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개인의 생존을 내포하고 있고, 보편적 정서에 가닿는 길도 찾았다. 그래서 성기가 가리키던 길 끝, 헤르메스가 길을 안내하지 않아도 이야기의 길은 쉬 끝나지 않는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동안이 아니라, 영화가 끝나 일어나는 순간, 더 많은 김기덕의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종착역에 도착했다고 안내를 받는 순간, 그 길에 선 순간, 여행이 다시 시작되는 것처럼."

이 글은 지난 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3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상'(아래 영평상)에서 신인 평론상 부문 최우수상을 받은 최재훈(45)의 김기덕 작가론에 관한 평론이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에서 주관하는 '영평상'은 영화 평론가와 영화 관련 언론인들이 그해에 우수한 영화와 영화인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지난 1980년에 시작해 올해로 37회째를 맞이하는 이 상은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남녀주연상 등 총 17개 부문 걸쳐 선정자를 발표했다. 이 중 '신인 평론상' 부문은 영화비평을 활성화하고 신인 평론가를 발굴하기 위해 공모(公募)를 통해 지금까지 10명의 평론가를 발굴했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는 지난달 24일 진행된 본심 심사 회의에서 최재훈(최우수상), 남유랑(우수상)을 신인 평론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특히 최우수상 수상자인 최재훈 씨는 '성기가 향한 길, 끝'이라는 주제로 '김기덕 작가론'과 <꿈의 제인>에 대한 영화평으로 당선됐다. 신인 평론상 심사를 맡은 이현경 영화평론가는 "최우수상에 당선된 최재훈의 평론은 안정적인 문장력이 돋보였으며 영화보다 이론을 우위에 두는 흔한 우를 범하지 않았다"라며, "자신의 언어와 감성으로 일관된 호흡을 유지하고 있는 최재훈의 글에서 김기덕 감독 작품에 대한 오랜 애정과 탐구를 짐작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덧붙여 "최재훈은 정재형, 송효정, 이현경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의 고른 지지를 받아 비교적 수월하게 당선이 결정됐다"라고 밝혔다.

45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신인상을 받은 최씨는 '협회에서도 나이를 듣고 당황하지 않았을까 싶다'라며 멋쩍어했지만, 실제로 그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오히려 주인 잃은 신발이 제 짝을 찾았다고 할까. 연극, 오페라, 무용 등 오랫동안 몸담았던 공연예술계 경력만 봐도 오히려 그에게 신인이라는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평론가로서 입봉식을 앞둔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영화 평론을 시작하기까지

 지난 11월 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3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영평상)에서 최재훈(45)씨가 신인평론가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지난 11월 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3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영평상)에서 최재훈(45)씨가 신인평론가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 이규승


- 우선 수상을 축하한다. 소감을 말해 달라.
"처음 영화관이라는 곳에 갔을 때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아주 어린 시절, < E.T >였다. 조그만 TV만 보다가 어마어마하게 큰 화면에 압도당했다. 멀티플렉스가 생기기 전의 극장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앞 좌석에서 보면 눈이 빙빙 돌 정도로 스크린이 어마어마하게 컸다. 당시 가족 단위의 관객들이 많아서 객석이 꽉 찼는데 사람이 많아서 시장처럼 시끄러웠다. 객석에 불이 꺼지고, 화면이 시작되자 웅성거리던 극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물론 영화가 아니라 <대한뉴스>가 먼저 시작되었지만, 어린 나이에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마치 오즈 나라에 간 도로시가 된 기분이었다.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의 문이 닫히고,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랄까.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어둠 속에서 지금 내가 사는 곳과 전혀 다른 세상을 바라본다는 흥분되는 일이다. 그날 이후 극장을 가면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영화는 누군가를 꿈꾸게 해주는 가장 대중적이면서, 예술적인 매체다. 처음 당선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불 꺼진 객석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그동안 <채널예스>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지속해서 평론을 해왔다. 어떤 계기로 평론을 하게 되었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다. 학창시절에 극작 수업과 평론 수업도 들었다. 한 교수님이 창작보다 평론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했는데, 그때는 그게 너무 속상했다. 애써 무시하면서 작가가 되기 위해 계속 글을 썼다. 재학시절에 딱 세 번 공모전에 지원했는데, 그 세 번 다 최종심 후보에만 오르고 당선되지 않았다. 문학동네와 <중앙일보>는 소설로, <씨네21>에는 영화평론으로 지원을 했었다. 차라리 그냥 떨어졌으면 계속 도전했을 텐데, 최종심에서 3번이나 떨어지니까 나에게 재능이 없나 보다 하며 쉽게 포기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창작에 대한 갈망이 목구멍에 남아 간질거리던 시절을 보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학창시절 썼던 소설이 당시 인터넷 잡지에 연재가 되었던 적이 있는데, 그 글을 보고 잡지사와 사보 등에서 칼럼 요청이 들어왔다. 꽤 꾸준히 일이 들어와 직장을 다니면서 프리랜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채널예스>에 썼던 글은 영화에 관한 글이긴 했지만 평론이 아니라 에세이였다.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 대신 영화를 보고 느낀 소감을 일상적인 이야기 속에 녹여냈다. 하지만 매주 새로운 영화를 보고, 새로운 주제로 글을 써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영화를 보는 눈도 확장되었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삶과 영화를 연결 지어 글을 써야 했기 때문에 영화를 조금 더 다른 눈으로 들여다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 이번 '영평상'이 공모를 통해서 신인 평론상을 선정했다. 공개모집에 응모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1년 전쯤 어머니가 아프셔서 연재하던 칼럼을 중단하고, 원고 의뢰도 받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6개월쯤 글을 쓰지 않으니까 거짓말처럼 요청이 뚝 끊겼다. 약간 금단 현상이 왔던 것 같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계속 글을 쓴다는 것은 좀 알량하지만, 마지막 자존심 같은 거였다.

다시 글을 쓰고 싶은데, 방법을 몰랐다. 이전에 원고 의뢰하셨던 분들께 연락하면, 새 필자를 구해서 지면이 없다거나 연락을 주겠다 하고 연락을 끊는 분도 계셨다.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서, 각종 잡지와 매체에 먼저 연락을 했다. 글이 맘에 든다면서 연락을 주신 분도 계시지만, 늘 물어보는 것이 경력이었다. 꽤 오랜 시간 글을 썼지만, 인정을 못 받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프로필에 들어갈 '등단' 같은 경력을 요구하는 곳이 많았다. 등단 절차를 거쳐 정식으로 인정받는 필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신인 평론상 공모를 보고 도전을 했다."

- 그전에도 영화 평론을 해왔는데, 이번 수상이 가지게 된 의미는 어떻게 이전과 다른가?
"소설도 쓰고, 칼럼도 쓰고, 영화 관련 에세이도 썼지만,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수식어는 좀 애매했던 것 같다. 이번에 정식으로 '등단'을 하게 되었으니, 정식으로 인정받은 느낌이다. 수상 소식을 듣고 농담으로 많은 분이 이제 직장은 그만두냐고 묻는다. 영화평론가로서만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앞으로의 인생도 파격적으로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영화평론가로서 활동하겠지만, 서울문화재단 직원이라는 현실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도전을 했고, 원하던 것을 이뤘다는 성취감 때문에 한 계단쯤 딛고 올라선 기분이다. 그리고 프로필에 당당하게 한 줄 넣을 경력도 생긴 셈이다."

최재훈, 그만의 평론 스타일

 제37회 영평상에서 신인평론가상을 수상한 최재훈씨는 연극, 오페라, 무용 등 오래 동안 몸담았던 공연예술계 경력만 봐도 오히려 그에게 신인이라는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제37회 영평상에서 신인평론가상을 수상한 최재훈씨는 연극, 오페라, 무용 등 오래 동안 몸담았던 공연예술계 경력만 봐도 오히려 그에게 신인이라는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 최재훈


- "영상을 또박또박 읽어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자신만의 평론 스타일에 관해서 이야기 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흔히 비평하라고 하면, 비판하는 경우가 많더라. 또한, 자신이 가진 지식과 인생관을 작품에 억지로 가져다 붙이는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평론은 자신의 관심사나 편견으로 살을 붙였다 깎았다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감독이 만들어낸 영상 언어를 독자들에게 글로 다시 풀어 또박또박 읽어가며 그 의미를 되짚어 주는 일이라 생각한다. 정직한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오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어렵지 않아야 한다. 어려운 영화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풀어주는 평론가가 되고 싶다."

- 이번 평론에서 "액자를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입을 앙다무는 고집쟁이 화가처럼, 그는 프레임을 거부하고 날 것 그대로 자신만의 그림을 그린다"는 표현을 했다. 경력을 보면 문화예술계에 종사하기 때문에 본문의 내용 중에서도 이런 예시가 녹아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영향을 받은 것인가?
"학교에서는 연극을 전공했고, 직장에서는 오페라와 시각예술, 무용 예술과 인연을 맺었다. 예술가를 지원하는 분야에서 일했기 때문에 다양한 예술가들을 만나고 친분을 쌓아온 경험이 표현을 조금 더 풍성하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김기덕 감독이 그림을 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예시로 들어주신 표현은, 영화감독 김기덕의 태도를 화가로서의 김기덕의 태도로 빗대어 쓴 것이다. 사실 창작자를 꿈꿨지만, 문화예술계에서는 주로 매개자의 역할을 해왔다. 창작자로서의 고민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다른 예술작품의 영향을 받듯이, 내가 쓰는 글에도 각 장르 예술의 특성이 알게 모르게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내가 전공했던 인문학으로서의 극작이라고 믿는다."

- 평론의 마지막을 보면 김기덕에 대한 애증을 느꼈다. 그 많은 후보자 중 김기덕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김기덕 감독은 영화계 폭력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어느 순간 그는 무례하고 폭력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고, 대중들의 비판도 이어졌다. 인신공격은 물론이고, 그의 작품들을 폄하하는 댓글들을 보면서, 의문이 들었다. 과연 저 사람들, 김기덕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혹은 김기덕이라는 사람이 만든 작품에 대해서 알고는 있는 걸까? 모두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읽은 적은 없는 고전소설 같은 케이스라고 생각한다.

물론 폭력을 행사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무례한 일이다. 그렇다고 작품까지 무시당해야 하는가, 그런 의문이 들었다. 데뷔작 <악어>를 참 좋아한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은 거칠지만, 분명한 자신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최근작들을 보면 정체되어 있지 않고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래서 김기덕이라는 사람이 아닌, 김기덕 감독이 만든 영화를 또박또박 되짚어 읽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시 읽어보니 허점이 많은 글이라 보완이 필요하다."

- 김기덕과 마찬가지로 영화 <꿈의 제인>에서도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 불행과 마이너한 소재의 작품을 선택하는 이유가 있는가?
"나는 나쁜 예술의 힘을 믿는다. 잔인하게 생채기를 내는, 무례하고 어두운 예술을 좋아한다. 상처 난 살갗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은 나쁜 감성을 대신 표현해주는 것은 예술의 순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착한 예술이라니 너무 재미없지 않은가? 오해할 수 있어서 덧붙이자면 나쁜 예술은 나쁜 영향을 주는 예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빠서가 아니라 상처받아서 거칠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고, 내가 말하는 나쁜 예술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는다.

건조하고 거친 표현을 통해 또 다른 카타르시스를 준다고 생각한다. 또 개인적으로 성격이나 태도도 마이너한 편이라, 그런 영화에 마음이 끌리고, 더 정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창작자의 입장에서도 소수자의 정서와 이야기를 품어낼 수 있다면, 아주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할 수도 있다고 본다. 작지만 다채로운 소재의 이야기를 품어내는 영화를 지칭하는 '다양성 영화'라는 표현이 참 좋다."

다양한 경험 그리고...

 제37회 영평상 신인평론가 부문 최우수상 수상자인 최재훈은 ‘성기가 향한 길, 끝’이라는 주제로 ‘김기덕 작가론’과 <꿈의 제인>에 대한 영화평으로 당선됐다.

제37회 영평상 신인평론가 부문 최우수상 수상자인 최재훈은 ‘성기가 향한 길, 끝’이라는 주제로 ‘김기덕 작가론’과 <꿈의 제인>에 대한 영화평으로 당선됐다. ⓒ 이규승


- 국립오페라단과 서울문화재단을 거치면서 다양한 문화예술 경험을 했다. 문화예술계의 경력이 영화평론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나?
"경력이 좀 특이한 편이다. 뒤늦게 연극원에 입학했고, 극작한다고 입학해서는 소설만 썼다. 대학로에서 연극을 한 편 올린 적도 있다. 사실 예술의 중심에 있었던 적은 없지만 늘 예술계의 언저리에서라도 일하고 싶었다. 창작자는 포기했지만, 졸업 후 오페라 공연기획을 택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서울문화재단에 들어와서는 시각 예술가를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했던 적도 있고, 다원 예술 페스티벌도 기획하면서 예술가와 많은 소통의 시간을 가졌다. 무용예술가를 지원하는 공간의 매니저로 일하면서 무용예술가들의 매력에 푹 빠져서 지냈다.

이제는 영화평론을 한다고 하니 경력이 그게 뭐냐는 사람도 있었다. 솔직히 한 우물을 파지 않았다. 여기서 찔끔, 저기서 찔끔 겉만 핥다가 끝난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여기저기를 파다 보니, 이제는 어디를 파야 하는지 아는 경지에는 이르렀다.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경험한 것이 내가 쓰는 글에 자연스럽게 녹아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오페라 음악이 나오면, 그 오페라 음악이 왜 저 장면에 쓰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무용을 보면서 무언의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읽는 방법을 터득했고, 한결 예술을 이해하는 눈도 깊어졌다."

- 45세라는 늦은 나이에 영화평론계에 데뷔한 셈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나?
"신인상. 주기도, 받기도 애매한 나이다. 평론가협회에서도 나이를 듣고 좀 당황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 시작했다면 놓쳤을 많은 것들을 품고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다른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나는 늘 친구들에 비교해 한 박자씩 늦게 시작했다. 막연히 글을 쓰고 싶어 한국예술종합학교도 좀 늦게 들어갔고, 다시 공연을 하고 싶어서 오페라단에 들어갔을 때도 함께 입사한 친구에 비교해 나이가 많았다. 서울문화재단으로 이직했을 때 30대 후반이었다. 아마 '나이'를 고려했다면 내게 기회가 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내게 기회를 줬던 오페라단 단장님과 재단의 대표님에게 늘 감사의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늘 증명하고 싶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는 뻔한 얘기를 마음에 품고 믿고 산다. 그래서 영평상에 도전할 때 스스로 나이를 고려하지 않았다. 아마 지금 시작하지 않았다면, 앞으로 더 도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 영화 평론가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많다. 어떻게 준비하면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책도 많이 읽고, 영화도 많이 봤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난 후의 감정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아쉬워서 일기처럼 감상문을 썼다. 나름 별점도 매기고, 아쉬운 점도 쓰고, 명대사와 명문장은 분류해서 적었다. 일종의 취미였지만 지금 '평론'을 하기로 결정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글을 많이 쓴다고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글에도 단련이 필요하다. 많이 보는 것만큼, 많이 써 보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은 단순히 끄적거리는 것 같지만, 그것이 쌓여 필력이 되는 것이다.

영화는 무척 다양한 장르의 예술의 장점들을 흡수하면서 성장해 온 장르이다. 예술의 기초라 생각하는 텍스트의 습득은 물론,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접해야 한다. 더불어 그 많은 장르의 예술이 향하는 곳, 이야기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기본적인 개념을 이해하면 더 좋을 것 같다."

-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활동 계획과 하고 싶은 말은?
"아주 많은 축하 인사를 받았다. '대단하다'는 표현이 많았는데, 최재훈이라는 인간이 대단하다는 의미보다는 좀 더 많은 이야기가 그 안에 녹아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숨어있는 수식어를 보자면 (그 나이에), (직장을 다니면서), (아직 꿈을 놓지 않아서), (문화예술계에서 계속 얼쩡거리더니 결국) 등등이지 않을까? 직장인 평론가. 조금만 한쪽에 소홀해도 이도 저도 아니라는 평가를 받기 쉬울 것 같다. 균형을 잘 잡아야 할 테고, 자신이 있다. 기회를 준 한국영화평론가협회에는 옳은 선택을 했다는 확신을 주고 싶고, 뒤늦은 나이에 꿈을 따르도록 격려해준 서울문화재단의 일원으로서도 소홀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다시 글을 쓸 기회가 주어진 것이 가장 행복하다. 원고 의뢰가 아주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다. (웃음)"

최재훈 평론가는?
최재훈은 1972년 부산 출생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을 졸업했다.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 팀장과 국내 최초의 무용전문 창작공간인 서울무용센터 매니저를 역임했다. 그는 무용사진영상전 '댄스토리 서울(Danstory Seoul)', 무용과 타 장르 예술과의 협업 프로젝트 'Colla報(콜라보)' 등 무용예술을 영상언어로 확장시키는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각종 매체에 문화예술 칼럼과 에세이를 기고하면서 창작자로 활동해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문화예술 전문 시사 월간지 <문화+서울> 작가의 방 코너에도 일부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평상 신인평론가 최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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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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