 미래 어딘가를 달리는 오토바이 무리는 어떤 존재를 만나게 된다. 어린아이의 모습이지만 노인처럼 늙은 누군가는, 초능력이 있는 것인지 거대한 힘을 휘두른다. 당황한 아이들에게 군인들이 다가오고, 그중 사건의 주요 목격자인 테츠오를 납치해간다. 무리의 대장인 쇼타로가 테츠오를 구하러 가지만, 테츠오는 이미 어딘가로 사라진 후다.  


이 작품은 그러한 초능력을 가진 존재가 주요 역할로 상정된다. 작품의 제목은 극 중에서 역사상 가장 큰 초능력을 가졌던 인물의 이름이다. 그 존재가 폭주해 도쿄에 폭발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그때 이후로 온몸이 절단(농담이 아니다!)되어 어느 시험동에 부위별로 냉동되고 만다. 그렇게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를 어떻게 제압했는지는 모른다. 중요한 건 그가 제압되었고, 테츠오가 그처럼 거대한 힘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아키라는 일본의 부흥을 위한 존재였다. 그런데 아키라는 통제되지 않았다. 아키라는 폭발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전쟁이 일어났다. 아키라의 힘은 하나의 거대한 핵미사일에 해당한다. 끝내 책임을 지고 사지가 해체된다. 여기까지는 전후 일본의 행보와 같다. 일본은 통제되지 않았다. 일본의 힘은 하나의 거대한 핵미사일에 해당한다. 끝내 책임을 지고 사지가 해체된다. 이쯤에서 당신은 이상한 점을 느꼈을 것이다. 왜 이 작품은 일본을 '핵미사일'과 같은 존재로 상정하고 있을까? 그리고 왜 폭발을 일으켜 자기 자신을 패망시키고, 전 세계를 전쟁에 몰아넣게 됐을까?

 
 영화 <아키라>의 한 장면

영화 <아키라>의 한 장면 ⓒ (주)삼지애니메이션




이 작품은 두 가지 방향에서 보아야 한다. 동양의 시각과 서양의 시각이다. 전쟁 당시 일본의 손아귀에 삼켜졌던 동아시아 국가에 이 작품은 몹시 불편하다. '일본이 핵미사일과 같은 힘'이 있었다고 말하는 걸 보기 힘들 것이다. 그 힘으로 자기 나라를 침략했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전쟁 당시 일본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아키라가 강제로 해체되었다는 점에서 반성의 기조가 있다. 해체 자체가 반성을 뜻하는 건 아니어도, 그들이 패망했다는 사실관계를 명백히 했기 때문이다. 서양의 시각에선 바로 그 부분이 기분 좋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른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다.



물론 유럽도 전화가 끼쳤다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다. 단지 일본의 행보가 서구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에 그렇다. 결국 서구권에서 이 영화를 가장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건, 일본과 전쟁을 치룬 미국뿐이다. 이 영화에 소련도 등장하지만, 소련은 비중도 크지 않은 데다 현실에서도 해체되고 없다. (1991년) 그런데 이 영화에서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싸움으로 일본이 피해를 본 것을 미안해하고 있다. 이 부분은 현실과 정반대되는 것으로, 어딘지 모르게 일본 스스로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아주 애매하다. 이 영화에서 일본이 자국을 규정하는 방식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얽혀 있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비판을 해야 할지 옹호를 해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결단을 제쳐놓고 영화 자체만으로 생각해보자. 그때, 이 영화는 정말 이상한 것이 된다. 아키라가 일본을 대변한다면, 아키라와 같은 초능력자를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일본 재건의 꿈과 다름없다. 하지만 영화는 단지 패망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바뀌어 버린 하층민의 삶을 부각하고 있다. 

 
 영화 <아키라>의 한 장면

영화 <아키라>의 한 장면 ⓒ (주)삼지애니메이션




쇼타로와 테츠오의 모습을 통해 묘사되는 일본은 형편없다. '네오도쿄'라는 이름은 '새것(Neo)'이 되지 못하고 헌신짝처럼 비틀어져 있다. 돔 안에 갇힌 도쿄는 내내 어둡고, 네온사인만이 눈을 번뜩인다. 아이들의 학교에 찌라시가 휘날리고, 선생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들을 대변하는 건 '자유해방'을 뜻하는 폭주밖에 없다. 아이들의 바이크는 지금 우리가 보기에도 무척 멋있고 세련되어 있다. 아이들에게 '새것'은 도시가 아니라 바이크이고, 그것은 아이들을 대신해 힘껏 달려나간다. 물론 갑갑한 도쿄 돔 안에서만 뺑뺑 돌 뿐이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건 무척 부드러운 프레임이다. 유독 달리는 장면에서 부각되는 영화의 '한 땀 한 땀'은, 제작진이 공들인 장면이 폭주라고 직접적으로 말해준다. 재밌게도, 폭주와 폭발은 '폭'이라는 같은 발음을 지닌다. 물론 그 단어를 이루는 한자가 다르지만, 끝없이 타오르는 내면의 에너지를 묘사해낸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띤다. 폭주족 테츠오는 초능력을 지녀 폭발을 일으키게 되고, 그것을 통해 '네오 도쿄'가 무너진다. 이제 한번 재건되었던 것은, 다시금 재건되어야 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네오 도쿄를 전후에 새로 태어난 현재의 일본이라 가정해 본다면, 그것을 무너뜨리는 테츠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아이들은 현재의 사회에 불만을 품고 있고,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온갖 열성을 다한다. 결국 그들 사회가 부흥을 위해 길러 냈던 '초능력'이 붕괴의 시초가 된다. 한마디로, 이 영화에서 일본은 자기 자신에 의해 무너지는 꼴이다. 그런데 그것은 영원토록 반복될 것이다. 폭발의 과정과 모습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영화에 나오는 '네오 도쿄', 현재의 일본이라 가정해 보면...

 
 영화 <아키라>의 한 장면

영화 <아키라>의 한 장면 ⓒ (주)삼지애니메이션




그렇다면 일본은 해체와 재건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모습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일본 아래에 있었던 동아시아 국가에 이러한 모습은 악몽처럼 보일 것이다. 전쟁의 망령이 스멀스멀 기어와 신체를 재구축하려는 게 공포스럽기 때문이다. 그 이미지는 영화 속에서 테츠오가 폭주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아주 그로테스크하게 묘사되는 테츠오의 팔은, 통제할 수 없어 끝없이 팽창해 자신의 여자친구를 압사시킨다. 자신의 소중한 것을 파괴할 만큼 통제되지 않는 팔은, 일본이 '힘'에 대해 어떤 접근을 하는지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 영화가 그때 당시, 미국의 보호로 출발해 미국을 뛰어넘을 수도 있던 일본의 마음을 반영한다고 생각해보면 조금은 어긋나게 된다. 이 영화가 암묵적으로 미국에 대한 열등감을 품고 있고, 그에 따라 영화 속 힘이 미국을 뛰어넘기 위해 생겨난다 가정해보자. 힘의 추구는 자기파괴로 이어지고, 네오 도쿄는 도시 앞에 '네오'라는 수식어를 다시금 붙이게 된다. 서구적인 시선에서 이것은 오르지 못할 탑에 자꾸만 도전하는 것으로 보일 테다. 마치 진주만처럼.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영원한 반복 속에 빠져 있다. 힘의 추구와 힘의 붕괴가 반복되고, 그것의 입구와 출구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동양적 시선이든 서양적 시선이든 별 의미가 없다. 단지 그러한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의문이 이 영화에 남아있다. 일본은 어째서 재건의 재건을 꿈꾸게 되었을까. 

 
 영화 <아키라>의 한 장면

영화 <아키라>의 한 장면 ⓒ (주)삼지애니메이션





영화 속에서 쇼타로는 주인공답게 (청소년임에도) 이리저리 활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주워든 어느 총기는, 그야말로 백발백중이다. 이른바 '주인공 버프'를 받은 쇼타로, 하지만 테츠오를 저지하지 못한다. 테츠오는 끝없이 팽창해 자멸하고, 혼자만 죽지 않고 도시 전체를 폭발에 몰아넣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쇼타로가 왜 주인공인지 알 수 없는데, 사실 두 사람의 관계에 해석의 단초가 있다. 영화 속에서 테츠오는 쇼타로와 소꿉친구인데, 몸집이 작고 약해서 내내 쇼타로의 보호를 받았던 것으로 나온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해서, 영화 초반부터 테츠오가 쇼타로에게 열등감을 표하는 장면이 몇몇 나온다.


일본이 미국의 보호 아래 성장했듯, 쇼타로가 미국의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테츠오는 쇼타로에게 자신이 홀로 설 수 있음을 증명하려 했고, 그의 새빨간 바이크를 탐냈다. 일본은 미국에 홀로 설 수 있음을 증명하려 했고, 그의 새빨간 무언가를 탐냈다. 하지만 쇼타로가 테츠오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준 적이 없음에도, 테츠오는 제멋대로 기억을 왜곡해 자신을 피해자로 설정하고 만다. 그것이 테츠오의 열등감이 되어 '폭발'을 일으켰고, 반항감의 발단이 되었다. 두 사람은 같은 폭주족 무리에 있음에도 사실상 다른 꿈을 꾸었던 것이다. 


테츠오는 자신이 전성기 시절 아키라보다 약하다는 것을 듣곤, 해체되어 냉동보관 중인 아키라를 저장고에서 꺼낸다. 그런데 그 아키라는 과거의 폭발을 일으켰던 장본인이다. '과거의 일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아키라는, 쇼타로 말고도 테츠오가 열등감을 가지는 인물이다. 이른바, 현재의 힘이 과거의 힘에게 가지는 열등감이다. 살덩어리는 없고 신경조직만 남은 그 표본들, 이미 사람이 아닌 것에게 열등감을 내는 테츠오의 모습은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 그 광기는 열등감으로부터 비롯되어 자신을 둘러싼 사회를 파국으로 이끈다. 








이는 현대 일본이 미국과 더불어 선진국의 반열에 있는 것과 무관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속 테츠오처럼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을 맞이해 '폭발'하고 만다. 그런데 그 폭발은 어쩌면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니, 현실 일본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그들 스스로 채워지지 않는 열등감을, 그것을 채우려는 힘이 쇠하게 될 것임을 <아키라>가 묘사한다.  


그런데 테츠오의 붕괴와 동시에, 아키라의 표본들이 모여 아키라가 된다. 그 찰나의 순간 뒤에 섬광이 닥쳐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다. 끝내 도시가 붕괴되지만, 그것이 테츠오의 폭발 전체였는지 혹은 아키라가 자신의 힘으로 막아주어 손상을 최소화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만약 아키라가 그 폭발을 막아주었다면, 그들의 과거가 현재의 파국을 막는 단초가 되었다고 인정하는 셈이 된다. 어찌 됐든 둘 다 사라지고 만다.


비슷한 힘을 가졌던 두 사람, 아키라와 테츠오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아키라는 힘을 제어하지 못해 전세계를 광기에 몰아넣는다. 아키라는 그것을 만회하려, 그 실수를 반복하는 테츠오를 막아 세운다.
 
이는 애매한 자세를 취하던 이 영화가, '반전'의 의미를 말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조각난 신체, 그것도 신경망의 형태는 우리 몸에 신호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사회 시스템과 유사하다. 그렇게 신경망의 형태로나마 네오도쿄를 잠식하던 과거의 힘은, 반복된 현재의 과오와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그 후로 마치 축복을 받는 듯 구름 사이로 내려오는 태양 빛은, '힘에의 의지'를 떨쳐낸 그들이 비로소 새 도시를 이루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영화 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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