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훈이 유서대필 주범으로 지목되어 명동성당에서 농성중일 때 나는 쫓기는 몸이었다. 그는 명동성당을 울타리 삼아 무고함을 외치며 절규했고, 나는 그 시간 동안 오로지 잡히지 않기 위해 연고도 없는 밤 도시를 걸었다.

그가 검찰 자진출두를 결정하고 수사관에게 몸을 맡겼을 때, 나는 상점 유리를 통해 뉴스 속보를 보면서 또 다른 도피처를 물색해야 했다. 그는 잡힌 '유서대필 확신범'이었고, 나는 잡히지 않는 '분신 배후 수배자'였다.

26년이 지나 '강기타'로 불리는 강기훈과 스크린에서 마주했다. 수채화처럼 담담하게 펼쳐지는 다큐멘터리영화 <국가에 대한 예의>를 보면서 너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슬펐다. '유서 대필자'라고 손가락질을 하던 민심도, 하루 이틀이 멀게 죽어나가던 처절함도, 오랜 수감 끝에 죽음 앞에 다가선 그의 투병생활도, 영화에는 없었다. 유서대필자 강기훈은 기타와 사진을 좋아하는 그저 평범한 '강기타'가 되었다. 드러내지 않는 고통. 그가 이토록 평온할 수 있는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기에, 슬펐고 무서웠고 그래서 상영 내내 온 몸이 떨렸다.

1991년. 과거로 돌아간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백골단의 토끼몰이에 죽어간 성균관대 김귀정에 관한 이야기였다.

과거로 돌아간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건

 영화 <국가에 대한 예의>의 한 장면

영화 <국가에 대한 예의>의 한 장면 ⓒ 해밀


그곳이 대한극장 골목 어디쯤이라는데, 지금은 비가 오면 연인들이 우산을 나눠 쓰고 걷는 거리가 되었다. "강경대를 살려내라"던 대학 4학년 여대생이 백골단의 곤봉세례와 발길질에 죽어갔다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참 믿기 어려운 진실이다. 허나 어디 믿기 어려운 일이 그 뿐이었을까? 국가권력에 의한 연이은 타살, 시신탈취, 분신 배후 조작과 이적단체 혐의 씌우기까지. 이 모든 게 1991년에는 뿌리치고 달아나고픈 현실이었고, 지금은 풀기 어려운 남아있는 숙제가 됐다.

영화는 26년을 훌쩍 지나 세월호 앞에서 멈춘다. 불의한 정권의 거짓 강요. 1991년이나 세월호 참사가 난 2014년이나 정권은 국민들에게 가만히 있으라 했다. 죽음의 선동세력에게 돌 던지기를 강요했던 언론을 비롯한 일부 지식인들은 유가족에게 또다시 못 할 짓을 했다. 1991년에는 시인 김지하, 박홍 서강대 총장 등이 정권의 호위무사를 자처했고, 2014년에는 정미홍 전 아나운서와 지만원씨가 '일당 6만원 시위', '시체장사' 운운하며 유가족과 그들을 위로하는 이들을 조롱했다. '청산되지 못한 역사는 반복 된다'라는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장면들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역사는 질곡만 잉태한 게 아니다. 영화 속에서 전남대 박승희의 분신을 막지 못해 통곡한 한 선배는 고등학생을 둔 엄마가 되었다. 세월호 참사 때 학교에서 돌아오는 딸과 현관문에서 부둥켜안고 울었다는 영화 속 그를 보면서, 세 딸을 앞세워 시청 앞 분향소에 섰던 우리 부부를 생각했다.

전남대 박승희의 선배였던 그와 딸. 분신 배후 수배자였던 나와 아이들. 1991년의 아픔과 2014년의 아픔은 이렇게 소통했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광장에 함께 섰다. 역사는 이렇게도 반복되는 것이고 앞으로도 나갈 힘을 얻는 것이다.

희망을 일구어가는 사람들은 또 있다. 1991년 5월 1일 분신한 안동대 김영균의 유가족은 국가에서 받은 유족보상금 전액을 추모사업회에 기부했다. 추모사업회 회원들은 그 돈을 종자돈 삼아 농장을 만들고 농사를 지어 해마다 장기수 어르신과 일본군 피해 '위안부' 할머니, 투쟁 사업장에 쌀과 고구마 등을 보낸다. 그 사업을 시작한 지도 10여년이 훌쩍 넘었다.

"작고하신 어르신들이 많아 반송되는 쌀이 점점 늘어난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던 영화 속 농장주는 나의 대학동료다. 1991년 분신 배후로 지목돼 대공분실에 잡혀간 뒤 20여일 동안 갖은 고문을 받았다. 분신배후가 되기를 끝끝내 거부한 그에게 이적단체 혐의가 씌어졌고, 20여명 줄줄이 이적단체 구성원으로 구속되었다.

귀를 기울여 '강기타'의 낮고 큰 외침을 들어보자

 다큐멘터리 영화 <국가에 대한 예의>의 한 장면

다큐멘터리 영화 <국가에 대한 예의>의 한 장면 ⓒ 해밀


마주하고 싶지 않는 얼굴들도 있었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 그는 당시 법무부장관이었다. 곽상도 자유한국당 의원은 그때 강력부 검사였다. 강기훈은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았지만 가해자였던 그들은 한마디 사과조차 없다. 대공분실에서 팬티만 입고 구둣발로 지근지근 밟혔다는 대학동료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그 시절, 누군가는 내 이름에 줄 쭉쭉 그어가며 빠른 검거를 채근했을 것이다. 김기춘 법무부장관과 곽상도 검사, 소름끼치는 이름들이다.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지만, 난 아직 그 시절 내 안에 축적된 아픔을 떨쳐내지 못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국가에 대한 예의> 권경원 감독은 영화의 단락마다 강기타(강기훈)의 연주곡을 배치했다. 잔잔한 울림이 멀리 간다는 걸, 낮은 목소리가 오래 남을 수 있다는 걸 역설하려는 듯 기타소리는 여유롭다. 여유로워서 좋아 보이고 그래서 지난 세월이 야속하다. 기타와 사진에 몰입한 강기훈의 초연함은 실재일까, 아닐까. 영화를 보는 내내 그 답을 얻지 못했다. 그의 심장과 가슴은 여전히 뜨거움을 담은 휴화산이라는 걸 짐작만 했을 뿐이다.

강기훈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얻었지만 가해자들은 여전히 침묵한다. 그의 몸에는 억울함이 축적돼 간암이라는 허망한 병이 자리 잡았다. 또 나와 내 동료들이 덮어쓴 이적단체 굴레도 구제받지 못했다. 그렇기에 1991년은 아직 묻혀있는 역사다. 5.18 민주화 투쟁이,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오랜 세월을 돌아 제 이름을 얻었듯이, 1991년 분신정국에 대해서도 역사적 재심이 필요하다.

내가 본 이 영화를 더 많은 이들이 보았으면 한다. 그 시대를 살았던 관객들이라면 죽어가고 잊혀져간 수많은 동지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사람들 또한, 끊어내지 못한 역사의 해코지가 얼마나 잔인한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관객 모두가 배심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국과수를 비롯한 국가기관이 총동원되어 조작한 거짓들. 숭고한 죽음에 덧씌워진 굿판의 저주. 이제라도 촛불을 들었던 국민이 나서서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조용히 귀 기울여 '강기타'의 낮고 큰 외침을 들어보길 권한다. 더 나아가 '1987'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로의 여행도 의미 있는 일이다.

 지난 2월 13일 서울고법은 자살방조 혐의로 3년 징역을 산 강기훈(51)씨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내놓았다. 강씨는 그날 "오늘 사법부의 판결은 1992년 대법원 판결 등 자신들의 판단과 징역 등 일련 과정의 잘못을 고백한 것이란 점에 큰 의미가 있다"고 하면서도 기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강기훈씨 ⓒ 이희훈


* 기자는 1991년 5월 1일 '공안통치 분쇄. 노태우 타도'를 외치며 분신한 안동대생 김영균의 학교 선배다. 당시 정권은 김영균 분신배후를 캐기 위해 또 다른 선배 중 한 명을 강제 연행하여 20여일 동안 대공분실에서 고문하고 조사했다. 끝내 분신배후 혐의를 밝혀내지 못한 검찰은 그를 '반미애국학생회'라는 이적단체 구성 혐의로 기소했다. 이후 김영균의 동료 20여명은 이적단체 구성원으로 구속됐고, 기자 또한 3년 동안 수배 생활을 했다.

국가에 대한 예의 권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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