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대종상에서 여러 선·후배들을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손예진과 함께 남녀 주연상 시상자로 나선 이병헌의 말이다. 25일 오후 7시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54회 대종상 영화제는 예년과 달리 많은 배우, 영화인들이 시상식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참석자 면면도 화려하다. 이날 남우주연상 수상의 영예를 안은 설경구를 포함해 송강호, 이병헌, 손예진, 조인성, 곽도원, 배성우, 문정희, 최희서, 박서준, 소녀시대 윤아, 샤이니 최민호 등 여러 스타들이 함께해 오랜만에 영화 시상식 다운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지난해 시상식은 참석 배우도 극도로 적었을 뿐더러 영화제 시상식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상황들이 이어졌다. 그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이변의 남우주연상, 주인공은 설경구


수상결과도 예년의 대종상에 비하면 비교적 무난했다는 평이다. 최우수 작품상의 영예는올해 가장 많은 관객 수(1200만 명)을 기록한 <택시운전사>(2017)에게 돌아갔다. 감독상은 <박열>(2017)의 이준익 감독이 수상했다. 특히 <박열>은 최희서가 신인여우상, 여우주연상을 모두 수상하는 겹경사를 맞았다.

가장 최고의 이변은 남우주연상으로 기억될 전망이다. 당초 <택시운전사>의 송강호가 수상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대종상 심사위원들의 선택은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의 설경구였다. 심사위원들 사이에 설경구나 송강호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동안 배우로서 정체되어있는 것 같았던 설경구의 연기변신에 높은 점수를 부여했다는 분석이다. 특히 설경구는 대종상에 이어 오는 11월 9일 열리는 제27회 영평상에서도 남우주연상으로 선정돼 눈길을 끈다.


대폭 변화된 심사위원단, 심사 전권 넘겨받아 

설경구의 남우주연상 수상과 최희서의 신인여우상, 여우주연상 동시 수상은 예전과 다르게 대폭 변화된 심사위원단 덕분이라는 평이 많다. 심사위원장인 김홍준 감독을 필두로 강성률(영화평론가/광운대 교수) 강유정(영화평론가/강남대교수) 김형준(제작가/한맥문화 대표) 달시 파켓(영화평론가/부산아시아영화학교 교수) 오동진(영화평론가/마리끌레르영화제 집행위원장) 정성일(영화평론가/영화감독) 정수완(영화평론가/동국대 교수) 윤성은(영화평론가/수원대 출강) 등 국내 대표적인 영화 감독과 제작자, 평론가들이 올해 대종상 본선 심사위원을 맡았다. 여기에 예선심사 위원장을 맡았던 배장수 전 영화평론가협회장까지 대한민국 대표 평론가, 감독들이 대종상 심사 전권을 책임졌다. 대종상 조직위원회와 영화인총연합회가 심사 전권을 넘기라는 영화인들의 요구를 수락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상결과만 놓고 보면 비교적 무난했던 대종상 이었지만 잡음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TV조선에서 생중계됐던 대종상은 생방송 도중 카메라맨이 넘어지는 등 아찔한 사고가 이어졌다. 영화제 종료 이후 유튜브에 게재된 최희서 신인여우상 수상 소감 영상 장면에는 스태프의 막말이 삽입돼 빈축을 사기도 했다. 현재 해당 영상에서는 최희서의 수상소감 외에 아무런 잡음이 들리지 않는 상태다.

심사위원들은 바뀌었지만 영화제 조직을 운영하는 주체는 그대로다. 이때문에 대종상 운영 주체가 바뀌어야 대종상이 비로소 독립성을 얻고 명실상부 한국영화 대표 영화상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이를 방증 하듯, 올해 대종상에 출품된 한국 영화는 27편으로 지극히 적은 숫자를 보였다.

10월말 개최로 영화 <아이 캔 스피크> <남한산성> <범죄도시> 등 추석 연휴 직전 개봉한 영화들이 출품하지 못한 탓도 크다. 그러나 그만큼 대종상이 갈 길이 아직 멀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특히 독립영화는 <용순>(2016)을 제외하면 출품작 명단에서 볼 수 없었다. 이는 대종상에 대한 독립영화계의 여전한 불신을 보여 준다. 반면 다가오는 11월 25일 개최하는 제38회 청룡영화상은 따로 출품은 받지 않고 지난해 말부터 올해 10월까지 개봉한 영화들을 대상으로 후보작을 선정한다.


대종상, 임시방편 아닌 진짜 독립성 얻어야

예년에 비해 한층 깔끔한 행사 진행을 보여줬다고 한들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도 제기 되고 있다. 지난 2015년 대종상 주최 측은 후보에 오른 배우들에게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수상자에서 제외된다"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이에 따라 그해 남우, 여우주연상 후보 전원이 시상식에 불참하는 해프닝이 이어졌다. 올해 신인여우상, 여우주연상을 동시에 수상한 최희서 역시-물론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자격은 충분하지만-여우주연상 후보자 중 유일하게 참석한 배우이기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 되고 있다.


그럼에도 예년과 달리 설경구, 송강호, 조인성 등 대종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배우들이 대부분 참석한 배경에는 공신력 있는 심사위원들의 힘이 컸다. 최희서의 신인여우상, 여우주연상 동시 수상 또한 그녀가 <박열>에서 보여주었던 존재감을 생각하면 당연히 받을만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결국 영화계에서 믿을만한 심사위원들이 무너져가는 대종상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하지만 안도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대종상이 유구한 역사에 걸맞는 영화제로서 권위를 회복하려면 운영 주체부터 바뀌어야한다는 의견이 계속 제기 되고 있다. 올해 기존 심사위원단 변경 및 심사 방식을 바꾸면서 영화인들의 참여를 유도하긴 했으나, 임시방편용이 아닌 제대로 개선되지 않으면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다. 명실상부한 한국영화 대표상의 위상을 되찾으려면 대종상의 별도 독립은 피할 수 없는 과제다. 대종상 운영 주체 측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해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