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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대중이 동영상은커녕 사진에도 익숙지 않을 때였다. 조선 왕실에서 동영상 때문에 사람이 숨지는 일이 있었다. 일본이 틀어준 동영상을 보고 조선 후궁이 몸져누웠다가 생을 다한 사건이었다.

106년 전인 1911년 7월 20일이었다. 경술국치(1910.8.29)로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실로 격하된 뒤였다. 전(前) 귀비 엄씨가 사고의 당사자였다. 흔히 엄귀비 혹은 엄귀인이라 불리는 후궁이 조선총독부가 틀어준 동영상을 보고 세상을 떠났다.

엄귀비의 '비'란 표현 때문에 이 여성이 간혹 대한제국 황후 혹은 중전으로 오해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중전의 정식 칭호는 후(后)였다. 비(妃)는 후궁이었다. 조선왕조는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비'를 중전 칭호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1897년 대한제국 선포 뒤에는 '비'를 후궁 칭호로 사용했다. 엄귀비는 제국 선포 뒤에 '비'가 됐다. 그래서 후궁이었다.

고종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면서 급격히 위상 높아져

엄귀비.
 엄귀비.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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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임금보다 2년 뒤인 1854년, 공노비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나 그 자신도 공노비가 된 엄씨는 1861년 여덟 살 때 궁녀가 됐다. 그 뒤 그는 자신보다 5년 늦게 궁에 들어온 명성황후 민씨의 그림자 역할을 하면서 궁궐 생활을 했다.

요즘 같으면 그는 대통령 부인을 담당하는 청와대 제2부속실 직원이었다. 중전 시녀였던 것이다. 그 역할을 그는 충실히 수행했다. 그것 때문에 서른두 살 때인 1885년에는 생애 최초로 남자와 한방을 쓰는 경험도 했다. 명성황후의 배려로 이른바 승은을 입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명성황후가 죽기 전까지는 그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기 힘들었다. 그때는 명성황후가 잠시 관대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명성황후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 그러다가 1895년 황후가 시해되고 1896년 고종이 경복궁에서 러시아공사관(아관)으로 피신하는 일이 발생했다(아관파천). 이때부터는 엄씨가 실질적 중전이었다. 아관파천을 통해 고종이 일본군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데 기여하고, 아관 내에서 고독한 몸이 된 고종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면서 위상이 급속도로 높아진 것이다. 이때 나이가 마흔 셋이었다. 

임금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엄씨는 아들 이은(영친왕)을 낳게 되고 이 공로로 후궁에 책봉됐다. 친왕(親王)이란 호칭이 나온 것은, 대한제국 때는 왕자를 대군이나 군이 아닌 친왕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중전이나 다름없는 후궁의 아들로 태어난 까닭에 이은의 위상은 대단히 높았다. 일곱째 아들이었지만, 실제로는 둘째아들과 다름없었다. 명성황후가 낳은 순종에 다음가는 위상을 누렸던 것이다.

그래서 1907년 7월 19일, 이복형 순종이 고종의 권력 이양을 받아 황제가 되자, 이은은 19일 뒤인 8월 7일 순종의 후계자인 황태자에 책봉됐다. 1907년 8월 7일자 <순종실록>에 지적된 것처럼 순종이 35세밖에 안 됐고 또 이은이 순종의 아들이 아닌데도, 이은이 순종의 황태자가 되는 예외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엄귀비의 영향력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이때 엄귀비는 54세였다. 

영친왕(왼쪽)과 순종 황제. 2012년 덕수궁 공사현장의 벽면에 전시돼 있었던 사진.
 영친왕(왼쪽)과 순종 황제. 2012년 덕수궁 공사현장의 벽면에 전시돼 있었던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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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의 그늘에 가려 살다가 마흔 셋부터 숨통이 트이기 시작한 엄귀비로서는 자기 아들이 황태자가 됐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을 것이다. 자기를 닮은 사람이 차기 황제가 될 거라는 기대감에 하늘을 날 듯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잠시였다. 4개월도 안 지난 그 해 12월 5일, 열한 살짜리 아들 이은은 일본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명분은 유학이었지만, 실질은 인질 생활이었다. 당시 이은은 명성황후 가문의 처녀인 동갑내기 민갑완과 약혼한 상태였다. 인질로 끌려가면서 그 약혼은 깨지고 말았다. 아들의 약혼이 깨지고 아들이 인질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엄귀비의 심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엄귀비와 고종은 아들의 일본행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보낼 수 없다고 강하게 저항했다. 그러자 일본은 엄귀비 부부를 안심시킬 목적으로 메이지 일왕의 명의로 신변 보장까지 약속했다. 전 총리이자 현 조선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이은의 스승인 태자대사에 임명해줌으로써 믿음을 심어주고자 했다.

1924년부터 조선일보 기자를 지내고 1950년부터 영친왕과 교류한 김을한의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에 따르면 일본은 '태자의 신변을 절대로 보장할 테니 안심하고 보내라'는 맹세까지 했다. 그러면서 태자대사 이토 히로부미의 바로 밑에 태자소사 이완용을 임명했다.

순종 황제를 15년간 보좌한 곤도 시로스케의 <대한제국 황실비사>에 따르면, 이토 히로부미는 엄귀비에게 1년에 한 번은 모자상봉을 시켜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토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1909년 하반기,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역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때 엄귀비의 심경은 복합적이었을 것이다. 민족적 심정으로는 통쾌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 심정으로는 괴로웠을 것이다. 모자상봉을 약속한 장본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로 1910년 8월 조선은 국권을 잃었고, 영친왕은 대한제국 황태자에서 이왕실 세자로 격하됐다. 이때 엄귀비는 57세였다.

도시락 먹다 눈물 흘리는 아들 모습에 그만...

이토 히로부미 저격 장면. 서울 남산의 안중근기념관 마당에서 찍은 사진.
 이토 히로부미 저격 장면. 서울 남산의 안중근기념관 마당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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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 상실 뒤에 엄귀비는 데라우치 총독을 상대로 이토 히로부미의 약속을 누차 상기시켰다. 만나게 해주지 않는 이유가 무어냐고 따진 것이다. <대한제국 황실비사>에 따르면 데라우치가 귀찮아 할 정도로 엄귀비는 물고 늘어졌다. 심지어는 말다툼도 있었다. 덕수궁에서 벌어진 이 다툼을 <대한제국 황실비사>를 근거로 대화 내용 형식으로 구성했다. 아래의 지문과 대화는 이 책에 근거한 것이다.

데라우치: 요즘 왕세자님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학업도 순조롭고요. 조만간 홋카이도 여행도 다녀오실 겁니다. 

엄귀비: 각하, 그렇다면 세자를 왜 귀국시키지 않습니까? 예전에 이토 히로부미 공작님께서는 세자를 1년에 한번은 귀국시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총독은 이걸 모르시는 건가요? 아니면 알면서도 실행하시지 않는 건가요? 부모자식의 정은 누구나 다 같을 겁니다.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 주세요. 너무 무정한 처사가 아닌가요?

데라우치: (담배를 피우다가 갑자기 화난 얼굴로) 그건 오해입니다! 왕세자를 귀국시키지 않는 것은 중요한 학업 때문입니다. 언젠간 학업이 끝나면 반드시 귀국하실 겁니다. 좀더 기다려보세요.

엄귀비: (쏘아보며) 홋카이도 여행을 다녀올 시간이 있다면 조선에 못 올 이유가 있습니까? 부디 귀국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이토 공작님의 약속을 생각해서라도요. 그리고 인정을 봐서라도요.

데라우치: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의자를 박차고 나간다.)

이 일이 있은 뒤에도 엄귀비는 계속해서 데라우치를 괴롭혔다. 견디다 못한 총독부가 생각해낸 방법은 영친왕의 일상을 엄귀비한테 직접 보여주는 것이었다. 동영상을 찍어 보여주자는 아이디어를 짜낸 것이다. 영친왕을 귀국시킬 마음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때가 1911년 7월 17일경이었다. 엄귀비는 58세였다. 

동영상으로라도 아들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엄귀비는 잠시 기뻤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동영상 앞에 앉았겠지만, 이내 가슴이 찢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동영상에 슬픈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친왕의 약혼녀 민갑완의 회고록인 <백년 한>에 따르면, 동영상은 영친왕의 하루 일과에 대한 것이었다. 열다섯 살 된 영친왕이 아침에 기상하고 집안을 청소하고 학교에 가고 군사훈련을 받는 장면이었다. 그중에 영친왕이 훌쩍이는 장면이 있었다. 군사훈련 중에 도시락을 먹다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이 지나가자 엄귀비는 "저 장면 다시 보여줘요"라며 "아니, 세상에 우리 태자님이 저게 웬말이야?"라며 그 장면을 반복해 시청했다. 일본은 고약했다. 하필이면 그런 장면을 골라 아이의 엄마한테 보여줬던 것이다.

이국땅으로 끌려간 아들이 도시락 먹으며 우는 장면을 엄귀비는 반복해서 시청했다. 결국 그 때문에 울음을 터뜨리고, 자리에 몸져눕고 말았다. 그렇게 3일간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숨이 멎고 말았다. 1911년 7월 20일이었다. 오매불망 아들만 기다리던 엄마는 그렇게 아들 얼굴도 못 본 채 눈을 감고 말았다. 

엄귀비가 숨진 뒤에야 영친왕은 일시 귀국할 수 있었다. 1907년 12월의 이별이 두 모자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만 것이다. 일본이 보여준 문제의 동영상은 이렇게 조선왕실의 두 모자한테 가슴을 찢는 상처를 안겨주었다.


태그:#엄귀비, #영친왕, #엄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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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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