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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도 없는 영정 앞에 향을 피우고 국화꽃을 놓은 작은 천막에는 이름없는 위패 95개가 걸려 있다. 대구에서 지난 1년 동안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들의 숫자이다.
 사진도 없는 영정 앞에 향을 피우고 국화꽃을 놓은 작은 천막에는 이름없는 위패 95개가 걸려 있다. 대구에서 지난 1년 동안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들의 숫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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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기억되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이 있다는 것은 애통한 일입니다. 그 죽음은 우리 자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서로 마음으로 손잡고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합시다. 다른 세상에서는 외롭지 않고 편히 지내시기를 기원합니다."

1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인 '동짓날' 저녁 50여 명의 노숙인들이 모여 사진도 없는 영정 앞에 향을 피우고 머리를 숙였다. 지난 1년 동안 가족도 없이 이름도 없이 거리에서 죽어간 이들을 추모한 것이다.

장애인지역공동체와 인권운동연대 등 대구지역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반빈곤네트워크와 대구쪽방상담소는 지난 22일 오후 대구시 중구 경상감영공원에서 '2017 거리에서 죽어간 대구홈리스 추모제'를 열고 노숙인들과 이웃들에게 동지팥죽을 나누었다.

공원에 모인 시민단체와 노숙인들은 95개의 위패를 모시고 흰 국화꽃을 내려놓으며 쓸쓸히 죽어간 이들을 위해 머리를 숙였다. 지난 1년 동안 대구에서는 중구 17명, 동구 17명 등 모두 95명의 무연고 사망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사망한 사람은 개인 책임? 사회구조적 맥락에서 바라봐야"

밤이 가장 긴 '동짓날'인 22일 오후 대구시 중구 경상감영공원에서 거리에서 사망한 노숙인들을 추모하는  '거리에서 죽어간 대구홈리스 추모제'가 열렸다.
 밤이 가장 긴 '동짓날'인 22일 오후 대구시 중구 경상감영공원에서 거리에서 사망한 노숙인들을 추모하는 '거리에서 죽어간 대구홈리스 추모제'가 열렸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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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빈곤네트워크에 따르면 지난 2013년 43명이던 노숙인 사망자 수는 2014년 30명으로 줄었지만 2015년 87명, 2016년 61명이었고 올해는 95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 대구에서 생활하는 노숙인 수도 1103명으로 서울(3682명) 다음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다. 특히 1만 명당 노숙인 수는 4.39명으로 서울의 3.61명을 크게 앞지르고 있다.

최병우 쪽방상담소 소장은 "대구에 노숙인들이 많다는 것은 빈곤이 심화돼 있고 사회안전망이 굉장히 느슨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대구가 노숙인 예산이 많기는 하지만 복지정책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창호 대구인군운동연대 상임활동가는 "매년 홈리스 추모제를 진행하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하다"며 "우리의 삶이 나아지고 돌아가신 분들이 매년 줄어드는 것이 살아남은 자들의 기본적인 책무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IMF 이후 엄청난 실업자가 발생하고 많은 중소기업이 부도가 나면서 홈리스라는 이름으로 노숙인들이 엄청나게 늘었다"며 "거리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개인적인 책임이라기보다 사회구조적인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추모제에 참가한 노숙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했다. 김아무개씨는 "우리는 추운 겨울밤이 가장 두렵다"면서 "언제 밝아올지도 모르는 밤에 새벽을 기다리며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은 죽음과 같다"고 말했다.

손수 편지를 써온 이아무개씨는 낮은 목소리로 "그곳은 따뜻하시죠"라며 "아프지 않고 다음 생에서는 홈리스라는 꼬리표를 떼고 등 따시고 배부른 세상에 다시 태어나 못다 한 삶을 다시 사시기를 간절히 빕니다"라고 말했다.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 추모제', 매년 동짓날 열리는 이유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짓날 저녁 거리의 노숙인들이 지난 1년 동안 이름도 없이 죽어간 노숙인들을 위한 추모제를 열고 사진도 없는 영정에 머리를 숙였다.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짓날 저녁 거리의 노숙인들이 지난 1년 동안 이름도 없이 죽어간 노숙인들을 위한 추모제를 열고 사진도 없는 영정에 머리를 숙였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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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사회가 자신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이날 추모제에는 시민단체 회원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들과 함께하지 않았다. 추모제를 마치고 시민단체가 나눠준 따뜻한 장갑을 받아들고 헤어지는 이들의 뒷모습은 여전히 쓸쓸했다.

추모제를 진행한 반빈곤네트워크는 "노숙인 추모제는 극빈의 노숙상황에서 생을 마감한 노숙인을 추모하는 것과 아울러 노숙문제와 현실을 폭로하고 권리실현을 결의하는 장이기도 하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여전히 거리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노숙인들의 인간다운 삶을 우리 사회에 주문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 추모제(Homeless Memorlal Day)'는 올해 9회째로 지난 2009년부터 시작되었으며 매년 일 년 중 밤이 제일 길다는 동짓날을 기해 열리고 있다.


태그:#노숙인 추모제, #반빈곤네트워크, #인권운동연대, #노숙인, #경상감영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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