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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0년(영조 46)에 태어난 이삼만과 1786년 (정조 10)에서 태어난 김정희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16년이라는 세월의 차이가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글씨에 인생을 걸었으며 자신만의 글을 후세에게 남겼다.

추사 김정희는 추사체를 창암 이삼만은 창암체를 남겼다. 이삼만은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명문가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반면 김정희는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북학파(北學派)의 일인자인 박제가(朴齊家)의 눈에 띄어 어린 나이에 그의 제자가 된 사람이다.

"벼루 세 개를 먹으로 갈아 구멍을 내고야 말겠다." - 창암 이삼만

"가슴속에 오천 권의 문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붓을 들 수 있었다." - 추사 김정희

고택
▲ 김정희고택 고택
ⓒ 최홍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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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으며 이삼만은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만년에는 전주에 살면서 완산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서로 다른 곳에서 글씨를 위해 정진하면서 살았는데 추사 김정희의 서체가 강직하면서 기세가 느껴진다면 창암 이삼만의 서체는 물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분다는 유수체가 특징이다. 예산에 있는 추사 김정희 고택은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했는데 예산 땅 이곳에 향저를 하사 받으면서 지어졌다.

사랑채
▲ 사랑채 사랑채
ⓒ 최홍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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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고택은 초기에는 53칸의 크기를 자랑했으나 1960년에 개축된 후 36칸 반으로 축소되었다. 김정희는 34세라는 조금은 늦은 나이에 문과 급제를 하면서 벼슬길에 올랐지만 이삼만은 글씨에 온 힘을 쏟아 가산을 탕진하기에 이르렀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주 제남정(濟南亭)의 액(額)을 쓴 이삼만의 글씨를 평한 오세창은 이렇게 말하였다.

마당
▲ 고택마당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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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암은 호남(湖南)에서 명필로 이름났으나 법이 모자랐다. 그러나 워낙 많이 썼으므로 필세는 건유(健愈)하다."

홍로
▲ 예산사과 홍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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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사과는 맛있기로 유명하다. 예산에 있는 김정희 고택을 들를 겸 추석 전에 나오는 홍로도 구매해보았다. 추석 제사상에 올라가는 홍로는 햇사과로 오래 두고 먹으면 당도가 떨어지지만 바로 사서 먹으면 과즙이 많고 당도가 높아서 추석 선물용으로 인기가 높다. 홍로는 원예연구소에서 1980년에 '스퍼어리 블레이즈'에 '스퍼 골든 딜리셔스'를 교배하여 얻은 품종으로 올림픽이 열리는 해안 1988년 홍로로 이름이 지어졌다. 짙은 홍색에 줄무늬가 있다. 속살은 흰색이며, 조직이 치밀하고 과즙이 많아 맛이  좋다.

서체
▲ 김정희서체 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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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에는 곳곳에 김정희의 서체가 남겨져 있다. 추사 김정희의 서체가 강직하면서 기세가 느껴진다면 창암 이삼만의 서체는 물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분다는 유수체가 특징이다. 김정희와 이삼만의 만남은 김정희의 제주도 유배길에서 이루어졌다. 제주도로 가는 도중에 창암 이삼만을 만나 글씨를 겨루었다고 하는데 글씨를 겨루고 난 후 김정희는 창암의 글씨를 혹평했다.

"필삼십년에 부지자획(30년 붓을 잡았다고 하지만 획도 하나 못 긋는구나!)" 이에 이삼만의 제자가 나서려고 하자 이삼만은 만류했다고 한다. 아직 추사체를 완성하지 못한 김정희는 글씨에서도 당당함만이 묻어 나왔으니 물 흐르듯이 쓰인 이삼만의 글씨가 눈에 안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
▲ 김정희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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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는 이름 있는 교목세가 출신으로 20대 때 이미 베이징에 가서 옹방강이나 완원 같은 대가에게 서법 지도를 받았으며 다양한 학문에도 관심이 많았다. 어머니가 사셨던 추사고택을 김정희는 자주 찾았으며 사랑했다고 한다. 고택에는 6칸의 대청과 안방, 건넌방이 있는 안채가 있으며 사랑채는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 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대청과 툇마루가 만들어져 있다.

 "글씨 쓰는 법은 외로운 소나무 한 가지와 같다."

전주에서 이삼만과 글씨를 겨뤘다는 이야기는 야사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이지만 그를 만나고 제주도로 가서 유배를 하는 동안 그의 추사체는 완성이 된다.

추사체
▲ 추사체 추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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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의 역작 추사체는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다. 타고난 인품에다가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서, 거기에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글에 스며들어 있다.

유수체
▲ 유수체 유수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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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암은 터럭이 긴붓을 사용해서 글씨를 썼는데 꾀꼬리 꽁지털등을 사용하여 붓을 만들어 썼다고 한다.  그의 작품을 보면 마치 물 흐르듯이 글이 춤추는 느낌이다. 창암 이삼만은 통일신라시대 김생의 글씨를 토대로 조선 고유의 서예미를 구현해냈다. 오랜 제주도 귀양이 풀려 서울로 가는 길에 김정희는 창암을 찾았다. 그러나 이미 고인이 되어있었다. 이에 추사 김정희는 그의 묘비에 '명필창암이공삼만지묘'라는 묘비명을 남긴다.

"한 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비로소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추사 김정희



태그:#추사김정희, #창암이삼만, #김정희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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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지 쓰는 남자입니다. 영화를 좋아하고 음식을 좋아하며, 역사이야기를 써내려갑니다. 다양한 관점과 균형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금은 열심이 사는 사람입니다. 소설 사형수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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