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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있다. 해방 직후 친일파청산이 좌절되고, 역대 정권에서 독립운동가가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음을 자조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 해괴한 경우가 있다. 약산 김원봉이 창설한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하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3년의 옥살이까지 한 독립운동가의 유해가 반세기 넘도록 방치되고 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홍가륵(洪加勒)이다. 충북 청주시 낭성면 호정리 도장골에는 야트막한 봉분 3개가 이어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어있던 재소자의 무덤이다. 이 무덤은 개인의 무덤이 아니다.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된 형무소재소자의 합동 묘이다. 3개의 봉분에 약 70구의 유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봉분 앞에는 진실화해위원회가 2008년도에 세운 '청주형무소 사건 희생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이 표지판 말미에는 '위 장소는 (중략) 민간인 집단 희생지이므로 함부로 훼손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경고성 멘트가 있다.

하지만 봉분은 사건 관련자가 아니면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상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지난여름 수해로 인해, 표지판이 찌그러지고, 원위치에서 100m 이상 떠내려가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라고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이들이 자칫하면 역사에서 영원히 잊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9년 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공동으로 세운 표지판은 도장골에서 쓰레기처럼 뒹굴고 있다.
방치된 희생지 표지판 청주시 낭성면 도장골에 방치되어 있는 표지판. 홍가륵의 아들 홍우영이 표지판을 잡고 있다.
▲ 방치된 희생지 표지판 청주시 낭성면 도장골에 방치되어 있는 표지판. 홍가륵의 아들 홍우영이 표지판을 잡고 있다.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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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선생은 미원고개 산구렁에서 돌아가셨어요"

죄수복을 입은 한 청년이 땀을 뻘뻘 흘리며, 홍가륵의 아내 석정순이 살고 있는 청주시 서문동으로 찾아 왔다. "홍 선생님이 저랑 같이 있다가 총 맞고 돌아가셨어요. 미원고개 가다 보면 저수지가 있는데요. 저수지 옆 산 구렁이 사망 장소에요" 이야기를 마친 청년은 부랴부랴 몸을 피했다.

하지만 석정순은 미원 방향의 도장골에 가지 못했다. 무섭기도 했고, 난리 중에 가족들이 뿔뿔이 도망 다니기 바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약 20년이 지난 1970년대 초에 홍가륵의 아들 홍우영(72세. 경기도 안성시)이 현장을 찾았다. 이후 여건 될 때마다 명절 전에 도장골을 찾아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 홍가륵은 왜 이 깊은 산골짝에서 삶을 마쳐야했을까?

홍가륵은 1946년 2월 미군정청후생부에서 주관한 수의사시험에 합격하여 진천군청에 근무하였다. 또한, 여운형이 주도한 근로인민당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48년 말경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소요, 상해치사, 상해'죄로 4년을 선고받았다. 선고재판이 1949년 4월 20일 있었고, '구속되어 재판받은 100일을 감(減)한다'고 결정했다. 그렇기에 그는 1953년 1월 초에는 자유의 몸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대한민국 군경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을 집단학살했다. 청주형무소도 예외가 아니었다. 1950년 7월 2일부터 충북지구CIC의 지휘 아래 제2사단 16연대 헌병대와 기동대를 중심으로 한 충북도경찰국과 청주경찰서 경찰 등은 청주형무소 전체 재소자 중 절반 이상인 800명의 정치범을 청주시 낭성면 도장골, 남일면 분터골, 남이면 화당리, 가덕면 공원묘지로 끌고 가 총살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북한군이 남하하면 빨갱이(형무소 재소자)들이 인민군에 협력할 것'이라는 막연한 추정에 의한 예방학살이었다. 이들을 부산이나 제주도로 이송해 격리시켰다면, 역사적 가설 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을 텐데 말이다.

대(代)를 이은 독립운동가, 의열단원 홍가륵

해방후 홍가륵 모습 수의사자격증에 부착되어 있던 홍가륵 사진
▲ 해방후 홍가륵 모습 수의사자격증에 부착되어 있던 홍가륵 사진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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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가륵은 1913년 10월 19일 경기도 수원군 음덕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1927년 배재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배재고보 시절 내내,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교장 사택에서 심부름을 하는 등 고학으로 학교를 다녔다. 1932년 배재고보 졸업 후 대구사범을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그는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1933년 봉천을 경유해, 상해로 갔다. 이곳에서 김원봉을 면접하고, 의열단에 가입한 후 조선혁명간부학교에 2기생으로 입교했다. 2기생들은 정치교육, 정신교육, 군사교육을 받았는데, 군사교육의 역점은 법령·군사지식·정보·폭파·전술 등 각종 군사기능 숙련에 있었다.

홍가륵을 포함한 2기생 53명은 6개월간의 교육을 받고 1934년 4월 20일 졸업식을 가졌다. 홍가륵은 교장 김원봉과 교관 윤세주로부터 2기생의 선발대로서 조선에 침투하여 공작 활동을 수행할 것을 명령받았다. 그는 국내로 들어와 곧바로 군사 활동 수행을 기도한 것이 아니라 대중운동을 활성화하고, 결정적 시기에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군사공격을 하려 했다. 하지만 먼저 검거된 동료의 자백에 의해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고,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이상일, <수원출신 항일청년투사 홍가륵>).

그렇다면 홍가륵이 의열단에 투신하게 된 경위는 무엇일까? 그는 모태신앙 소유자다. 조부 홍승하(1863년생)와 아버지 홍형준(1888년생)이 대를 이어 감리교 목사를 했다. 홍승하 목사는 1903년 1월에 하와이로 이민을 간 '이민 1세대'이다. 그는 하와이에서 교회를 짓고, 신민회(新民會) 초대회장을 하며 국권 수복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도산 안창호, 박용만, 이승만보다 독립운동의 대선배로서 활동했다. 홍승하 목사는 1907년 영주 귀국해 선교 활동을 했는데, 감리교 본부와 갈등 관계에 있었다. 서양선교사들이 주도하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에 반기를 든 것이다. 최태육(한반도통일역사연구소 연구원) 신학박사는 "홍승하 목사가 서양선교사들이 주도하는 사대주의 신앙운동에 반대해, 감리교 본부로부터 배척당했다"고 한다.

홍형준 목사 홍가륵 부친 홍형준 목사 사진
▲ 홍형준 목사 홍가륵 부친 홍형준 목사 사진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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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 홍승하 목사가 국권 회복 운동을 했다면, 아버지 홍형준 목사는 일제강점기 말 창씨개명에 반대하고 일제의 정책에 반대해 온갖 탄압을 받았다. 홍형준 목사는 1935년부터 1948년까지 진천교회에서 시무했는데, 교회가 진천경찰서 옆에 있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툭하면 경찰서에 끌려가 구타와 고문을 당했고, 이빨이 전부 부러져 말년을 틀니로 보냈다.

홍가륵은 조부와 아버지가 대를 이어 목사를 하며 신앙 활동에 전념했지만, 일제에 의해 탄압받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이것이 개인과 가정의 불행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나라가 일제에 빼앗겨 발생한 구조적인 문제로 파악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의열단원으로 목숨을 건 독립투쟁을 했고, 해방 후에는 수의사로써 생활하며, 근로인민당 활동을 했다. 그랬던 그에게 빨갱이라는 올가미가 씌워졌고, 결국 젊은 나이에 학살당했다.

홍가륵은 보훈처로부터 2009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그런데 보훈처는 2000년대 중반까지도 홍가륵의 가족들을 간첩 취급했다고 한다. 홍가륵이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따라 월북한 것으로 본 것이다. 지금도 인터넷에 '홍가륵'을 검색하면 태어난 해가 1913년도인 것은 나오는데, 사망년도는 물음표로 나온다. 죽은 연도와 이유, 장소를 모른다는 것이다. 국가기구인 진실화해위원회가 2010년도에 홍가륵이 국가폭력에 의해 학살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는데도 말이다.

홍우영의 바램은 소박하다. "도장골에서 아버지의 유해를 수습해 현충원에 모시고 싶다"는 것이다. 홍우영의 소망이 우리 사회가 받아 안을 수 없는 과다한 것인가? 정부와 충청북도에 묻는다. 아니 우리 사회의 양심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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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