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당신의 20대는 어땠나요? 반짝반짝 찬란했나요.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암울했나요. 어떤 하루를 보냈건, 누구나 공평하게 10년 동안 20대를 살아내죠. 그렇다면, 금수저 물고 태어났을 것만 같은 정치인들의 20대는 어땠을까요. 어떤 삶을 살았기에 지금 그 자리에 있을까요. <오마이뉴스>가 정치인들의 20대, 청춘 한 자락을 들춰봤습니다. [편집자말]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자신의 집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 때 짧은 치마를 입고 짱동을 든 사연을 이야기 해 줬다.
정 의원은 “딸이 시위하다가 감옥에 잡혀갈까 걱정한 부모님이 치마와 구두를 사주셨지만, 그것 입힌다고 못 가는 게 아니다”며 “치마 입고 데모 여러 번 했다”고 설명했다.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자신의 집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 때 짧은 치마를 입고 짱동을 든 사연을 이야기 해 줬다. 정 의원은 “딸이 시위하다가 감옥에 잡혀갈까 걱정한 부모님이 치마와 구두를 사주셨지만, 그것 입힌다고 못 가는 게 아니다”며 “치마 입고 데모 여러 번 했다”고 설명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제 별명이요? 아, 이거 말해도 되나? 말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음, 불독이었어요, 불독. '쟤는 한번 물면 안 놓는다, 되게 무섭다' 해서."

20대 때 별명을 묻자, 한참을 머뭇거리던 정춘숙 더불어민주당(비례대표·54세) 의원이 쑥스러운 듯 웃음을 터뜨리며 털어놓는다. '불독'이라니, 평온하게 웃는 지금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별명이다. 정 의원은 "졸업한 뒤에 가끔 학교에 갈 때면 저를 그렇게들 부르곤 했다. (동아리방) 칠판에 '불독 왔다. 5시' 이렇게 딱 쓰면 저녁에 후배들이 다 모였다. 일종의, 학교 전설 같은 존재였다"며 크게 웃었다.

그게 벌써 35년 전 얘기다. 정춘숙 의원은 1982년도, 전두환 대통령의 독재정권 집권 초기 단국대 '새내기'가 됐다. 돌아보면 "마음 편히 못 놀아본 게 제일 아쉽다" 할 정도로 그는 대학 시절 내내 사회과학 공부 아니면 '데모'(학생운동)만 했단다. 당시 외치던 단골구호는 "군부독재 타도, 광주사태 진상규명"이었다고. 30여 년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 생생한 얘기를 듣다 보니 문득 감이 왔다. '이 사람, 원조 쎈 언니구나.'

당시 상황을 들으면 이해가 간다. 정 의원이 대학에 입학하기 불과 2년 전인 1980년,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당시엔 '광주사태'로 불렸던 이 사건은 최근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잘 보여주듯 전두환 군부 세력이 한창 시민들을 탄압·고문하던 시기에 벌어졌고, 중무장한 계엄군인들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으로 인해 무고한 광주 시민 중 수백 명 사상자가 발생했다.

지난달 21일 <오마이뉴스>와 만난 정 의원은 1980년대 초, 자신의 20대를 회상하며 "정의감과 헌신이 동력이 됐던 시절이었다. 믿는 걸 그대로 실천하던, 신념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시기"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돌아보면 숨을 좀 쉬면서 살아도 될 것 같은데, 그땐 숨 쉬면서 살면 죄악인 줄 알았다"며 아쉽다는 표정도 지었다. 인생의 어느 한 시기를 매우 치열하게 살아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자기 평가다.

그래서일까. 정 의원은 20대 초반 대학생 시절 사진이 거의 없다고 한다. "저도 그렇고 제 친구들도 당시 사진이 없더라. 그땐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데모를 하면 무조건 다 잡혀서 감옥에 가던 때라, 사진은 일부러 안 찍었다. 사진이 있으면 그걸로 경찰이 친구들 관계를 파악해 '얘 누구냐, 불어'라며 조직 사건으로 엮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남은 건 졸업한 뒤 공장에 취업했을 때 찍힌 사진들 뿐이다.

시위 반대해 가출한 적도... "치마 입혔지만, 그런다고 제가 못 가나요?"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오른쪽)은  대학생 시절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정 의원은 “20대 초반 대학생 시절 사진이 거의 없다”며  “그땐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데모를 하면 무조건 다 잡혀서 감옥에 가던 때라, 사진은 일부러 안 찍었다. 사진이 있으면 그걸로 경찰이 친구들 관계를 파악해 '얘 누구냐, 불어'라며 조직 사건으로 엮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오른쪽)은 대학생 시절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정 의원은 “20대 초반 대학생 시절 사진이 거의 없다”며 “그땐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데모를 하면 무조건 다 잡혀서 감옥에 가던 때라, 사진은 일부러 안 찍었다. 사진이 있으면 그걸로 경찰이 친구들 관계를 파악해 '얘 누구냐, 불어'라며 조직 사건으로 엮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대학 땐 독재정권 반대 운동, 졸업 뒤엔 전화기 공장에 취업해 노동자 권리를 위한 노동 운동을 하던 정 의원은 1988년, 결국 감옥에 갔다. 명분은 위장 취업이었지만 실은 노조를 만든 탓이었을 테다. 정 의원은 "한 번은 제 친구가 그러더라. 우린 대학 때 사진이 없는데, 감옥 갈 때 찍힌 사진(수의를 입고 찍는 수용기록부 사진)은 남아있을 테니 그거라도 찾아보자고. '굿 아이디어'라며 웃었다"라고 '웃픈' 얘기를 전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대체 우리가 왜 감옥에 갔을까, 화가 나기도 해요. 우리가 뭔가 죽을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사건) 피해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단지 자기 의사를 전달했다는, 지금과는 달리 사상과 양심·표현의 자유가 없었단 것 때문에 감옥에 간 거죠."

'센 언니' 정춘숙 의원의 20대를 상징하는 장면은 무엇일까. 그는 대학교 졸업반이던 시절, 짧은 치마를 입고 뾰족구두를 신은 채 학생운동 대열 맨 앞줄에 섰던 경험을 꼽는다. 시대적 상황이 워낙 엄중해 화장하는 등 자신을 꾸미는 일은 물론, 하다못해 연애도 금기시되던 때였다고 했다. 딸이 시위하다가 감옥에 잡혀갈까 걱정한 부모님이, 당시 패기 넘치던 20대 중반 정춘숙을 집 안에 가둔 게 화근이었다.

"참 유치한 게, 그땐 학생들이 데모하면 학교에서 집에 전화했습니다. '당신 딸 여기 있으니 데려가라. 이러다 감옥 간다'고. 엄마가 처음엔 '내 딸 내가 알아서 한다'며 전화를 끊었다는데, 학교에서 자꾸 전화가 오고 진짜 감옥에 갈까 걱정이 되니까 저를 아예 집에서 못 나가게 가둔 거예요. 해서 어느 날엔 제가 아예 집을 나와 버렸죠.

며칠간 동아리방·친구 집을 전전했더니 나중엔 엄마가 학교로 찾아 왔어요. 그러더니 '집에만 가자. 외출하게 해주겠다'고. 집에 갔더니 조건이, 치마를 딱 사주면서 입으라는 거예요. (여성용)구두 사주면서 '머 이거 아니면 못 나간다'고, 그렇게 입고 다니면 못 갈 줄 알고. 그래서 제가 '그러지 뭐' 했어요. 그거 입힌다고 못 가는 게 아니죠.(웃음)"

결국 20대 정춘숙은 짧은 치마에 구두를 신은 채 "독재 타도"를 외치는 학생 시위대 맨 앞에 서게 된다. 당시는 여자남자 가릴 것 없이, 시위 참여 학생이라면 대개 운동화를 신고 바지를 입었을 때다. 그때껏 '차려입고' 시위하는 여대생을 본 적 없던 동갑내기 친구들은, 치마를 입은 정 의원이 나타나자 모두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고.

"그땐 연합으로 데모를 많이 했는데, 장소가 주로 동국대였어요. 근데 거기 언덕이 경사가 심하거든요. 다들 운동화에 바지 입었는데 저 혼자 치마를 입으니까, 구두까지 신은 제가 맨 앞줄에 서니까 사람들이 다 '저건 뭔가' 하고 쳐다봤죠.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까 나 신경 쓰지 마라'. 그렇게 치마 입고 데모 여러 번 했죠."

정 의원은 "나중에 2000년대 들어오니 시위 풍경도 달라지더라. (여학생들이) 다들 치마 입고 귀걸이 하고도 잘만 데모하기에, 세상이 바뀌었단 걸 알았다"며 웃었다. 그는 이후 1992년 '한국여성의전화' 상근활동가로 시작해 상임대표를 거치며, 여성이라서 당하는 성폭력·범죄 사례 수집을 통해 가정폭력방지법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여성운동 경력만 약 25년,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된 현재도 그는 여성가족위 간사로 활동 중이다.

"지금이 어느 땐데 여성운동 따위를..." 선배들에 "전 평생 할 건데요" 일침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자신의 집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 때 짧은 치마를 입고 짱동을 든 사연을 이야기 해 줬다.
정 의원은 “딸이 시위하다가 감옥에 잡혀갈까 걱정한 부모님이 치마와 구두를 사주셨지만, 그것 입힌다고 못 가는 게 아니다”며 “치마 입고 데모 여러 번 했다”고 설명했다.
 정 의원은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의 원동력에 대해 ”정의감과 헌신이 동력이 됐던 시절이었다. 믿는 걸 그대로 실천하던, 신념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시기이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돌아보면 숨을 좀 쉬면서 살아도 될 것 같은데, 그땐 숨 쉬면서 살면 죄악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지금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제 얘기를 들으면, '어쩌면 저렇게 남성중심적인 삶을 살았을까?' 이럴 것 같아요."

정 의원은 자신의 20대 당시 후회되는 점도 털어놓았다. 동아리의 첫 여자 회장, 학생·노동 운동을 하면서 소위 '주류'가 되려 누구보다도 남성적으로 살았다는 점이다. 사회과학 성격이 짙은 탈춤패(탈춤동아리)에서 활동했던 그는 "극 주인공 중 여주인공은 한 명도 없다시피 했다"며 "당시엔 운동권 자체가 남성 중심적·폭력적이었다. 음담패설도 공공연하게 오갔다"고 말했다. 진보진영 내 성차별 또한 심각했단 얘기다.

"그때는 여성성 같은 건 정말 존재하지도 못했고요."그때는 여성성 같은 건 정말 존재하지도 못했고요. 여성운동을 무슨 발가락의 때만큼도 안 여겼었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오죽하면 제가 <여성의전화>에 간다고 했을 때가 1992년 대선 직전인데, 선배들이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데 네가 여성운동 따위를 하려고 하니' 이렇게 얘기를 했죠."

대통령선거가 중요하니 '사소한' 여성운동은 하지 말라는 취지였다. 선배들은 "지금 무슨 여성운동 같은 걸 한다고 해? 네 자리 남겨뒀으니 빨리 와라"고 했다. 정 의원은 당시 상황을 전하며 "그때는 중심과 주변 운동이 너무나 명백히 갈렸다. (운동권 내에선) 오직 노동운동과 학생운동만이 중심이었고 중요했고 나머지는 다 주변부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잘못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저는 버텼어요. (선배들 반대에도) '나는 여성운동 평생 할 거다. 제가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변하지 않는 한, 끝까지 할 거다'라고 버텨서 하게 됐죠."

"국회와 정치권 자체가 남성지배적 문화"라고 잘라 말하는 그는 국회의원이 된 현재도 싸우면서 버티고 있다. 지난해 5월, 강남역 살인사건이 벌어졌던 때엔 "여성폭력에 반대한다"는 팻말을 써 들고 추모행진에 동참하기도 했다. "지금처럼 각 정당의 대표가 여성이 많은 건 매우 특별한 경우다. 현재 (정당별로) 정책위의장이나 원내대표,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여성으로 뽑은 사례가 있나? 그렇지 않다"는 지적이다.

정 의원은 이어 최근 '젠더가 뭔지, 젠더폭력이 뭔지 모른다'고 말해 논란이 됐던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에게도 일침을 놨다. "젠더폭력·가정폭력 등은 남성이 힘과 공포와 위력으로 상대방의 의사와 상관없이 억지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건 여성들에겐 목숨이 달린, 생존의 문제"라는 '친절한 설명'도 곁들여서.

"단지 여자란 이유로 엄청난 폭력이 자행되는 게 현실이다. 왁싱샵 살인사건에서 보듯 혼자 일하는 여자를 찾아가 죽이고, 데이트 안 해준다는 이유로 염산을 뿌리기도 한다. 상대방(여성)이 나와 동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할 수 없을 일이다. …홍 대표는 '엄처시하에 산다'고 하지만, 그건 상대가 위협이 안 될 수준 정도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것 아닌가. 여자들이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이 어떤 건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1시간 30분가량의 인터뷰 내내 단호하면서도 분명한 말투, 차분하고 침착한 태도로 '원조 센 언니' 면모를 톡톡히 보여준 정 의원. 그는 이날 인터뷰 말미, '20대의 자신과 만난다면 뭐라고 말해주고 싶나'란 질문에 "숨을 좀 쉬면서 살렴"이라고 말했다. 생애 가장 치열했던, 훗날 왕성히 활동하는 국회의원이 될 '스무 살 춘숙이'에게 보내는 당부였다.

"어디에든 놀러 가라고 하고 싶죠. 인생을 좀 즐겼으면, 여유가 있었으면, 숨을 좀 쉬고 옆도 좀 쳐다보면서 살았으면 하는. 물론 그때의 시대적 상황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취미도 운동, 생활이 운동' 그렇게 운동 하나밖에 몰랐고 그것만 알고 살았는데, 좀 다르게 살았으면. 지나치게 자신을 희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좋은기사 후원하고 응원글 남겨주세요!

좋은기사 원고료주기

10만인클럽아이콘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 묻고, 듣고, 쓰며, 삽니다. 10만인클럽 후원으로 응원해주시길!더보기

시민기자 가입하기

© 2017 OhmyNews오탈자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