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수정 : 26일 오후 5시]

10명의 심사위원들이 빈사상태에 빠졌던 대종상을 기사회생시켰다. 온갖 비난과 조롱을 받던 영화상은 현장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영화인들이 심사의 전권을 넘겨받으면서 확 달라진 모습을 나타냈다. 54회 대종상은 영화상의 방향이 어때야 하는지를 알려준 본보기였다.

25일 저녁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대종상은 심사결과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이변이라고 보는 시선도 있지만, 작품성은 뒷전이고 흥행 성적이나 보수정권의 입맛에 맞는 영화를 선택하던 예전과 달리 작품성을 중심에 두고 심사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박열> 최희서 2관왕은 대종상 변화의 상징

 54회 대종상 신인여우상과 여우주연상을 석권한 <박열> 최희서 배우

54회 대종상 신인여우상과 여우주연상을 석권한 <박열> 최희서 배우 ⓒ TV조선 화면


최우수작품상을 천만 영화 <택시운전사>가 차지했지만 11개 부문의 후보에 올랐던 것과 비교하면 기획상과 작품상을 받으면서 체면치레를 한 정도였다. 실질적인 승자는 <박열>이었다. 저예산영화로 제작된 <박열>은 감독상과 여우주연상, 신인여우상, 미술상, 의상상을 수상하며 5관왕에 올랐다.

특히 최희서는 신인여우상에 이어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하며 올해 대종상의 주목받는 스타가 됐다. 여배우가 두 개의 상을 휩쓴 건 2002년 지금은 사라진 1회 MBC영화상에서 배우 문소리가 <오아시스>로 두 상을 모두 받은 이후 처음이다. 남자 배우의 경우 황정민이 2004년 4회 대한민국영화대상에서 <너는 내 운명>으로 남우주연상, <달콤한 인생>으로 남우조연상을 동시에 수상한 전례가 있다.

예전 대종상 같으면 어림없는 경우였지만 올해는 국내 대표 영화인들이 심사의 전권을 가지면서 이같은 수상이 가능했다. 심사위원들이 일체 다른 고려 없이 오로지 작품성과 연기력 등 상에 부합한 조건 만을 고려했다는 것.

남우주연상을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의 설경구가 받은 것도 달라진 심사를 엿보게 했다. 수상작 발표 직전 객석에서 '송강호'라는 이름이 불리기도 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설경구의 이름이 호명되자 '불한당 '팬들의 함성이 크게 울렸다.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은 올해 칸 영화제 초청작이었다.

최우수상인 <택시운전사>와 <더킹>, <청년경찰>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흥행에 큰 성과를 내지 못한 작품들이었다. <박열>의 경우도 저예산으로 제작돼 손익분기점을 넘긴 230만대 영화다. 예전 대종상에서 흥행하지 못한 영화들이 뒷전으로 밀린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18개 부문 수상자가 발표됐지만 몰아주기나 납득하기 어려운 수상이 없어지면서 변화된 대종상의 모습을 실감나게 했다. 방송 초반 카메라맨이 뒤로 넘어지고, 아직 불신이 가시지 않은 탓에 대리 수상이 많은 등 어수선하긴 했지만 수상작 감독과 배우들은 거의 빠짐없이 참석해 예전의 썰렁했던 분위기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대종상 살려낸 10명의 심사위원

 54회 대종상 남우주연상 수상자인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 설경구 배우

54회 대종상 남우주연상 수상자인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 설경구 배우 ⓒ TV조선 화면


올해 54회 대종상을 살린 것은 심사위원들이다. 심사위원장인 김홍준 감독을 필두로 강성률(영화평론가, 광운대 교수), 강유정(영화평론가, 강남대교수), 김형준(제작가. 한맥문화 대표), 달시 파켓(영화평론가, 부산아시아영화학교 교수), 오동진(영화평론가, 마리끌레르영화제 집행위원장), 정성일(영화평론가. 영화감독), 정수완(영화평론가, 동국대 교수), 윤성은(영화평론가, 수원대 출강) 등은 국내의 대표적인 감독과 제작자 평론가들이다. 여기에 예심 위원장을 맡았던 배장수 전 영화평론가협회장까지 10명이 대종상의 존재감을 살려냈다. 한국영화의 대표적인 감독과 제작자 평론가들이다.

올해 대종상이 예년의 비난과 조소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심사 결과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이들은 영화적 완성도에만 집중했다. 대종상 조직위원회와 영화인총연합회가 심사 전권을 넘기라는 영화인들의 요구를 수락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무를 맡은 평론가들이 다방면으로 애쓴 결과이기도 했다. 

올해 대종상은 사전에 심사위원들을 공개하고, 시상식 직후 심사채점표를 공개했다. 그만큼 심사위원들이 심사에 자신감을 나타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심사위원 간사 역할을 맡았던 오동진 평론가는 '드림팀을 구성한 것과 마찬가지다, 심사방식을 바꿨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최대 20명 안팎의 심사위원들이 채점을 했지만, 올해는 9명으로 줄어든 본심 심사위원들이 깊이 있는 토론을 통해 수상작을 선정했다.

이들은 대종상 조직위원회의 사무국 공간을 마다한 채 따로 모여 긴 시간 토론을 진행했다. 한 심사위원은 "5시간 정도 열띤 토론을 벌였다"며 "토론을 통해 합의가 되는 작품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경우 표결을 통해 수상자(작)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김홍준 감독은 "남우주연상에서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과 <택시운전사>를 놓고 가장 치열하게 토론을 벌였다"며, "심사결과에 다들 놀라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 설경구 배우의 남우주연상 수상은 한국 영화계에 주는 메시지와 같다"고 덧붙였다. 한 심사위원은 "최희서 배우의 수상과 관련해서도 토론이 있었지만 오로지 연기만을 평가한 것으로 신인여우상과 여우주연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것은 문제될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다만 예심 결과에 아쉬움이 있었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예심은 32명이 5작품씩을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주관단체인 영화인총연합회 8개 단체를 중심으로 참여했다. 그외 심사위원도 예심 심사위원장으로 선출된 배장수 평론가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종상 조직위원회에서 선정하면서본심만큼의 심도 있는 심사는 이뤄지지 못했다는 것.

대종상 권위 회복하려면 독립성 필수

 54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 수상작 <택시운전사>를 제작한 더 램프 박은경 대표가 수상 소감을 밝히고 있다.

54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 수상작 <택시운전사>를 제작한 더 램프 박은경 대표가 수상 소감을 밝히고 있다. ⓒ TV조선 화면


이 때문에 대종상의 권위를 제대로 회복하려면 한국영화감독조합, 시나리오작가조합, 프로듀서조합 등 영화단체연대회의 소속 영화인들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를 위해 대종상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대종상이 명실상부한 한국영화의 대표 상이 되려면 보수원로단체로 규정되고 있는 영화인총연합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대종상은 조직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김구회 조직위원장이 매해 영화인총연합회에 일정 액수의 발전기금을 납부하는 조건으로 5년간의 운영권을 얻은 상태다. 영화상 주관 능력이 없는 영화인총연합회가 돈을 받고 외부에 위탁한 것과 다름없다. 원로영화인들이 대종상을 이권으로 활용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올해 기존 방식을 바꾸면서 영화상의 숨통이 트이기는 했으나, 제대로 개선되지 않으면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다. 명실상부한 한국영화 대표상의 위상을 되찾으려면 대종상의 별도 독립은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올해 심사전권을 넘기면서 대종상의 추락을 멈추게 된 김구회 조직위원장은 "앞으로 남은 3번의 개최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 대종상이 옛 권위와 명성을 찾고 많은 영화인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54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발표하고 있는 김구회 조직위원장

54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발표하고 있는 김구회 조직위원장 ⓒ TV조선 화면


54회 대종상영화제 수상자(작)


● 최우수작품상 / <택시운전사>
● 감독상 / 이준익 감독 <박열>
● 남우주연상 / 설경구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
● 여우주연상 / 최희서 <박열>
● 남우조연상 / 배성우 <더킹>
● 여우조연상 / 김소진 <더킹>
● 기획상 / 최기섭 <택시운전사>
● 시나리오상 / 한재림 <더킹>
● 촬영상 / 박정훈 <악녀>
● 조명상 / 김재근 <프리즌>
● 편집상 / 신민경 <더킹>
● 기술상 / 윤형태, 정도안 <악녀>
● 음악상 / 달파란 <가려진 시간>
● 미술상 / 이재성 <박열>
● 의상상 / 심현섭 <박열>
● 신인감독상 / 엄태화 <가려진 시간>
● 신인남우상 / 박서준 <청년경찰>
● 신인여우상 / 최희서 <박열>
● 특별상=고 김영애


대종상 김홍준 오동진 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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