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정재은 감독의 <아파트 생태계>(2017) 한 장면.

9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정재은 감독의 <아파트 생태계>(2017) 한 장면. ⓒ 영화사 풀


지난 4일 막을 올린 9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정재은 감독의 <아파트 생태계>(2017)은 건축영화제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영화다. 지금도 수많은 영화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극영화 <고양이를 부탁해>(2001)로 데뷔한 정재은 감독은 2011년 제작된 <말하는 건축가>에서 부터 건축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서울국제건축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된 <아파트 생태계>는 <말하는 건축가> <말하는 건축 시티:홀>(2013)에 이은 정재은 감독의 세 번째 건축 다큐멘터리 영화다.

아파트에 관한 기록 보고서

<아파트 생태계>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아파트에 관한 일종의 기록 보고서이다. 서울 곳곳에 널려있는 아파트의 역사를 추적하고자 하는 영화는 그 시작점을 1967년 지어진 세운상가 아파트로 잡는다. 최근 '다시·세운' 프로젝트로 주목받고 있는 세운상가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당시 김현옥 서울 시장, 건축가 김수근의 야심작이었다. 그 당시 서울 시내 곳곳에 중구난방으로 지어진 상가아파트들이 그랬듯이, 세운 상가아파트 또한 급격히 늘어가는 서울 인구를 수용하고자 했던 목표가 있었다. 여기에 세운상가는 종로 한복판에 특별한 모더니즘 건물을 세우겠다는 김수근의 원대한 포부가 숨어 있었다. 하지만 건물 증축 과정에서 있었던 김현옥과 김수근의 갈등, 김수근의 건축 철학과 반하는 민간 사업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 여기에 1968년 김신조 청와대 습격 사건의 공포에서 비롯된 급격한 강남 개발로 세운상가는 급격히 위축되게 된다.

<아파트 생태계>의 키 포인터를 잡고 있는 메인 인터뷰이 고 손정목은 세운상가를 두고 위대한 건축가 김수근의 '실패작'이라고 평가한다. 고 손정목 선생은 박정희 정부 시절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내며 김현옥, 양택식, 구자춘 서울 시장을 도와 사실상 서울 도시 계획을 총괄, 기획한 인물이다. 1970년 들어 본격적인 강남 개발이 시작되면서 당시에는 허허벌판이었지만, 지금은 부촌이 된 강남(영동), 잠실, 여의도에 아파트가 들어서는데 그걸 계획하고 추진한 사람이 다름 아닌 고 손정목 선생이다.

지금은 영화감독으로 유명한 유하의 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을 읽으며 폐허에 가까운 세운상가를 우아하게 부유하는 여성(김혜나 분)을 통해 영화의 시작을 알린 정재은 감독은 고 손정목 선생의 자랑(?)이나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여의도 시범아파트, 반포 주공 아파트를 차례로 돌아본다. 모두 재개발, 재건축을 앞둔 노령의 아파트를 훑어보는 카메라는 요즘 지어진 신식 아파트와 달리 녹지 공간도 많고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에 감탄한다.

하지만 유구한 역사와 울창한 녹음을 가진 오래된 아파트에 대한 일방적인 찬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의도 시범아파트에서 아이를 키우고 살아가는 전업주부의 현실에 의해서 여실히 깨지게 된다. 재테크에 성공한 시부모님 덕분에 꽤 비싼 아파트에 속하는 여의도 시범아파트에 신혼집을 마련할 수 있었던 인터뷰이는 아파트 곳곳이 녹슬고 물 새는 것은 일상다반사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여자 혼자 유모차를 끌고 아파트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웃픈 현실을 몸소 보여 준다. 그리고 오래된 아파트가 다 그렇듯이 여의도 시범아파트 또한 재건축을 앞두고 있다.

공간의 목적

애초 아파트의 출발은 서민들에게 안정된 주거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강남 개발 붐에 힘입어 강남, 잠실, 여의도 신시가지에 지어진 중대형 아파트는 어느새 중산층의 꿈이 되었으며 자산 증식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된다. 반면, 강남 아파트에 완전히 밀려 버린 구시가지 시민 아파트는 선뜻 찾아가고 싶지 않은 도시의 흉물로 전락한다. 그러나 <아파트 생태계>는 강남 개발의 효과를 톡톡히 본 부촌 아파트와 그렇지 못한 아파트의 비교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허허벌판이었기에 개발이 비교적 쉬웠던 강남, 반포, 잠실, 여의도가 달리 원래 있던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그 위에 중산층을 위한 아파트를 지은 상계동과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 건립 역사를 반추하며 도시의 양적 성장에만 치중했던 지난날의 도시계획 문제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하지만 <아파트 생태계>는 박정희, 김현옥, 김수근, 손정목으로 대표되는 개발의 역사를 섣불리 부정하거나 단정 짓지 않는다. 그게 잘했던 잘못했든 간에 그들이 서울 한복판에 세웠던 아파트는 수많은 사람의 생활 양식을 규정 했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다. 문제는 아파트를 바라보는 관점의 오류다. 애초 아파트는 단독 주택처럼 많은 땅을 사용하지 않아도, 많은 시민에게 주거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이었다. 허나, 재건축과 재개발로 점쳐왔던 한국 아파트 역사를 비추어보면 한국에서의 아파트는 집이라는 개념보다는 재테크, 투자의 수단으로서 가치가 더 커 보인다.

인터뷰이 중 한 사람으로 등장한 <상계동 올림픽>(1988)의 김동원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대한민국에 널려있는 집(아파트)가 안정된 보금자리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면 지금처럼 집값이 폭등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렇다. 아파트를 통해 '무분별한 개발'로 대표되는 한국 근현대사를 돌아본 <아파트 생태계>는 생태계라는 제목에 걸맞게 아파트가 원래 가진 공공성의 의미를 되짚어 보며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살아갈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아파트 재건축과 재개발은 단순히 그곳에 사는 사람의 삶뿐만 아니라 동물(길고양이)의 생존과도 직결되는 일이기도 하다. 1960-70년대 도시 계획 개발 붐에 힘입어 서울 곳곳에 자리 잡은 아파트는 그곳에서 수많은 추억을 남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며, 또 서울이라는 도시의 역사와 대한민국의 경제 흐름을 어떻게 바꾸었을까. 픽션-다큐-에세이 형식을 오가는 다양한 접근법을 통해 서울의 아파트 역사를 충실히 고찰한 정재은 감독의 <아파트 생태계>는 오는 24일까지 이어지는 9회 서울 국제건축영화제 상영 기간에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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