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옥 메인포스터

ⓒ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01.

장르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누아르'는 더욱 모호한 부분이 있다. 프랑스어로 '검은'이라는 뜻의 '누아르'는 1900년대 중반 뒷골목을 상징하는 어두운 분위기의 범죄, 스릴러를 통칭한다. 그러나 시대와 문화에 따라 그 특색이 조금씩 변해 다양한 하위 장르들을 양산했다. 처음에는 저예산으로 제작된 B급 영화들 가운데 음산한 분위기를 전달하는, 어둡고 우울한 느낌의 범죄 영화들을 누아르라고 불렀다. 국내 영화팬들에게는 <영웅본색> 시리즈, <무간도> 시리즈로 대표되는 홍콩 누아르 영화가 가장 친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허나, 이 또한 요즘은 장르를 대표한다기보다는 작품 홍보를 위한 용어로 치부되고 있다. 실제로 왕가위 감독은 자신의 초창기 작품들이 '홍콩 누아르'로 분류되는 것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현한 바 있다.

02.

최근 국내에서도 수많은 영화들이 누아르 이름을 달고 인기를 끌었다. 그 영화들이 실제로 누아르 장르에 속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차치하더라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비슷한 영화에서 유명한 배우의 호연을 제외하고는 크게 기대할만한 부분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사회의 어두운 면들을 부각하고 소재로 삼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들이 제기됐다. 남성에만 편중된 스토리, 여성의 도구화 및 상품화, 잔혹하고 과격한 장면들의 반복 등. 인물과 사건의 이야기를 쌓아 올리거나 분위기로 장르적 시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인 자극에만 몰두한 나머지 벌어진 문제들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영화 <미옥>에 대한 관심은 커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장르 단일화와 반복이라면, 그 테두리 안에서만이라도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관객들이 많았던 탓이다. 게다가 주연을 맡은 배우는 국내에서 '카리스마'로 따지자면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김혜수가 아닌가. 어쩌면 '영화 <아토믹 블론드>의 국내판 같은 스타일리시한 작품을 만나볼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있었다.


 영화 <미옥>에서 배우 김혜수가 연기한 현정이라는 인물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영화 <미옥>에서 배우 김혜수가 연기한 현정이라는 인물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03.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점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올해 국내 개봉한 영화 가운데 <악녀>와 함께 여배우에게 그나마 숨통을 틔운 작품으로 상징성을 가질 수 있을 법하다. 하지만 그 뿐이다. 아쉬운 이야기지만, 영화 <미옥>은 단순히 기존에 존재했던 한국산 누아르에(이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다들 그렇게 부른다) 여성 캐릭터만 하나 가져다 놓은 것에 불과해 보인다. 심지어 현정(김혜수 분)이라는 인물조차 주도적인 역할이 아니라 어머니 역할에 볼모로 잡혀 이용당하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단순히 여성 인물이 작품의 중심이 된다고 해서 그 영화를 '여성 영화'로 부르는 데는 문제가 있다.

04.

<미옥>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결국 최 검사(이희준 역)가 자신의 성추문 비디오를 찾기 위한 목적으로 모든 이야기가 귀결된다는 것에 있다. 앞서 언급했던 <악녀>가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며 액션의 근거를 마련해나가는 점이 인상적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아쉬운 대목이다. 현정이 왜 어두운 곳의 삶을 이어가며 버텨야 했는지, 아들 주환(김민석 분)과는 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웨이(오하늬 분)와 김 여사(안소영 분)를 이용하면서도 왜 마음 한 켠을 내주려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최 검사의 욕망 앞에 모두 매몰되고 만다.

영화 후반부 주환과 조우하며 설명하는 부분이 있지만, 그 역시 엔딩을 위한 최소한의 작업에 불과하다. 영화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장면들은 이 영화의 뼈대가 비디오를 가운데 둔 최 검사와 김 회장(최무성 분) 사이의 알력 다툼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작품의 타이틀이 '미옥'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큰 의미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상훈(이선균 분)과 현정의 대화에서 '미옥'이라는 이름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매개체가 되는 것을 의도한 것 같지만 이 역시 더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지 못한다.

 영화 <미옥>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최 검사(이희준 분)의 성추행 스캔들로 귀결된다.

영화 <미옥>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최 검사(이희준 분)의 성추행 스캔들로 귀결된다. ⓒ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05.

더욱 최악인 것은 이 영화가 스토리 상의 밀도 대신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장면들로 치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국내에서 제작된 범죄 영화들이 서로 경쟁하듯 반복해 온 일에 방점이라도 찍듯이, 여성을 도구화하는 장면과 공사장에서나 볼 법한 그라인더로 가해하는 장면을 내보인다. 혹자는 이런 장면들에 대해 현실의 어두운 부분을 묘사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내용을 표현하는 것과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장면들을 묘사하는 것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 관계를 찾기는 힘들다. <미옥> 역시 영화의 중심이 되는 최 검사 성 추문의 근거를 마련하고 생존이라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기 위한 것이라 변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선정적 묘사들이 진짜 필요한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06.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이 영화에서 가장 부각되는 캐릭터는 상훈이다. 상훈은 김 회장이 성공을 향해 올라가는 동안 어두운 곳에서 더러운 일들을 처리하며 묵묵히 뒤를 봐주던 인물이다. 오랜만에 악역을 맡아 잔혹한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는 그의 연기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 영화는 그에게 동인이 되는 부분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다. 상훈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도 못하면서 왜 김 회장 밑에서 버티는지, 어떤 부분이 자신의 '트리거'가 돼 그런 김 회장을 배신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현정 대신 자신이 모든 짐을 떠안고 가길 바랐던 상훈의 마음은 <미옥>의 그 어떤 인물 보다 자세히 표현된다. 그의 존재감이 짙게 부각되면서 피해를 입는 쪽은 오히려 주인공 현정이라는 점은 이 작품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영화 <미옥>에서 현정(김혜수 분) 보다 오히려 매력적인 인물은 상훈(이선균 분)이었다.

영화 <미옥>에서 현정(김혜수 분) 보다 오히려 매력적인 인물은 상훈(이선균 분)이었다. ⓒ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07.

모든 선재물에서 <미옥>을 두고 누아르 장르로 분류하고 있어 설명하긴 했지만, 이 영화가 장르적인 구분을 떠나 차라리 온전한 여성 캐릭터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조 샐다나의 <콜롬비아나>(2011), 우마 서먼의 <킬빌>(2003), 샤를리즈 테론의 <아토믹 블론드>(2017)와 같은 작품들처럼 말이다. 이번에도 여전히 조금 더 잔혹하고 더 선정적이길 원하는 듯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언제쯤 한국 영화에서 선정성이나 잔혹함이 아닌 분위기로 장르를 구현하고 완급 조절로 긴장감을 조성하는 작품을 만나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만 남았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조영준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joyjun7)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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