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너의 이름은.>(2016)의 국내 개봉 포스터.

영화 <너의 이름은.>(2016)의 국내 개봉 포스터. ⓒ 메가박스㈜플러스엠


감독 '신카이 마코토'

그들의 운명은 때와 장소를 예측할 수 없이 떨어진다. 그들의 운명은 혜성처럼 전혀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한다. 혜성은 그들을 갈라놓는 동시에 하나로 잇는다. 그것은 상처를 절개함과 동시에 곪은 부분을 도려내는 날카로운 메스와 같다. 운명처럼 다가온 혜성으로 그들은 기적과도 같은 운명을 맞이한다. 두 남녀(타키, 미츠하)의 몸은 바뀌고, 그들의 시간 또한 맞바뀐다. 그것은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상처의 치유 방법이며, 실현될 수만 있다면 가장 이상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분명 그들의 상처는 예측할 수 없는, 거대한 인과에 끌린 피해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그것을 목도한 사람에게 기억을 지우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것은 원인을 규명할 수 없고,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자연재해다. 그러나 그런데도 항상 그 울분을 받아낼 무언가는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영화에 나오는 두 남녀가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은 너무 이질적이다. 그들이 맞닥뜨린 운명에 대처하는 방법이란, 오랜 세월 동안 지혜를 쌓아 올린 노인들도 못할 정도로 현명하다. 동시에, 노인들이라면 하지 못할 세련되고 진보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그 이질성이야말로, 이 영화가 말하는 것임을 영화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지쳐 쓰러지고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들을 끈으로 잇고, 애타게 이름을 불러 기억하고자 한다. 그 방법은, 그들에게 찾아온 거대한 불행처럼 거대하게 받아내는 방법이다. 그들의 기적은 그들에게 찾아온 것보다 크다. 물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언제나 기적에 의존한다. <별의 목소리>(2002),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2004), <초속 5㎝>(2007), <별을 쫓는 아이>(2011), <언어의 정원>(2013)까지 모든 영화에 기억과 기적이 있다. 각각의 영화에 나오는 남녀는 서로를 기억하고, 그 기억에서 기적이 비롯된다.

 <너의 이름은.>(2016)의 감독 '신카이 마코토'. 그가 애니메이션 작업을 통해 만들었던 이전 세계관과 이번 작품은 많이 다르다.

<너의 이름은.>(2016)의 감독 '신카이 마코토'. 그가 애니메이션 작업을 통해 만들었던 이전 세계관과 이번 작품은 많이 다르다. ⓒ 메가박스㈜플러스엠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그 이질성을 뒷받침하는 것이야말로 영화의 핵심이다. '무스비'라는 붉은 실과 '<너의 이름은.>'이라는 제목에서부터 풍겨 나오는, 기적의 힘을 달리게 하는 그 원동력이 영화의 전반에 흩어져 있다. 이전까지의 작품들과는 달리,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2017)이 특별한 것은 그 기적뿐만이 아니다.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 세계는 점점 친 대중화되어가며 긍정적인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영화 속에 나오는 파괴적인 사건은 본국에서의 지진이 일어났던 그 날과, 타국에서의 거대한 재난들을 겨냥하고 있다.

또한, 여성을 수동적으로 묘사하던 것을 조금은 덜어냈다. 본작에서 미츠하(카미시라 이시모네 분)라는 여성 캐릭터는 매우 능동적이고 진취적이다. 물론, 그런데도 여성에 대한 성적묘사와 구출을 당하는 처지에서의 수동성은 여전한 걸림돌이다. 그러나 불쾌함도 분석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비판을 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이 성적 묘사조차, 여성을 수동적으로 묘사했던 전작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세계는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초속 5㎝>에서는 오래전 서로 짝사랑했던 두 남녀가 나오는데, 그 둘의 사랑은 끝내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영원한 상처로 남는다. 분명, 이때까지만 해도 신카이 마토코 감독의 사고는 운명이라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초속 5㎝>에서 첫사랑은 서로의 가슴 속에 아련하게 남는다. 그것을 두 존재 간의 대립으로 표현하자면, 한쪽이 우세한 쪽에 동화되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첫사랑의 아련함이 아니라 승자와 패자만이 있는 이분법일 뿐이다. 남자 주인공 '타카키'의 마음속에서, 여자 주인공 '시노하라 아카리'는 영원한 타자가 된다. 그것은 하나의 결핍이 되어 타카키의 삶을 공허함으로 가득 차게 한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되지를 못하고 현실을 떠돈다. 남성과 여성은 양립할 수 없고, 여성은 남성의 타자여야만 한다는 사고다. <초속 5㎝>에서 나타난 이 회의적 사고를 사회로 확대 적용해보면, 결국 대립하는 것들은 무조건 승자와 패자가 갈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전작, <언어의 정원>(2013) 중 한 장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전작, <언어의 정원>(2013) 중 한 장면. ⓒ (주)팝엔터테인먼트


그리고 신카이 마코토의 첫 번째 변곡점은 <언어의 정원>이다. <언어의 정원>에서, 남성은 학생이고 여성은 선생으로 나온다. 선생은 학생보다 위치가 높지만, 동시에 그녀는 여성이기도 하다. 그것은 '유카리'를 강자와 약자의 위치를 동시에 가진 대상으로 만든다. 그녀는 대상화된다. 분명 선생이라는 권력의 위치에 있음에도 학생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몰락한 권력'이다. 신기하게도, 학생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그녀를 구원하는 건 학생인 '타카오'다. 타카오는 남성이자 학생인, 고저 차가 확실한 위치를 공유하는 유카리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타카오가 유카리와 만나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두 결핍의 존재가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카이 마코토의 사고관이 분립에서 양립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비가 오는 공원의 정자라는 신화적 공간으로 기적이라는 것의 존재를 시사한다. 하지만 이때의 신카이 마코토는 신화적인 무언가가 없다면, 기적과도 같은 건 일어날 수 없다고 단정해버린다. 사제지간인 타카오와 유카리의 관계가 사회적으로 좋지 않은 시선을 받는 것도, 비가 오는 공원에서의 우연한 만남이 계속 이어지는 것도 그렇다.

마치 신데렐라와 같이, 유카리에게 신발을 만들어주는 타카오의 존재는 유카리에게 있어 기적 그 이상이다. 괜히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니듯, 그것은 꿈만 같은 일이며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이 우연함은 가능성만을 타진할 뿐 실현성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마침내 신카이 마코토의 두 번째 변곡점인 <너의 이름은.>이 특별한 건 그 때문이다. 영화에 나오는 두 남녀는 전작보다 진취적이고 긍정적으로 그려진다. 한쪽이 한쪽을 구원하는 형식으로 묘사되지만, 그 존재의 뒤바뀜이 어느 한쪽이라는 규정을 하지 못하게 한다.

신카이 마코토 자신도 <언어의 정원>과 <너의 이름은.> 사이의 변화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작품 초반에 전작의 주인공인 유카리가 잠깐 등장하는 것이나, 전작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중학교 친구가 작품에서 미츠하의 친구로 등장하는 것이 그 증거다. 따라서 두 작품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생각해 본다면, 신카이 마코토가 <너의 이름은.>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 확실해진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의 손길, 그것을 단지 누군가의 역할로만 규정하지 않고 그 누구도 높은 곳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믿음이라는 것이 기적과 일맥상통하듯, 신카이 마코토가 기적과 운명이라는 비현실적인 것을 여태까지 빛과 자연, 색채와 구도의 미학으로 가려냈던 건 그 자신도 그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적과 운명이라는 말로만 설명하기에 세상은 너무 복잡하다. 그것을 아름다움으로만 포장할 수는 없다. 신카이 마토코가 그려내는 비 오는 날의 공원이 그들의 기적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풍경이 그들이 그리워하는 감정에 손을 얹을지언정, 우리를 이해시켜주지는 않는다. 넓고 반짝이는 세상 풍경이 우리의 시선을 그렇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래서 신카이 마코토가 선택한 방법은, 지금껏 해왔던 방식을 유지하며 서로의 입장을 교환하는 것이다. 겉으로만 이해하기보단, 내면으로 들어가 자아의 일대일 대응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이해의 길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렇지만 그 자아의 일대일 대응이라는 것이 영혼의 교환으로 표현되는 이상, 그것조차 '기적과 운명'이라는 논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신카이 마코토가 극복하지 못한 한계는 그 점이다. 하지만 타자가 타자에게 손을 내미는 형국에서 벗어났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캐릭터의 위치

 <너의 이름은.>(2016) 중 한 장면. 영상미가 아름답지만, 저 운석 때문에 발생한 이후의 사건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너의 이름은.>(2016) 중 한 장면. 영상미가 아름답지만, 저 운석 때문에 발생한 이후의 사건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 메가박스㈜플러스엠


거대한 재앙을 맞는 이토모리 현과 그 속에 사는 미츠하라는 캐릭터는 각각의 위치가 같다. 그것은 모두 도시나 남성에게 밀린 약자이며, 동시에 영화와 현실에서 그들에게 밀려나는 위치에 있다. 영화에서 이토모리 현은 편의점도 하나에 저녁이면 문을 닫고, 카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촌으로 그려진다. 미츠하라는 캐릭터도 그 시골의 전통을 잇는 당가의 무녀로 등장한다. 이토모리 현조차 언젠가 도시화 되고 말 것이다. 미츠하는 도시로 떠나기를 원한다. 그녀와 그녀가 사는 시공간은, 그곳이 그녀를 만든 것인지 혹은 그녀가 그곳을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유기적이다. 동시에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의 모습은 스테레오 타입으로 그려져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작중에서 이토모리 현과 미츠하는 '그곳'과 '그녀'로 지칭된다. 기억이 사라지는 후반부의 전개에서는, 이름조차 사라져 관념상의 무엇으로만 지칭된다. 타키(카미키 류노스케 분)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골의 모습은, 그가 생각하던 전형적인 모습 그대로다. 미츠하의 모습 또한 그가 평소에 생각해왔던 이상적인 여성상 그대로다. 하지만 그들의 대상화가 외부로 향하는 것뿐만 아니라, 몸이 바뀜으로써 내부로 향하는 것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작중에서 타키는 미츠하가 되고, 미츠하는 타키가 된다. 그들은 개인이 가진 것의 역전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타자를 대타자로 만들고, 서로를 하나로 만든다.

연속된 일상에서 그들은 그들의 생각을 뒤흔드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타키는 시골이 가진 고유의 정서에 감탄하게 되며, 미츠하는 도시의 자본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그들의 모습은 서로의 행동을 차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외부적인 모습까지 바뀜으로써 그들이 지칭되는 시선 또한 공유하게 된다. 말하자면 타키는 여성에게 다가오는 시선을 받고, 미츠하는 도시의 폐해적인 모습을 볼 것이다. 사춘기의 남자아이가 가졌던 환상, 사춘기의 여자아이가 가졌던 환상은 그렇게 깨어진다. 그것은 마치 영화의 도입부에서 운석이 깨어지던 것처럼 생각의 균열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운석이 주요한 역할을 지니는 것은, 그 파괴력뿐만 아니라 갈라지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운명과도 같은 혜성은 그들의 운명을 만들고, 그들의 사고를 갈라놓는다. 그것은 혜성이 다가오는 것처럼 운명적이지만, 그 운명조차 다시 한번 갈라지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희박한 확률을 거듭한 그것은, 그들 사고의 전복이 얼마나 기적과도 같은 것인지를 의미한다. 그들이 가진 고정관념이란 그토록 파괴적이고 운명적인 무언가가 아니면 바뀌지 않는다. 그 운석은 그들을 파괴하는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비극을 피할 기회를 준다. 그것은 익숙한 관념을 비집고 나온 그 사이의 성찰적인 태도와 같다.

운석이 하늘을 가르고, 그 운석은 그들의 시공간을 바꾼다. 또한, 그 운석이 다시 한번 갈라지며 한쪽의 시공간이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그 시공간은 다른 한쪽의 기억에서 사라진다. 그것은 팽팽하게 대립하는 두 진영 간의 싸움 후, 승자만이 살아남는 이분법의 존재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두 남녀, 그리고 두 시공간은 그들이 사는 세계를 망라한다. 높은 건물이 빼곡한 도쿄의 모습과 이토모리 시골의 모습은 우리 사회를 양분한다. 그것은 현실과 가상의 분할, 도시화와 탈도시화, 남과 여 혹은 미래와 과거, 보수와 진보 기술과 전통의 이분법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서로를 향해 맹렬히 진격하고 있다. 마치 처음부터 양립할 수 없었던 것처럼 서로를 목도하고 공격한다. 그러나 그들이 원래 하나의 사실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다. 영화 속의 운석도 하나에서 둘로 갈라지고, 남은 한쪽이 고정 관념의 반대편인 이토모리를 향해 돌진한다. 그렇다면 영화 속에서 성적 대상으로 묘사되는 미츠하 쪽의 위치가 약자의 위치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 더불어서, 그녀가 사는 이토모리 또한 파괴되니 말이다. 그래서 신카이 마코토가 말하고자 하는 건, 피해를 보았던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만 한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잊지 않고 기억해야만 한다. 그것은 영화의 기표에 불과하다. 기의는 두 시공간을 갈라놓는 이분법이고,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표와 기의가 이어지는 방식이다. 이항은 어떻게 대립하는지, 무스비라는 것으로 지칭되는 기적이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것이 왜 일어나는지 알아야 한다.

타키와 미츠하, 하나의 인물

 <너의 이름은.>(2016) 중 한 장면. 두 주인공의 몸이 바뀐다는 설정이다.

<너의 이름은.>(2016) 중 한 장면. 두 주인공의 몸이 바뀐다는 설정이다. ⓒ 메가박스㈜플러스엠


작품에서 그녀는 그이며, 그는 그녀다. 그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달리지만, 사실 그는 그녀이기도 하다. 영혼의 뒤바뀜이라는 것은 그 둘의 구분을 의미 없게 만든다. 따라서 작품에서 그와 그녀를 구분하는 건 사실상 의미 없는 짓이다. 그것은 기표로만 작용할 뿐, 기의가 되지 못한다. 영혼의 뒤바뀜, 입장의 반전, 그 기적과도 같은 것을 달리게 하는 연료는 바로 '무스비'다. 이토모리의 전통이자 관념이기도 한 무스비의 개념은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다. 그것은 기표처럼 작용해 "갈라지는 것의 파괴력과 이어지는 것의 치유력"을 말한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영화의 이질성은 그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를 달리게 하는 무스비의 기의는 갈라지는 것과 이어지는 것의 접합 부분에 있다. 그것은 인물들이 기적을 향해 달려나가게 하기도 하며, 동시에 영화를 잠식한 영혼이다. 그들이 갈라지는 것은 영화의 시공간에 내포되어 있다. 작품이 시작하며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운석의 낙하,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는 뉴스 보도다. 영화는 운석의 낙하를 통해 그들의 분리를 말해준다. 그들이 뉴스를 보는 공간은 도쿄와 이토모리로 분리되어 있다.

그 운석은 작품의 초반부에 등장해 소원을 이루어 주는 무언가, 이른바 신의 대체물로 등장해 그들에게 기적을 선사한다. 그들의 몸은 그렇게 뒤바뀐다. 그들의 공간은 어느 날, 어느 기준으로 바뀌어 그들에게 서로의 일상에 개입하는 계기를 만든다. 그러나 작품의 후반부로 가면 그 운석이 갈라놓는 것이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도 포함됨을 알 수 있다. 기적을 이루어낸 운석은, 이제 그것의 안티테제로 변화한다. 그 운석이 이루어 놓은 기적은, 기적과 같은 확률의 재앙으로 다가와 그녀의 공간을 앗아간다.

그런데도 공간을 제외한 시간만큼은 남아 서로를 계속해서 이어지게 한다. 그 운석은 누군가에게는 아름답게 빛나는 별일 것이며, 타키와 미츠하에게는 그들을 아름답게 한다. 분명 운석이 가지는 파괴력은 그들의 시공간을 모두 갈라놓지만, 마치 운석의 꼬리처럼 남은 흔적이 시간처럼 늘어진다. 그의 시간, 그들의 시간, 누군가의 시간, 우리들의 시간, 운석을 보며 소원을 비는 이들이 보는 것은 운석이 아니라 꼬리에 불과하다. 시간이 금세 흘러가고 나면 그것을 애써 붙잡으려 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운석이라는 것은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보다 앞서 나가는 무언가다.

그래서 운석은 신의 대체물이다. 시간을 앞서 나가는 것은 인간을 초월한 신의 권능이다. 그리고 신의 대행자로 일하는 이토모리 현의 무녀들, 미츠하 일가의 설정은 신의 권능을 대신한다. 그녀는 술을 빚고, 그 술은 신의 권능이 된다. 그 술은 현세에 남은 시간의 흔적으로, 타키를 그녀의 시간으로 데려간다. 무스비라는 인연의 끈의 의의는 그곳에서 나타난다. 무스비로 지칭되는 힘, 시공간을 초월하는 그것은 과거와 미래를 바꾸는 무엇이다. 아마도 그건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치아키가 그토록 갈망하던 그림의 존재와 같을 것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치아키는 그림을 보기 위해, 보존하기 위해 미래에서 과거로 온 미래인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마코토와 치아키의 시간은 그렇게 이어진다. 미술 작품의 아우라가 시공간을 초월해 불변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있어 그들의 관계란 마치 아우라와 같은 것이다. 작품에서 무스비가 이러한 아우라와 같다. 미츠하 일가가 내리 만들어오던 무스비라는 이름의 끈은 쉽게 만들어지고 복제되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그들의 질서로 재편된다. 아우라는 복제되지 않지만, 그들은 내면의 신이 되어 그들 고유의 아우라를 부여한다.

그리고 두 남녀의 아우라는 몸이 바뀌는 기적으로서 이어진다. 운석이 그들의 시간을 갈라놓고, 거주지가 그들의 거리를 대변해도 아우라라는 것은 그것을 초월해 존재한다. 그렇게 두 남녀는 파괴되는 것으로 하나로 이어지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시간의 흐름으로 확장해서 볼 수 있기도 하다. 그들의 관계는 시골과 도시라는 두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은 과거와 현재라는 두 관념이기도 하다. 도시화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시골이 도시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츠하가 사는 이토모리는 과거의 공간이며, 타키가 사는 도쿄는 현재의 공간이다. 작품에서 미츠하 일가는 과거에 살며 전통을 지키고 있다. 그들은 방직기계로 손수 끈을 짜며, 입으로 술을 빚는 등 전통적인 일례를 이어가고 있다. 작품이 진행되고 나면, 이토모리 현에 전에도 이와 같은 재앙이 닥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카메라의 움직임도 틈틈이 이토모리의 전경을 부감으로 보여주며 그 공간을 강조하기 바쁘다. 넓은 대지에 움푹 팬 이토모리의 호수는, 그녀의 공간이 미래와 현재가 공존하는 것을 보여준다.

운석이 떨어지고 나면 그 자리가 움푹 패기 마련이다. 작품에서 처음부터 패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토모리는, 운석이 떨어지는 결과를 막았거나 막지 못한 후에도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곳은 원래부터 그러했기 때문이다. 이미 파인 것이 더욱 파일 수는 있기는 하다. 결국, 어떻게 해서든 과거에 파였던 자국만큼은 지울 수 없다. 그것의 존재가 과거부터 있었음을 생각해본다면, 과거의 결과는 어떻게든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그들의 몸부림은 과거를 되돌리고자 하는 행동이 아니라 다가올 현재를 대처하는 방법이다.

아마도, 그녀의 일가가 전통적으로 그러한 대처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미츠하 일가의 여자들은 전통적으로 '몸과 마음이 바뀌'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신의 대행자로서 운명을 바꿀 누군가를 찾는 운명을 지닌다. 그 방법이란 것은 그들이 맞닥뜨린 재앙처럼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다. 그러나 그 운석은 그 운명을 촉발하는 타이머 같은 것일 뿐, 그들의 운명을 시작하는 발화점이 아니다. 타키와 미츠하의 관계는 이미 벌어져 있는 그 구덩이처럼 미리 예견된 사항이다. 그녀의 아우라가 담긴 술을 마신 타키는 그것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타키는 모든 것이 파괴되고 남은 공허한 곳, 그 쓸쓸한 곳에 올라 그녀가 빚은 술이 있는 동굴로 들어간다. 그 동굴은 신화적 공간으로, 외부와 시공간이 분리된 초현실적인 공간이다. 타키는 그 공간을 지나 과거와 미래, 그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무스비라는 이름의 실로 연결된 무언가를 통해, 정해진 시공간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타키가 술을 마시고 난 직후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타키는 그녀의 아우라를 머금으로써 그녀의 탄생부터 현재까지 모든 것을 알게 된다. 무스비라는 것은 탄생에서부터 예견된 운명의 탄생이었다.

우리가 찾아 헤매는 것은

 <너의 이름은.>(2016) 중 한 장면. 운석은 중요한 매개체이다.

<너의 이름은.>(2016) 중 한 장면. 운석은 중요한 매개체이다. ⓒ 메가박스㈜플러스엠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2014)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주인공 '쿠퍼(매튜 매커너히 분)'는 블랙홀 속으로 들어가 초차원 공간에서 그의 과거와 미래를 엿보게 된다. <너의 이름은.>에서 타키가 걸어 들어간 동굴의 모습은, 쿠퍼가 블랙홀 속으로 향하며 거치는 신화화의 과정과 같다. 쿠퍼가 당도한 곳이 도서관처럼 그들의 시간을 총망라해 놓은 것이듯이, 타키도 무스비라는 끈을 모은 방직물의 모습처럼 엮인 시간을 본다. 그러나 미츠하가 타키에게 준 단 하나의 붉은 끈은, 그를 그녀의 시간으로 인도한다. 수없이 많은 시간이 엮인 것 중에서, 단 하나의 시간을 명확하게 제시해 인도한다.

그리고 이후의 전개에서도 볼 수 있듯이, 결국 그러한 시공간의 초월은 현재가 과거를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이전의 시간대의 미츠하가 된 타키의 행동으로, 현재는 바뀐다. 아마도 관객들의 공감을 끌어낸 부분은 그러한 구원의 가능성일 것이다. 물론 현재가 과거를 구한다는 설정은, 어떠한 면에서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재앙 또한 운명적이고, 필연적이지는 않았지만, 필연이 되지 않도록 막아낼 수 있었다는 믿음이 있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 운명적인 만남의 접합부에서 일어지는 일은, 그것과는 같지만 다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의도대로 작품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두 사람의 만남이 이어지는 '황혼의 언덕'에서 어떠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그녀와 그,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는 두 사람의 만남은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장이다. 그곳은 해가 지려고 하는 시간의 황혼이 지배하는 곳이다. 해가 지는 것은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로의 퇴행, 현재에서 과거로의 퇴행을 뜻한다. 그 황혼의 순간은 현재가 과거와 만나는 충돌지점이다. 과거로 퇴행하는 그곳에서 타키는 미츠하에게 자신의 역할을 물려준다.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몸이 뒤바뀐 두 존재는 그렇게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 어떻게 보면 시간이라는 것의 불가역성을 뜻하기도 하는 그것은, 두 주체의 힘이 하나가 될 때 의미가 있다. 현재에서 과거로 온 자는 다시금 현재로 돌아가고, 과거는 뒤바뀌어진다. 현재는 과거를 잊고, 과거는 현재를 직시한다. 그들의 모습이 외양으로만 구분 지어질 뿐, 무스비라는 운명의 끈으로 계산됨을 생각해 볼 때 그 둘의 존재는 사실상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작품이 내내 보여주던 것은 갈라놓는 것의 파괴력과 이어지는 것의 치유력이 아니라 '두 존재의 병치를 통한 하나의 움직임'이다.

그 움직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개인의 의지다. 또한, 영화에서 개인은 과거와 현재가 융합된 하나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영화를 보는 개인 중 하나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자명하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 것, 아우라를 찾아 헤매는 방향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선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너의이름은 신카이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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