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코코>의 작품 포스터

영화 <코코>의 작품 포스터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혹자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혹자는 죽음을 기뻐한다. 그 이유에 대해 물으면 여러 답이 나온다. 죽었을 땐 죽음을 인지하지 못하기에 두렵지 않다는 말.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기에 두렵지 않다는 말. 죽음의 상태에선 자신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어 두렵다는 말. 지금껏 쌓아 올린 것들이 사라지기에 두렵다는 말. 숱한 영화들이 그것을 탐구했고, 말했고, 보여주었다. 픽사의 신작 <코코>(2017)는 그런 영화 중 하나다.

<코코>는 새롭지 않다. <코코>가 우리에게 말하는 '죽음'이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교훈에 가깝다. 작품의 주제곡인 "Remember me(기억해줘)"는 직접화법이다. 작품의 제목인 <코코>는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인공의 할머니 이름으로 밝혀지고, 그 노래는 할머니 이름이 언급될 즈음에 흘러나온다. 할머니는 영화 전체를 통틀어 독보적인 주름을 가졌다. 당장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그러니 관객들은 이 영화가 "(죽어서도) 기억해줘"를 말하고자 한다는 걸 초반부터 다들 알게 된다. 그런데 영화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노래한다. '기억'이라는 건 이 영화에서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담론'인 것이다. 하지만 그 노래는 몇 번을 들어도 지루하지 않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각각의 상황은 '같은 의미 다른 맥락'을 보여준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말하는 여러 방법처럼, 이 영화가 기억에 대해 말하는 여러 방법이 있다. 이 글은 그것을 분석하고자 한다.

 영화 <코코>의 한 장면

영화 <코코>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코코>와 기억의 밤

이 영화의 담론이 우리에게 익숙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 우리나라가 유교 문화권이라는 점. 두 번째, 여러 영화에서 차용했던 모티브라는 점이다. 전자는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유교 문화가 아니더라도 나라별로 망자를 추모하는 방법은 다를 테니. 그렇다면 어떤 영화가 '죽음'과 '기억'을 보여주었을까? 대표적으로 팀 버튼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인 <유령 신부>(2005)를 들 수 있다. <유령 신부>는 우연한 계기로 산 자가 죽은 자의 나라에 방문하게 되는 영화다. 두 영화는 '애니메이션'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죽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유령 신부>에서 망자들은 춤추고, 노래하고, 주인공의 결혼식을 축하해준다. <코코>는 멕시코의 전통인 '죽은 자의 날'을 주요 모티브로 차용한다. '죽은 자의 날'은 조상님들이 이승에 방문해 자손과 교류하는 가족 축제이자, 마을 중앙에서 퍼레이드가 이어지는 음악 축제이기도 하다.

이때,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왜 죽음이 기쁜가?' 당연하게도, 그것이 두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영화는 죽음을 행복하고 흥겨운 것으로 묘사하며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낸다. 하지만 <코코>는 <유령 신부>와 다른 점이 있다. <코코>의 주인공 '리베라'는 확실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행동한다. 음악 때문에 가족을 버린 고조할아버지 탓에 리베라에게 음악은 금기다. <유령 신부>가 망자를 만나 마음이 변화한다면, <코코>는 음악의 욕구가 기억의 욕구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리베라는 음악 하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저승에 있는 조상을 '굳이' 찾아간다. 할머니 '코코'가 기억하던 고조할아버지의 모습은 '노래'로만 남아있기에, 리베라는 '노래'를 통해 고조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서 음악은 '기억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을 '기록할 수 있는 매체'로 표현하는 도구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이 영화에서 '사진'은 주요 테마다. 제단에 사진이 올려진 망자만이 '죽은 자의 날'에 다리를 건너 자손들을 마주할 수 있다. 사진과 음악은, 악보에 기록하고 앨범에 모아두는 것처럼 '기억'의 기능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기에 제단에 사진이 없어 다리를 건너지 못하는 망자 '헥토르'는, 조상에게 음악을 인정받으러 저승에 온 '리베라'와 협업할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은 자신이 기억되기를 바라며, 서로가 가진 것을 교환하려 한다. 리베라는 이승 사람이기에 언제든지 사진을 남길 수 있고, 헥토르는 저승 사람이기에 언제든지 노래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서 사진과 음악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죽음'과 '기억'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게 멕시코의 전통이기도 하다.

 영화 <코코>의 한 장면

영화 <코코>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코코>와 사진

영화가 시작한 후 우리가 마주하는 건 가족의 사진이 놓인 제단이다. 그 제단은 가족의 계보를 따라 피라미드의 형태로 놓여있다. 하지만 저승에서 묘사되는 망자는 죽은 시점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즉 저승은 표면적인 위계가 작동하지 않는 곳이다. 겉으로는 젊어 보여도 자신보다 선대에 죽은 사람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나이에 따른 위계에 한한다. 저승에도 암묵적인 위계는 있다. 망자들은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의 수에 따라 인기를 얻고, 그것은 위계를 넘어 계급이 된다. 꼬마 주인공 '리베라'가 저승에 가장 처음에 발을 들일 때 보이는 건 저승의 화려한 전경인데, 그 아래로 흐르는 축축한 강가에 얇은 판막이로 세워진 빈촌이 있다. 제단에 사진이 없는 자들, '잊혀져 가는' 망자가 모여 사는 곳이다. 그러한 이분법은 자본이 지배하는 이승에서 따온 설정이며, 저승에서의 '기억'은 이승에서의 '돈'에 해당한다. 돈이 많아서 기억될 수도 있지만, 돈이 없어도 선행으로 기억될 수 있다. <신과 함께>에서 귀인의 존재처럼 말이다.

<코코>는 현실세계의 법칙을 저승세계로 옮김으로써 당신을 설득한다. 당신은 <코코>를 통해 돈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기억이 돈인 세상'으로 간다. 우리에겐 불교에서의 '윤회'사상으로 익숙한 그것이다. 당신이 지인에게 <코코>를 권한다면 그 부분이 '세일즈 포인트'가 될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에서 저승은 기억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그런데 그것은 사진의 기능과 같다. 사진은 촬영 시점을 종이 위에 가둔다. 당신의 졸업앨범에서 당신은 여전히 고등학생이다. 그 사진은 당신을 기억하는 방법이자 시점이다. <코코>에서 망자가 죽은 시점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건, 우리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망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승은 이승에서의 마지막이 모인 곳이며, 거대한 기억의 통합체가 된다. 그래서 리베라의 모험담은 기억 속 어딘가를 향해 떠나는 것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선호 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하여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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