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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압의 먹구름이 맑은 하늘을 가리기 시작했다. 1985년 7월 11일이었다. 민청련에 불길한 조짐이 드리우고 있음이 이날 처음 감지되었다. 그날 서울 하늘은 저기압의 영향으로 찌푸려 있었고, 이따금 비가 왔다. 전국이 온통 흐린 날씨였다.

민청련 상임위원장 김병곤이 귀갓길에 자기 집 앞에서 정체 모를 괴한들에게 붙들려갔다. 밤 10시쯤이었다. 그 괴한들은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소속 사복 경찰들이었음이 뒷날 밝혀졌다.

1980년대엔 길거리에서 정보계 사복형사들이 시민들을 영장 없이 체포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사진은 85년 경 서울시내에서 가두시위를 하던 이를 무자비하게 연행하는 모습
 1980년대엔 길거리에서 정보계 사복형사들이 시민들을 영장 없이 체포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사진은 85년 경 서울시내에서 가두시위를 하던 이를 무자비하게 연행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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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던 젊은 아내 박문숙은 그날따라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남편의 늦은 귀가야 자주 있는 일이고, 집에 안 들어오는 일도 흔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느낌이 이상했다. 아침부터 아내 몸이 편찮은 것을 보고, 오늘은 일찍 들어오겠노라고 말하고 나갔지 않았던가. 늦은 밤, 문밖에 나가 기다리다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길 여러 차례 되풀이하던 중에, 새벽녘이 되어서야 아내는 무심코 집 옆에 낯익은 가방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아내는 날이 밝기를 기다려 온 사방에 연락을 하면서 실종된 남편을 찾아다녔다.

붙잡혀 간 김병곤은 민청련 출범 초창기에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비공개 기별 대표 조직과 정책실에서 비상근으로 일했지만, 1985년 초에 결단을 내렸다. 직장을 그만두고 상근 전업 활동가의 길에 들어서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해 3월 민청련 제4차 총회에서 상임위원장에 선임됐고, 비공개 영역에서 연구 조사 업무와 민중운동 지원 업무를 지휘해 오던 터였다.

경찰이 노리는 표적은 하나가 아니었다. 민청련 집행국장 이범영도 체포 대상자였다. 그는 다행히도 체포망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추적을 피해서 몸을 숨겨야만 했다. 기나긴 수배 생활의 터널에 진입했다. 집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 했다. 가족과 친지들은 삼엄한 감시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부인 김설이는 3교대 감시조 경찰에게 온종일 둘러싸여 꼼짝도 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였다. 거친 인상의 사복 경찰들이 거칠고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가족을 위협했다.

그날 붙잡혀간 사람은 또 있었다.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총무부장 황인하도 연행되었다. 표적은 셋이었다. 경찰 수뇌부는 그들이 학생운동의 배후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혐의를 두고 있었다.

당시는 학생운동이 전두환 정권에게 타격을 가하고 있던 참이었다. 특히 그해 5월 투쟁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대학생들의 미문화원 점거 농성 투쟁이 그 정점을 찍었다. 정권 핵심부에게는 미국의 승인과 지원이 긴요한 터였는데,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은 그것을 위태롭게 하는 위험한 짓이었다. 정권 핵심부는 이 사건을 결코 묵과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학생운동을 약화시킬 수 있는 뭔가를 만들어 내고자 했다.

삼민투 배후에 민청련이 있다?

김병곤과 황인성이 체포된 지 10일째 되던, 그해 7월 18일에 삼민투 수사결과 중간발표가 있었다. 일간 신문들은 대검찰청 공안부장의 발표 내용을 약속이나 한 듯이 대서특필했다. '용공, 좌경, 급진, 이적' 등과 같은 자극적인 글귀로 이뤄진 기사들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1985년 7월 18일, 대검 공안부는 삼민투를 용공 이적 단체로 규정하고 주도자를 대량 구속한다는 발표를 했다.
 1985년 7월 18일, 대검 공안부는 삼민투를 용공 이적 단체로 규정하고 주도자를 대량 구속한다는 발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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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에 따르면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의 배후는 삼민투였다. 삼민투는 반정부를 넘어선 급진 좌경화된 단체로 지목되었다. 그뿐 아니라 용공, 이적단체이기도 했다. 1948년에 일어난 여순반란을 민중봉기로 미화했고, 해방정국에서의 전평 등 좌익을 해방 투쟁자로 보고 있으며, 자유민주체제를 뿌리부터 부정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삼민투 관계자로 지목된 19개 대학 학생 56명이 구속되었다. 다수 구속자를 낸 대학은 고려대 10명, 성균관대 10명, 서울대 7명, 연세대 5명 등이었다.

심상치 않은 점은 삼민투 뒤에 배후가 있다고 규정한 데에 있었다. 삼민투위 수사결과 중간발표에는 민청련 간부들의 혐의 사실이 기재돼 있었다. '배후 관계'라는 소제목 아래에 "이번 수사 과정에서 삼민투위의 핵심분자들이 학외의 불순단체 및 종교계 일부와 연계되어 있다는 혐의를 포착"했노라고 쓰여 있었다.

저들이 문제로 삼은 사실은 6월 27일 자 '민민탄'(민중민주화운동탄압공동대책위원회) 연석회의였다. 수사결과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교정에서 열린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6인이었다. 삼민투 학생 간부 3인 외에 민청련 간부 김병곤과 이범영,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총무부장 황인하가 그 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공동 성명서를 함께 작성했고 민민탄 공동 구성 문제도 협의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삼민투 핵심분자들의 범법행위를 부추긴 혐의가 농후하다는 것이었다.

1985년 서울대학교에 열린 민족민주운동탄압 저지를 위한 학내 시위
 1985년 서울대학교에 열린 민족민주운동탄압 저지를 위한 학내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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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경찰이 세 사람을 표적으로 삼았는지가 분명해졌다. 미문화원 점거 농성을 주도한 삼민투를 세 사람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혐의였다. 수사의 초점은 체포된 두 사람, 김병곤과 황인하에게 집중되었다.

수사 초점을 민청련으로 변경

뒷날 김병곤은 자신이 겪은 경찰의 취조 상황을 법정에서 진술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처음 수사의 초점은 민민탄 연석회의에 맞춰져 있었다. 그 회의는 민청련이 학생운동을 조종해 왔음을 보여주는 한 예증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학생운동을 약화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는 어려웠다. 경찰은 정권 수뇌부의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김병곤이 보기에도 대공수사단은 "고심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수사 초점이 이동하고 있음이 감지되었다. 수사를 담당하던 '백 전무'라는 자가 짐짓 걱정스러운 듯이 토로했다고 한다.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이 수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상부 고위층으로부터 질책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다른 곳으로 이첩해서 수사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혹독한 고문을 가해서라도 저들의 계획대로 진술을 얻어내라는 뜻이었다. 김병곤은 이미 10년 전 민청학련 사건 때에 가혹한 고문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 경험이 떠올라 치가 떨려 왔다. 그래서 "아예 각본을 달라. 그대로 쓰겠다"고까지 제안했다.

결국. 기존 수사팀은 뒤로 물러났다. 그 대신에 '김병곤의 신병을 옮겨가려 한 곳'에서 수사팀이 새로 파견되어 왔다. 그때부터 수사 방향은 달라졌다. 민청련 의장 김근태의 행방이 취조의 초점이 되었다.

새 수사팀은 김근태의 행적을 집요하게 캐물었다. 김근태에게 월북 가족이 있는 것을 아느냐, 그가 빨갱이라는 것을 아느냐고 추궁했다. 요컨대 간첩 혐의를 덮어씌우려고 했다. 새 수사팀이 구상하는 그림은 학생운동을 북한과 연결 짓는 데 있었다. 북한과 연계된 간첩 조직이 학생운동의 배후에 잠복해 있으며, 민청련 의장 김근태가 그 매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목숨 걸고 전한 쪽지 "피해야 합니다, 근태형"

김병곤은 김근태와 민청련에게 위험이 닥쳤음을 직감했다. 어떻게든 이 긴박한 상황을 동료들에게 알려야 했다. 7월 15일 수사가 일단락되어 서울구치소로 옮겨졌다. 그는 가족 면회가 허용된다면 그 기회를 이용하여 어떻게든 이 메시지를 밖으로 전하기로 결심했다.

아내 박문숙이 그를 도왔다. 박문숙은 남편이 연행되자마자 그 소재를 수소문해 나섰다. 용산경찰서에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민청련 동료들 두셋과 동행해 그곳으로 달려갔다. 면회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가족과 시민사회가 체포된 사람을 줄곧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폭압자들에게는 부담스런 일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가해지는 폭압과 야만을 경감시킬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고서 박문숙은 그날 이후 줄곧 용산경찰서를 찾아갔다. 번번이 거절당하면서도 면회 신청을 멈추지 않았다.

김병곤 박문숙 부부의 신혼여행 때 모습. 두 사람 모두 이제 고인이 됐다.
 김병곤 박문숙 부부의 신혼여행 때 모습. 두 사람 모두 이제 고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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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짧으나마 면회가 성사됐다. 경찰서가 아니라 검찰청에서였다. 김병곤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과 국가모독죄로 구속되어 검찰청으로 이첩된 뒤였다. 면회는 담당 검사 고영주의 검사실에서 이뤄졌다.

김병곤은 아직 범죄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검치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포승줄에 묶여 있었다. 형사소송의 원칙과 규범이 파괴된 현장을 목도한 박문숙은 옥신각신하며 관료들과 승강이를 벌였다. 그런데 그녀는 경황없는 와중에서도 남편이 뭔가 신호를 보내고 있음을 알아챘다. 남편이 눈짓으로 신체 아래쪽을 가리키면서 고무신을 벗을 듯 말 듯 하는 낌새를 보였다. 아내는 알아들었다. 신발 속에 뭔가 전하고 싶은 게 있나 보다. 박문숙은 남편의 신발을 고쳐 신겨주는 척하면서 그 속에 감춰둔 쪽지를 손에 넣었다.

쪽지 속에는 김병곤이 발각의 위험을 무릅쓰고 동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이 적혀 있었다. 공안 기관의 수사 방향에 관한 것이었다. 한두 사람의 간부가 아니라 민청련 전체에 대한 탄압으로 가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노출된 집행부는 모두 피신해야 하며, 특히 김근태 의장은 저들의 초점이 되어 있으므로 하루바삐 은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심각한 내용이었다. 먹구름이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태그:#민청련, #삼민투, #김병곤, #박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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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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