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찬란


두 남녀, 엔드레(게자 모르산이)와 마리어(알렉상드라 보르벨리)는 같은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들은 사슴이 되어 호숫가를 노닌다. 그것은 아주 '우연'하게 밝혀진다. 신중히 생각하지 않아도 이 영화의 제목은 노골적이다. 한국 제목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2017)나, 원제인 '몸과 영혼'도 그렇다. 따라서 우리는 이 우연에 주목해야 한다.

이 제목을 파악해 전제로 두고 가자. 가장 처음으로 알아보아야 할 것은 두 사람의 직장이다. 소를 도축하는 업체에서 재무이사로 재직 중인 엔드레, 등급 관리원으로 새로 입사한 마리어, 두 사람은 상하관계가 명확하다. 하지만 그 상하관계는 직급이 아니라 어떠한 추상적인 교류에 가깝다. 어느 쪽에선 그녀가 우위에 있고, 어느 것에선 그가 우위에 있다. 바로 몸과 영혼의 관계다.

쓸쓸함에 갇힌 남자, 고독함에 갇힌 여자

ⓒ 찬란


남자는 (이)성관계에 회의를 느끼며 쓸쓸함에 갇히고, 여자는 인간관계에 서툴러 고독함에 갇힌다. 여기서 두 사람이 외롭다는 것은 같지만, 차이가 확실히 있다. 엔드레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하는데, 그것은 관계 때문에 본인이 상처 입을 것이라고 전제하는 셈이다. 말하자면 위험을 회피하고자 하는 행위이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은연중 타인을 갈망하고 있다. 지나가는 여성을 노골적으로 쳐다본다든가, 꿈속에서 암사슴(마리어)을 위하는 행동으로 말이다.

비슷하게, 마리어는 타인과 어울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어울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건 둘 중 하나가 아닐까.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열등하게 느껴지거나, 서로가 만족할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경우. 작중에서의 행동(사소한 차이로 고기 등급을 낮춤, 밝고 정갈한 느낌의 집, 음식 부스러기를 참지 못함)으로 그녀가 강박성 성격 장애를 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그녀는 엔드레에게 다가가고자 한다. 여태껏 해본 적 없어 익숙지 않은, 관계의 형성에 조금씩 발을 내디디면서 말이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상처받을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 그런데 이 두려움은 안과 밖의 차이로 기능한다. 그는 가시 돋친 상대에게 다가가지 않으려 하고, 그녀는 내면의 가시를 어찌할지 모른다. 작중 하나의 장면이 그 예시이다. 그가 그녀에게 명함을 내밀고, 자신에게도 번호를 알려 달라 요청한다. 그런데 그녀는 휴대폰이 없다고 대꾸한다. 그는 그녀의 말을 거절의 의사로 받아들이지만, 그녀는 정말로 휴대폰이 없다. 아주 단순한 소통의 차이임에도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어쩌면, 여기서 인류가 평생을 고민해오던 문제를 끌어안을 수도 있다. 몸과 마음은 하나가 될 수 있는가? 몸은 따스하고 머리는 냉철하다. 그 복잡미묘한 온도 차를 가진 두 사람은, 우리의 고민처럼 쉬이 만나지 못하고 방황한다. 그것은 마치 투명한 유리창과 같아서, 서로가 훤히 내다보임에도 손이 닿지 않는다. 어찌 보면 그것조차 특권이라 말할 수 있다. 그 내다보임은 서로 거부하고 있지 않다는 명확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유리창 너머로 다가갈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특권을 이용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꿈이다. 몸과 마음은 꿈을 통해서 하나가 될 수 있다.

이쯤에서 영화의 제목은 우리가 익히 아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단어와 반대가 된다. 엔드레가 마리어를 집으로 초대해 같이 잠자리에 들자 말하지만, 정작 꿈꾸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들을 이어주던 건 '이상동몽(異床同夢)'이었던 셈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유리창 너머에서만 같은 꿈을 꾸었던 것인데, 반대로 생각하면 같은 장소에 있기에 더는 꿈으로 이어질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결말에 가서 서로 연인이 되면, 꿈을 꾸지 않게 되는 것이다.

ⓒ 찬란


따라서 그 꿈이라는 것은 일종의 호접몽이다. 유리창이라는 것으로 연결되는 꿈과 현실의 경계는, 죽음을 기다리는 소가 그들인지 자유롭게 뛰노는 사슴이 그들인지 알 수 없게 한다. 소는 의식주가 편안하나 곧 죽음에 이르고, 사슴은 추운 설원에서 겨우내 즙이 있는 나뭇잎 하나를 눈 속에서 찾아내야 살 수 있다. 그런데 살기 위해선 추위에 내던져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영영 갇혀 있어야 한다. 작품이 보여주는 건, 이 상황에 내던져진 두 남녀의 모습이다. 그 어느 쪽이든 현재의 생존에 무리가 없으나, 이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영화가 소를 보여주는 가장 처음 장면은 좁은 우리에 갇혀 있다가 때가 되어 몸과 머리가 분리되는 충격적인 장면인데, 그것은 차례가 되면 죽음에 이른다는 경고의 표시이자 이런 방식의 분리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머다.

굳이 없어도 될 장면을 넣은 것은 인제 와서 그 의도가 명백해진다. 우리는 소의 목이 떨어지는 그 장면에서 영화의 분위기를 파악한다. 두 남녀가 공장에서 처음으로 마주치던 순간도 그렇다. 로맨스이지만 전혀 달콤하지 않게 만든 그 장면이, 후반부에 마리어가 엔드레에게 관계를 거절당한 후 자살시도를 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그 장면은 일종의 신관인 셈이다. 서로 관계를 잇지 못하면 죽음에 이르고 만다는 아주 강력한 경고, 그러나 소는 피살당하고 마리어는 자살 당한다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우리는 두 장면 모두에서 몸서리쳐지는 차가움을 느낀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의 인물들도 그렇다. 이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는데, 공장 직원들은 매번 보는 장면이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지만, 마리어는 마치 여러 번 죽어본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런 것일까?

소는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그녀는 사건의 주체이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세울 수 있는 가설은 이렇다. 그녀는 다가오는 죽음을 피하려 들지 않으니, 소처럼 사건의 객체이거나 혹은 그녀가 소다. 이렇게 되면 결론은 다음과 같다. 작품 초반에 등장하는 죽임을 당하는 소는 사실상 스스로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는 소고, 소는 그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어지는 하나의 의문을 품어야 한다. 왜 소는, 그녀는 자살해야 하는가?

이 거짓말 같은 우연의 진실

ⓒ 찬란


이제, 그 의문을 아주 우연히 밝혀지는 우연과 엮어보려 한다. 영화에서 엔더스의 회사는 교미 가루를 도난당해 경찰에 신고하게 된다. 교미 가루라는 것은 거대한 수소를 수 분 내로 발정시키는 효능이 있기에, 여러 여직원에게 꼬리 치던 신입을 의심한다. 그것과는 별개로 수사가 진행되며, 자체적인 감사는 상담사와의 상담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상담사는 직원을 상담하며 어젯밤 꿈에 관해 묻고, 두 남녀는 아주 우연한 꿈을 공유하게 된다. 여기서 우연이 작용하는 과정을 두 가지 단계로 추측해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로, 건방진 신입을 대하는 엔더스의 태도다.

신입이 입사하던 날 엔더스가 이렇게 언질을 준다.

"소들을 보며 아무런 생각이 없다면 이곳에서 일하기 힘들다. 그 생각을 고쳐야 한다."

여기서 '생각'이란 당연하게도 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일 텐데, 영화에서 소가 두 남녀의 모습을 대변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자신을 향해 애정과 관심을 달라는 일종의 호소에 가까워 보인다. 여기서 이상하게 여겨야 할 점. 관심을 요청하고 있음에도 태도가 매우 까칠하다. 아마도 내면의 인정 욕을 감추려는 반발 심리로 보이지만, 마리어와의 대화에서 어떻게 행동했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리어는 분명 따가운 가시를 가지고 자신을 보호했었고, 엔더스는 그에게 다가가려 했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신입과 엔더스의 관계도 그렇게 보인다. 다른 점이라면 다가가는 순서인데, 엔더스가 마리어에게 다가가고 신입은 엔더스에게 다가간다. 영화는 다시금 이렇게 안과 밖이라는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다.

작품이 진행되며 밝혀지는 진실은, 평소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범인이었다는 것이다. 친구가 제 발로 찾아와 고백한 것이지만, 엔더스 입장에선 생각지도 못했으니 우연이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파묻어버리고, 그동안 하대하던 신입과 화해하며 친해진다. 우리가 이것을 우연의 연속으로 보아야 할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보아야 한다고 믿는다. 불행도 행운도 둘 다 우연인 것은 변함없는데, 그는 불행을 넘기고 행운을 취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는 아무것도 잃지 않으며, 오히려 신입과의 새 관계를 형성한다. 그것은 마치 우연이, 우연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한다. 결국, 스스로 선택한 것이 새로운 우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주 거짓말 같은 우연이, 사실은 필연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 영화가 우연과 필연을, 안과 밖의 차이를 강조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렇다. 우리가 일상에서 익숙하게 찾을 수 있는 '안과 밖'의 대상은 바로 '문'이다. 문은 열리기도 하고 동시에 닫히기도 한다. 그래서 문은 양쪽을 잇는 마법과도 같은 사물이다. 동시에, 영화에서도 그들의 관계는 마법처럼 이어진다. 서로가 꿈속에서 사슴이 되거나, 상담사에 의해 그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우연은 서로를 갈라놓는 투명한 유리창에 문을 낸다. 어쩌면 삶의 편린일지도 모르는 그것은, 순간의 선택이 만들어 낸 '문'이다. 삶의 한순간을 여닫는 그런 문이다.

ⓒ 찬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선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일디코 엔예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