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센 파도가 유능한 선장을 만들고 뜨거운 불에 달궈진 쇠가 좋은 연장을 만든다는 글귀가 있다. 그렇다면 불로 된 파도는 우리 사회를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너울거리는 붉은 파도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한데 모으는 힘이 있었다. 촛불시위의 거대한 에너지는 그 자리에 모인 각기 다른 사람들을 한마음, 한뜻으로 외치도록 만들었다. 비단 그 자리에 선 사람들뿐 아니라 집에서, 퇴근길 차 안에서 TV로, 핸드폰으로 촛불시위를 지켜보던 시민들 또한 그 뜨거운 순간을 함께했을 것이다.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오늘 9월, 뜨거웠던 촛불의 열기는 식어가는 듯하다. 채 식지 않은 잔불 속에서 tbs는 '방송의 날 특집' <촛불의 기록, 시민 거리에 서다>라는 다큐멘터리를 꺼내 들었다.

조금은 늦은 이야기이지만...

ⓒ tbs


"그래서 박근혜랑 최순실이랑 무슨 사이인 거야?"

지난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자 친구가 나에게 물어본 질문이다. 평소에는 정치를 신경 쓰지도 않던 친구는 국정농단 사태 덕분에 정치에 관심을 끌게 되었다. 촛불 시위에 나온 많은 사람도 국정농단 사태 때문에 정치에 관심을 두고 촛불시위까지 나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이번 사태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고 사람들이 궁금해하던 사건이었다.

또한, 우리 사회에 있어 촛불시위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음은 물론이고 국제적, 학문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 사건이었기 때문에 국내의 언론사뿐 아니라 해외의 언론사들도 질세라 국정농단 사건과 촛불시위를 보도했다. 당연히 이를 기록하고 분석하는 다큐멘터리도 많이 나왔다.

<촛불의 기록, 시민 거리에 서다>는 기존의 다큐멘터리들과 비슷한 서사를 보여준다. 촛불시위의 중요성과 그 의의, 그 속에서 보여준 시민들의 책임과 힘은 분명히 자랑스럽고 중요한 것이지만 익히 들어온 이야기이기에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6개월이나 지난 지금 촛불시위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나온다면 기존의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새로운 시선과 분석이 필요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거리에 선 시민의 목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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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기록, 시민 거리에 서다>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직접 거리에 선 시민들의 속마음과 생각들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영상에서 시민들의 생각이나 감정은 주된 내용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민들의 목소리가 너무 작지 않나 싶을 정도로 일반인의 인터뷰를 볼 수 없다. 다큐멘터리는 정치인, 연예인, 시민단체 대표 등 인사들의 입을 통해 촛불시위를 분석한다. 심지어 다른 다큐멘터리와 뉴스, TV 프로그램에서 종종 보던 인사들이다.

<촛불의 기록, 시민 거리에 서다> 보다 길고 자세한 분석을 한 다큐멘터리나 특집 기사들이 있는 마당에 어째서 이런 방식을 택했는지 의문이다. 물론 필요한 정보를 시민들이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요리를 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하지만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심지어 직접 경험하고 느낀 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잘 익힌 스테이크보다 날 것 그대로의 육회가 아니었을까? 당시 시민들이 가지고 있던 날것 그대로의 감정과 열정을 느낄 수 있는 다큐멘터리가 없다는 점 역시 아쉽기만 하다..

여전한 '광화문'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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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 100만 명이 모였다. 광화문 광장에 사람이 이렇게 모인 것은 처음일 것이다. 비록 집회 주최 측과 경찰 사이의 추산이 달랐지만 수많은 사람이 모였고 그것이 엄청난 일이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언론사들은 시시각각 광장에 모인 인원수를 추정하고 다음 날 조간신문의 1면은 당연히 광화문이 차지했다. 그리고 놀랄 만큼 아무도 지방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신문을 샅샅이 찾지 않거나 주요 뉴스로만 사건을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광주에서는 횃불을 들었다더라', '대전에서 올라왔다더라'하는 소식만이 간간히 들릴 뿐이었다.

<촛불의 기록, 시민 거리에 서다> 또한 그러한 수도권 위주의 시선을 그대로 가져왔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어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광화문 시위에 대한 이야기를 되풀이할 뿐이다. 언론사들에서 미처 찾아가지 못했던, 거리는 멀지만, 열정은 절대 뒤지지 않았던 지방 시민들의 진솔하고 깊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다큐멘터리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울, 부산, 광주 그 어디에 살든 우리가 모두 같은 마음으로 거리에 선 시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8월 2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많은 사람이 말도 안 되는 판결이라고 분개하고 있지만, 그 에너지는 크지 않아 보인다. 정권이 바뀌고 특검이 끝나며 국정농단 사건은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조용히 진행 중이다. 관계자들에 대한 재판은 계속되고 있고 사건과 관련이 없지만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많은 문제도 남아있다.

반면 촛불을 밝히던 시민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고 반년이라는 짧지만 긴 시간이 지나며 촛불이라는 기억은 조용히 그 속으로 파묻혀가는 듯하다. 비록 위의 관점으로 봤을 때, 기대에 미치지 못한 방송이지만 지금 시점에서 촛불시위와 그 에너지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는 점만 보더라도 칭찬할 만하다.

<촛불의 기록, 시민 거리에 서다>는 촛불시위의 기록과 시민 민주주의의 승리를 기록한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서사를 풀어나가는 목소리는 담담하고 침착하기보다 열정적이다. 학술적이고 정치적인 다큐멘터리라기보다 시민들의 승리에 대한 찬가에 가깝다. 촛불의 불빛이 희미해지는 지금이야말로 열정과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이런 목소리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꺼진 불을 다시 지피는 것보다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리는 것이 쉽다. 우리 사회에 변화의 열기가 식기 전에 <촛불의 기록, 시민 거리에 서다>가 그 열기를 되살릴 수 있는 연료가 되길 바란다.

촛불집회 다큐멘터리 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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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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