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와 야수>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미녀와 야수> 버전은 여럿이다. 현재 상영 중인 <미녀와 야수>는 1991년 개봉된 동명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원작이다. 디즈니 작품은 동명의 동화를 실사한 것이고, 그 동화는 소설을 개작한 것이다. 1740년 프랑스 작가 마담 드 빌뇌브가 쓴 소설 <젊은 미국여인과 해양이야기>를 1756년 영국 작가 잔 마리 르프랭스 드 보몽이 동화로 요약한 것이다. 1946년 장 콕토 감독의 최초 실사영화와 2014년 오리지널 원작의 실사화까지 더하면 '미녀와 야수'는 300여 년간 각색을 거듭한 셈이다.

2017년 디즈니 실사 버전 <미녀와 야수>는 지난 11일 현재 성황리에 박스오피스 1위를 석권하고 있다. 탄핵 인용을 거쳐 대선을 한 달 앞둔 촛불 민심조차 외면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뭐 특별한 판타지 로맨스라도 되는가. 매체마다 연일 띄우는 두 대통령 후보의 양자구도 여부 뉴스에서 눈을 돌려 <미녀와 야수>를 뜯어본다.

영화의 초기 화면은 여주인공 벨(엠마 왓슨 분)의 동선을 따르면서 개성을 짚어 보여준다. 혼자 노는 "괴짜" "책벌레"에다 "너무 똑똑한" "최고 미인"이라는 설정이다. 미지의 세계를 꿈꾸며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바를 행하는 남다름. 그 남다름이 은근한 관심과 시샘을 유도하면서 독보적 주목을 이끈다는 암시다.

벨의 캐릭터성

 <미녀와 야수>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현실 너머를 응시하는 상상력은 미래를 시뮬레이션하는 모험적 특성이므로 판타지 로맨스 여주인공 벨에게는 필수적이다. 자유분방하게 현실 탈출을 꿈꾸는 벨은 엠마 왓슨의 당당한 페미니스트 이미지에 걸맞고, 혼밥이 대세가 된 세상 풍경에도 어울린다.

벨과 보조를 맞추며 등장해 부각되는 인물이 개스톤(루크 에반스 분)이다. 벨이 대놓고 거부할수록 투지를 살려 구애하는 개스톤은 마초면서 양성애자이다. 마을 여자들이 환호하는 세속적 능력과 능글스런 거칢, 그리고 잘 생긴 외모를 갖춘 나쁜 남자면서 디즈니 최초 게이로 등장한 르푸(조시 게드 분)와 단짝이다.

실제 루크 에번스는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인데, 여자 친구를 사귄 경력이 있어 양성애자로 알려져 있다. 어쨌거나 권세 있고 인기 많은 개스톤을 통해 성적소수자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시도는, 다름이 틀림은 아니라는 메시지 전달에 기여해 인권 평등의 지평을 확장하는 진보성이다.

벨의 아버지가 들어선 야수의 성은 판타지 자체다. 아무도 안 보이는데 여기저기 살아 움직인다. 디즈니 표 CG가 돋보인다. 가재도구로 변한 시종들의 왁자지껄함이 관객의 흥을 돋운다. 그 활기 속에서 아버지 대신 죄수가 된 벨은 야수(댄 스티븐스 분)와 책 읽기를 공통분모로 하여 가까워진다.

막연한 호기심이나 성적 끌림이 아니라 말이 통하는 반가움으로 다져지는 이성애는, 벨에 대해 "너무 똑똑한"이라는 성차별적 평가가 불필요한 양성평등의식을 전제한다. 성적 매력 어필에 급급해 '나'를 놓치는 마을 여자들과 정복욕에 불타는 자기중심적 개스톤에게는 낯선 방식이다.

거기에다 야수와 벨은 역지사지하는 마음 씀을 얹어 "예전에는 없는 무언가가 생겼다"를 흩뿌린다. 야수가 늑대의 공격으로부터 벨을 구해줌이 벨의 마음을 열게 한 계기라면, 벨이 죽은 엄마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게끔 도와주거나 위기에 처한 아버지에게 돌아가도록 허용한 배려심은, 벨이 위험을 무릅쓰고 야수에게 달려가 결국 저주의 마법을 풀게 하는 촉매제로 작용한다. 기껍게 쌍방향으로 흐르며 난국을 타개하는 로맨스야말로 판타지 자체이다.

아쉬운 면 분명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판타지 로맨스에 구태로 보이는 장면들이 끼어든다. 평생 딸을 보호하려고 애썼다며 공치사하는 아버지 관련이다. 딸(여성)은 보살핌의 대상이라는 견해는 여성을 완전한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아버지가 없으면 빌어먹는 여자처럼 된다며 벨을 위협하면서 구슬리는 개스톤의 의식과 닮은꼴이다.

벨이 아버지 대신 선뜻 성의 죄수가 되거나, 아버지를 구하려 사랑하는 야수를 떠나거나, 야수에게 돌아가기 전에 아버지의 동의를 구하는 장면들은 그 의식에 길든 효심이다. 그것은 아버지에게서 신랑에게로 인계되어 자기를 보호해주는 사람을 갈아타는 결혼식장의 풍경이 신랑·신부가 함께 입장하는 모습으로 변화하는 요즘 추세를 거스른다.

 <미녀와 야수>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마을 사람들을 선동해 야수를 잡겠다고 성으로 달려간 개스톤은 죽고, 마지막 장미꽃잎과 함께 떨어진 야수의 생명은 벨의 사랑 고백으로 되살아난다. 그 뻔한 해피엔딩을 노란 드레스를 입은 무도회로 마무리한 <미녀와 야수>에 관객들이 쇄도함은 긍정할 만한 옛이야기의 고전적 가치, 즉 보편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리라.

영화는 왕자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거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는 성장 배경을 귀띔함으로써 야수성이 양육 태도와 같은 환경 요인에 의해 촉발되는 잠재요인임을 일깨운다. 누구든 야수가 될 소지가 있으므로 평소 내면세계를 부단히 다스려야 한다는 통찰이다.

또한, 왕자가 야수가 되자 왕궁과 신민, 그리고 영토까지 덩달아 황폐해짐을 통해 지도자 역량의 중요성과 파급력을 넌지시 짚어준다. 대통령 탄핵 인용을 경험하며 국가 단위의 엄청난 트라우마와 경제적 손실을 본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마지막에 야수를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사랑은, 벨처럼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고 드라마틱한 상황에 직면하게 하는 조건 없는 선한 의지를 대표한다. 탄핵 인용을 일구고 대선 국면을 맞게 한 촛불 시민(들)의 결집 역시 그러한 사랑에 바탕을 둔다.

결국 판타지 로맨스 <미녀와 야수>의 흥행 성공은 팍팍한 현실을 타개하고픈 대중의 욕구에 기인한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투수는 그 화면에 있지 않다. 외부 자극과 맞물려 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줄탁동시처럼, 우리의 구원투수는 때맞춰 껍질을 두들기는 우리 자신이다.

미녀와 야수 엠마 왓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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