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e-sports의 역사를 얘기할 때 블리자드의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스타크래프트>는 절대 빼놓을 수 없다. 그 자체가 곧 한국 e-sports의 상징이었던 이 컴퓨터 게임은, 테란·저그·프로토스라는 세 종족 간의 우주전쟁을 모니터 안으로 옮겼다. 1998년 출시된 이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1999년부터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스타리그)가 출범했다.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생기고, 게임 플레이를 '스포츠'의 개념으로 확장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온게임넷과 MBC게임이라는 두 채널에 의해 황금기를 맞았던 스타리그는 한때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을 뒤덮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2012년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끝을 맺었으나, 이후 비공식 리그는 산발적으로 지속되었다. 2016년 아프리카TV가 의욕적으로 참여하여 ASL(아프리카TV 스타리그)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편집자말]

ⓒ 고동완


5월의 마지막 날.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술잔을 기울이다 <스타크래프트>로 주제가 옮겨가더니 '이영한' 얘기가 나왔다.

"이영한 누군지 기억나?"
"프로토스 유저 아닌가요? 대한항공 스타리그에서 봤던 이름 같은데…."
"저그야 저그, 이번에 결승전 올라가서 이영호하고 맞붙어!"

스타리그를 열중해서 본 건 2012년 온게임넷 티빙 스타리그가 마지막이었다. 스타리그가 스타2로 전환을 앞둔 시점이었다. 이영호는 일찌감치 2010년 대한항공 스타리그 시즌2와 빅파일 MSL 우승 등 양대 리그에서 절대 강자였기 때문에 5년이 지났어도 그 이름이 잊힐 리 만무했다. 반대로 이영한은 생소했다. 대한항공 시즌1에서 경기했던 게 기억이 나서 얼굴은 떠올렸지만, 선수의 외관이라 할 수 있는 종족을 엉뚱하게 짚고 말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긴 했어도 여전히 리그의 결승선에 온다는 것, 그것도 이영호와 승부를 겨루게 된다는 건 보통 실력이 아님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이영한이 이영호와 결승전에서 맞붙는다기에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돌아보건대 과거에 빛이 바래던 선수도 결승전에서 이영호와 매치를 한다는 것만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던 순간이 있었다. 설령 패해도 마지막 순간에 이영호와 대결했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고, 이긴다면 이영호를 최종전에서 물리쳤다는 족적을 남기는 것이었다. 대한항공 시즌1에서 이영호와 맞붙어 결승전의 승리를 거머쥔 김정우 선수가 그랬다.

2000년 이후로 첫 결승전 '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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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은 내 궁금증을 풀어줄 말을 이어갔다. 이영한이 결승선에 오는데 순탄한 게 없었다고 했다. 그동안 두 자녀를 책임져야 하는 아빠가 됐지만, 이혼을 겪은 데다 생계도 넉넉하지 않아 옵저버 일을 해왔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자니 굳센 투지로 결승선에 오른 게 아닌가 싶었다. 이영한이 이번 결승에서 이영호 같은 승자 위주로 각인된 내 기억을 조정해주길 바랐다.

'결승전'이라니, 문득 돌아보니 결승전에 선뜻 가질 못했다. 어렸을 땐 지방에 있었고 스타리그가 스타2로 전환된 뒤에는 시선이 가질 않았다. 스타1로 리그가 부흥하던 시기엔 고등학생, 재수 시절과 겹쳤다. 이후 결승전이 개최되어도 일이 바쁘단 핑계로, 또 군대 문제로 보러 갈 수 없었다. 스타리그를 봐온 세월이 짧지만은 않았기에 결승전 한번 못 가본 것이 못내 아쉬웠다.

스타리그를 보기 시작한 건 2000년, 초등학생 1학년이었다. 마침 케이블TV가 집에 들어왔고 온게임넷이 막 개국한 시점이었다. 스타는 98년 말부터 안방을 파고들었다. 스타리그에 집중하지 않곤 못 배겼다. 2000년 프리챌배부터 SKY배, 코카콜라배를 지나오며 스타리그는 내 유년 시절의 일부가 됐다. 약체로 평가받던 테란이 임요한의 혜성 같은 등장으로 판을 뒤흔들고 홍진호가 만년 2인자에 머물던 광경을 보며 자랐다. 술잔에서 오간 잠깐의 스타 얘기가 이때를 다시 추억하게 했다.

진동이 전해지던 결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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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전 장소와 날짜를 찾아보니 6월 4일 일요일, 어린이대공원 숲속의 무대였다. 재미가 덜하다고 치부되는 동종 경기도 아니고 테란 대 저그 전이었다. 내심 이영호도 볼 겸, 이영한을 힘껏 응원해주기로 하고 대공원에 갔다.

오후 3시쯤 입장권을 받았다. 입장은 번호표 순으로 선착순이었다. 받은 번호는 1344번. 8천석 규모였으니 초반대에 이름을 올린 셈이었다. 12시부터 입장권을 발부했지만 3시가 됐는데도 2천 번을 넘지 못한 걸 보고 호응이 예전만 못한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기우였다. 경기가 열리는 숲속의 무대에 들어서자 전방엔 사람들로 가득했다. 8천 석이 가득 찼다. 외국인도 눈에 자주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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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서 결승전을 보려고 빈자리를 찾아 앞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다 찾은 자리가 맨 앞줄의 두 번째 줄이었다. 공교롭게 이영한의 응원석이었다. 미약하지만 한 사람의 응원이라도 보태란 신호였던가. 응원의 열기는 이영호의 홈그라운드를 방불케 했다. 이영한은 경기 시작 전, 당당함을 내비치며 응원의 장벽을 뚫어보려 했다. 이영한을 응원하는 관객도 많았지만, 이영호의 팬심을 넘기는 역부족이었다. 무대 스피커에서 방출되는 소리의 진동은 결승전의 분위기를 달궜다. 저글링이 테란의 유닛을 타격하면서 소리가 날 때마다 그 진동이 관객에게 전해졌다.

경기에서 이영호의 전략은 명확했다. 적에게 틈새를 용인하지 않고 촘촘하게 방어하다가 힘을 축적한 뒤 공격 태세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이영한은 초반에 승기를 잡는가 싶어도 이영호의 방어망을 뚫지 못하고 겉돌다 테란의 축적된 펀치에 맥을 못 추고 말았다. 이런 패턴이 첫 경기뿐 아니라 연거푸 반복되면서 2대0 스코어가 완성됐을 땐 이영호가 3경기마저 손쉽게 가져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쉬움 컸던 이영한, 뒤풀이서 팬들과 어우러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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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경기 역시 초반 이영한이 나쁘지 않았다. 다만 전 경기처럼 이영한은 본진과 멀티의 방어를 튼튼하게 갖추질 않은 상태에서 테란을 몰아붙이는 데 노력을 기울이다 퇴색이 짙어지더니 일거에 밀리는 양상을 보였다. 이영호처럼 기지에다 방비를 철저히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3경기도 이영호 손에 넘어가면서 3대0이라는 다소 허무한 스코어로 결승전이 끝났다.

이영한이 GG(패배에 승복하고 게임을 끝낸다는 표현)를 치자 내 옆에 있던, 이영한과 가까워 보이는 사람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숙연해졌다. 경기를 마치고 단상에 나온 이영한의 눈가는 촉촉했다. 입대를 앞둔다던데 2년간의 공백을 생각하더라도 아쉬움이 클 것이다. 비록 이영한이 좋은 성과를 내진 못했지만 내 기억은 분명하게 조정됐다. 임요환, 홍진호 '임진록'과 이영호, 이제동 '리쌍' 못지않게 첫 직관 선수, 이영한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이어진 뒤풀이 자리에서 이영한 선수는 미소로 팬들의 사인과 촬영 요구에 일일이 응대하며 한데 어우러졌다. 팬들도 추억을 공유했다. 장소엔 10대는 물론, 20대와 30대, 40대도 보였다. OSL(온게임넷 스타리그), MSL(MBC게임 스타리그)로 대변되던 양대 리그는 종적을 완전히 감췄지만, 스타리그는 명맥을 이어갔고 이에 얽힌 우리 추억도 사라지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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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름을 해소할 생수 같은 기자가 되겠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겠습니다. 스스로를 물어보겠습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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