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군함도>

ⓒ CJ 엔터테인먼트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류승완 감독이 '군함도'에서 일어난 소소한 이야기들을 아기자기하게 감동적으로 풀어내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예고편이 너무나 좋았기에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근본적 이유는 내가 액션 영화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베테랑>(2015)도 사실 별로였다. 나는 그저 무슨 얘기인지 초점도 파악하지 못하고, 누가 진짜 나쁜 놈인지 알아 맞춰보라는 tvN 드라마 <비밀의 숲>이 더 재밌었다. 짜증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투덜댔다.

투덜거리는 나를 지인이 감동시켰다. 류승완 감독이 <군함도> 제작에 들어갈 당시는 아직 박근혜 정권기였다. 지금까지 박근혜 정권이 유지되고 있었다면, 류승완 감독은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천하의 감독이었을지라도 블랙리스트에 오르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을 것이다. 풍문으로 듣자면, 어느 한 기자는 <군함도>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서 연예인 섭외를 시도했다 한다. 그러나 응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다. 나는 그것이 단지 연예인들이 일본 진출에 영향을 받을 것으로 생각되어 그들이 그러했으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연예인 입장에서 보자면, 일본이 무서웠던 것이 아니었으리라.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자 농담 반 진담 반 급속히 퍼진 이야기가 누군가 혹시 내 얘기를 듣고 있을지도 모르니 입조심을 잘 하자고 자기 검열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실제로 류승완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외교부와의 일화를 언급하기도 했다.

류승완의 마중물

 영화 <군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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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7월) 세계유산등재 당시의 상황을 되돌아보면, 정부의 대응보다는 언론이 군함도  이슈를 이끌어가고 있었고, 가을(9월) 무렵 <무한도전>  방송으로 꺼져가던 군함도의 신음 소리는 다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또 한편 구석에서는 그 겨울에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 지원위원회'가 해산되었다.      

이름만 보아도 어떤 기관인지 알 만하지만, 본 위원회의 설립 목적을 애써 적시해 보자.

"강제동원 피해의 진상을 규명하여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나아가 1965년에 체결된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과 관련하여 국가가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와 그 유족 등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위로금 등을 지원함으로써…."

본 위원회는 2010년 조직된 이래로, 꾸준한 활동과 성과를 보여 왔으나, 2015년 12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운영이 정지되었다. 국회의 동의를 받지 못하여 연장할 수 있는 관련법을 마련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군함도 관련해서, 본 기관은 2012년 12월 27일 발행으로 보고서 "사망 기록을 통해 본 하시마(端島) 탄광 강제동원 조선인 사망자 피해실태 기초조사"를 세상에 내놓았다.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은 1986년 공문서 '화장매장인허증'을 발굴하는데 여기에는 1925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 122명이 왜 사망하였는지, 일본인보다 얼마나 더 많은 비율로 사망하였는지를 추산할 수 있는 기록이 남겨져있다.

지금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군함도에서 122명이 사망하였다는 사망자 수는 이 모임이 밝혀낸 숫자이다. 나가사키에서 1980년대 당시 수기로 이렇게도 계산하고 저렇게도 계산해 낸 것을 위의 위원회는 그 명부를 다시 받아 그들의 본적지 등을 조사하여 신원을 더욱 정확히 밝혀내었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과 한국의 공공기관이 연대한 결과로, 한쪽은 현지에서 발굴, 조사, 해석하고, 다른 한쪽은 이를 이어 받아 더욱 정밀하게 확증지었다. 그들 각각이 가지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 공동으로 이뤄낸 쾌거로서, 증거를 내밀고 일본에게 사죄, 보상,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길이 트인 것이다.

지난 7월 26일 개봉된 <군함도>는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도심에서 번쩍이던 한순간의 섬광과 원폭 구름을 바라보던 조선인 강제노동자들을 영상에 실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폭2세 환우들은 아직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원폭 피해의 대물림을 따져 묻고 있다. 최고연령 70세가 다 되어 가는 원폭2세 문제를 일본이 인정하지 않으니, 한국 정부도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가 나오고 있다. 이런 아이러니한 지점들을 <군함도> 는 다시 우리들에게 살펴보게 하고 잊지 말라고 각성시켜 준다.

<군함도> 는 소소한 이야기보다는 굵직굵직한 큰 숙제를 우리에게 던져주었다. 아니 우리에게 숙제가 남아 있음을 환기시켜 주었다.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또 무엇이 있는가. 친일파 척결, 조선인 원폭 피해자 문제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군함도> 의 또 다른 한 축은 미불임금의 청산이다. 손석희 앵커의 <뉴스룸>은 일본에 대한 개인 피해 청구권이 유효함을 보도하였다. 미쓰비시 지배하에 강제 노동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경우는 원폭까지 입은 조선인들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있었다. 지금도 법정에서 외로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일본군 피해 위안부 할머니 문제도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식민지 국가가 가해 국가로부터 배상금을 제대로 받아낸 경우는 아주 드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류승완 감독은 마중물을 부었고 남은 것은 우리의 몫이다.  

금기에 도전하다

 영화 <군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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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의 단어, '재일조선인'의 쓰임을 살펴보자. 류승완 감독은 많은 자료와 고증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7월 20일 VIP 시사회 때 그는 무대에 서서 객석의 한 일본인을 소개하였다. 소개하기를 '재일조선인'을 위해서 긴 세월 동안 시민운동을 해 오신 분이라고 시바타 토시아키 씨를 가장 먼저 소개하였다. 재일교포, 재일동포, 재일한국인, 재일한인, 재일코리안, 재일, 자이니치라는 다양한 명칭을 두고 '재일조선인'이라는 단어를 선택하였다. 일본에 있던 조선인들이 식민시기에 차별, 박해 당했으니, 당연히 그들을 '재일조선인'이라고 칭해야 하겠지만, '동무'라는 단어가 한국 사회에서 사라진 것처럼 '재일조선인'들을 '재일조선인'들이라고 호명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런 예들은 시바타 토시아키 씨가 나온 방송프로그램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정식 직함은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의 사무국장이지만 KBS <역사스폐셜: 지옥의 땅, <군함도> (2015.6.28.), JTBC <이규현의 스포트라이트>(2015.10.30)에서 전부 향토사학자로 소개된다. 그의 정식명칭은 <다이빙벨>(2014)을 찍은 안해룡 감독이 찍은 <꽃바위 하나오카의 눈물>(2015)에서 비로소 제대로 소개된다.

인터넷에는 <군함도>를 보느니 차라리 <무한도전>을 다시 한 번 보라는 말도 떠돈다. 하지만 <무한도전> 방송에서도 오류는 있었다. 예컨대 자료로 이용한 레스토랑 사진은 조선인 강제 동원의 실상을 부인하는 '군함도자료관'에 전시된 이미지로 실제로는 1965년경 사진이다. 이때는 광복 후로 조선인 강제 동원이 없던 시대였지만, <무한도전> 제작팀은 강제 노동과 대비되는 극적 효과를 위해 이 이미지를 사용하였을 터이다.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는 당시 컬러텔레비전이 보급되어 있었다고 전하는데, 군함도가 한 때 경제적으로 윤택해서 1957년에 7.8%가 흑백 텔레비젼을 시청한 것은 사실이나, 1960년대 이후에야 일본에서 컬러 방송이 실시되었음이 무시됐다.

이런 점들을 놔두고 <군함도>를 '국뽕' 혹은 애국심 팔이라고 조롱해도 되는가.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한 촛불 모임도 류승완 감독은 사실(史實)에 입각했다. 1945년 당시 일본인들은 공습을 두려워하여, 우리가 1970년대 후반까지 실시했던 것으로 기억하는 야간관제 훈련처럼 창문에는 천막을 치고, 촛불이나 석유램프로 겨우 어둠을 밝혔다. 7월 31일 당시 다카시마는 폭격을 받아 정전이 되고, 하시마는 비상용 전력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가정용으로는 보급되지 않았다. 촛불로 어둠을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류승완 감독이 촛불 집회를 의식하지 않지는 않았을 터이지만, 이 신 자체가 허구는 아니라는 것이다.

류승완 감독은 대탈출 신을 연출한다. 이는 한 개인의 탈출이 아니다. 한 장애인이 자신의 몸을 던져 무서워하던 여인네를 이끌며 다함께 탈출할 것을 독려한다. 집단 탈출로 해방구를 모색한다. 지난 겨울을 떠올려 보자. 한 개인들이 몇 백만이 되어 촛불을 나누며 광화문으로 모여들었다. 그 때의 결기는 어땠는가. '나'가 아닌 '우리'는 결국 해방구를 찾았다. '우리'였기에 더욱 신이 났고 흥이 났으며 더 모여들었다. <군함도>에 흥이 더욱 더해졌다면, 관객들의 호응은 더하였을 것이다. 류승완 감독에 경의를 표한다.

군함도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 시바타 토시아키 류승완 원폭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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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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