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을 각색해서 영화로 만들 때 원작을 그대로 옮기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소설과 영화는 수용자와 의사소통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소설에서 느낀 재미와 감동을 영화로 옮기려는 창작자는 어떻게든 변형을 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설 원작 영화의 성패는 이 '변형'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잘 하느냐에 달려 있지요.

이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김영하의 중편 분량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입니다. 연쇄 살인범이라는 비밀을 감추고 살아온 동물병원 원장 병수(설경구)는 치매에 걸린 상태입니다. 외동딸 은희(설현)를 혼자 키워 온 그는 점점 흐릿해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컴퓨터와 녹음기를 동원해서 기록합니다.

그런데, 인근 지역에서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하기 시작하고 병수는 은희의 귀가 시간을 단속하는 등 딸의 안전에 부쩍 신경을 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수는 차를 타고 가다가 예기치 않게 접촉사고를 냅니다. 그가 사고를 낸 상대는 태주(김남길)라는 젊은이인데, 병수는 그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임을 직감합니다. 태주 또한 은희가 병수의 딸임을 알게 된 후 계속 그녀의 곁을 맴돌면서 병수를 주시하지요.

돋보이는 연출과 연기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의 한 장면. 병수는 수많은 살인을 저지른 연쇄 살인범이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치매는 하늘이 내린 벌이기만 할까?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의 한 장면. 병수는 수많은 살인을 저지른 연쇄 살인범이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치매는 하늘이 내린 벌이기만 할까? ⓒ (주)쇼박스


치매에 걸린 연쇄살인범이란 설정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을 제외하면, 여러 요소들이 원작과는 조금씩 다르게 재배치돼 있습니다. 대중적인 서스펜스 스릴러로서 이야기의 장르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선택이었는데, 대체로 성공적인 편입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원작의 결말이 다소 무책임하다고 생각해 온 저로서는 이 영화의 각색 방향이 꽤 맘에 들었습니다.

전반적으로 원신연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입니다. 나레이션이 압도적으로 많은 초반 설정 단계를 리듬감 있게 엮어 내고, 병수와 태주가 같은 장면 안에 나올 때마다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 낸 솜씨가 뛰어납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1인칭 화자를 내세워 서사를 끌고 가는 것이 녹록지 않은 일인데, 전형적인 플롯으로 뼈대를 잘 잡아 놓은 덕분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설정상 배우들의 연기와 서로 간의 호흡이 중요할 수 밖에 없었는데, 전반적으로 큰 문제 없이 편안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병수 역을 맡은 설경구는 이 쉽지 않은 캐릭터를 대단히 현실감 있는 인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합니다. 극단적인 캐릭터를 연기할 때에도 일말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낼 줄 아는 그의 장점을 잘 살렸습니다.

김남길 역시 대단한 연기력을 보여 줍니다. 영화 내내 차분한 외모와 행동거지를 유지하지만, 그 이면에 서려 있는 섬뜩한 광기를 표현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병수와 대척점에 선 그의 존재는 영화 전체의 긴장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데 큰 몫을 합니다.

설현의 연기도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CF를 통해 대중적으로 각인된 이미지 때문에 초반 몰입이 좀 안 되긴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무리없이 극에 녹아 들었습니다. 앞으로 연기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려면 대중에게 노출되는 빈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결말 부분을 장르적으로 깔끔하게 끝내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 남는 부분입니다. 뭔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려다 보니 이전까지의 리듬이 흐트러집니다. 전체적으로 아귀가 딱 맞아 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꾸 뭔가 반전 요소를 더 넣으려는 바람에 무리가 따릅니다. 이 영화의 쾌감은 퍼즐이 맞아 떨어지거나 완전히 재조합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서스펜스나 스릴 같은 정서적 효과에서 나온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아쉬운 부분입니다.

영화가 소설과 다른 점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의 한 장면. 태주 역할을 맡은 김남길의 부드러우면서도 사악한 연기는 이 영화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중요한 열쇠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의 한 장면. 태주 역할을 맡은 김남길의 부드러우면서도 사악한 연기는 이 영화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중요한 열쇠다. ⓒ (주)쇼박스


평균 수명이 높아지면서 우리나라의 치매 환자 수는 급증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기억과 정신을 갉아먹는 이 병은 본인뿐 아니라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합니다. 이런 갈등 요소가 있기 때문에 치매는 다양한 이야기의 소재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김영하의 원작이 독특했던 것은 치매 당사자의 심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흥미진진하게 묘파했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치매 환자를 둔 가족의 입장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지요. 게다가 치매 증세가 치명적인 결과를 부를지도 모를 연쇄 살인범에게 나타난다는 설정 또한 참신했습니다.

이 영화는 그 참신한 설정을 그대로 빌려 와 자신만의 길을 갑니다. 특히, 치매가 한 인간의 모든 기억을 무너뜨리는 참혹한 형벌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세상과 화해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포착한 것이 인상적입니다. 불행한 일이 닥치면 재빨리 어디에선가 의미를 찾아내어 어려움을 극복하려 하는 것은 인간 정신의 오래된 습관입니다.

애초부터 인간의 기억력과 판단력은 완벽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더이상 자신의 기억을 믿을 수 없다고 부끄러워하거나 허탈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라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그런 삶의 의지를 웅변적으로 보여 줍니다. 언제나,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른 법이라는 걸 잊지말라는 듯이요.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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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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