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1일 새벽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운명을 KBS <김과장> 제작진들은 예측이라도 했던 것일까. 30일 종영한 <김과장>은 축제의 현장이었다. 정의는 승리했고, 악당(박현도)은 구속되어 갇혔다. 세상을 괴롭힌 악당이 벌을 받는 권선징악은 최근 방영한 한국 드라마들이 보여준 전형적인 엔딩이다. 하지만 드라마가 끝난 후, 현실의 박현도(?)까지 구속되니 <김과장>의 해피엔딩이 더욱 묘하게 다가온다. 드라마를 통해 느끼는 대리만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원했던 결말이 현실에서도 재확인되는 쾌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짜릿하다.

 지난 30일 종영한 KBS <김과장> 한 장면

지난 30일 종영한 KBS <김과장> 한 장면 ⓒ KBS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김과장>은 대한민국 국민 상당수를 각성하게 했던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이후 시대정신을 가장 강력하게 반영한 드라마였다. <김과장>의 주인공 김성룡(남궁민 분)은 정의로움으로 똘똘 뭉친 전형적인 영웅상과 심히 거리가 멀어 보였다. 뒤늦게 개과천선한 서율(이준호 분) 또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물불 안 가리는 악당에 가까웠다.

오직 자기 자신밖에 모르던 인물들이 드라마틱한 변화를 맞게된 것은 박현도(박영규 분)로 대표되는 악의 축들의 거듭된 악행에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이다. 자신들 선에서 적당히 눈 감아 줄 수도 있었다. 불의와 적당히 타협했다면 김성룡은 삥땅을 통해 자신이 원하던 대로 덴마크로 건너가 여유롭게 살 수 있었다. 서율 또한 TQ그룹에서 더 중요한 요직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도덕적인 양심을 택했고 자신들이 바랐던 대로 사회적인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박현도와 같은 괴물이 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드라마 속에서 끝난 '정의구현'이 아니다

김성룡, 서율, 그리고 TQ그룹의 양심적인 직원들이 합작하여 일구어낸 유쾌한 반란은 몇 달 전만 해도 드라마에서만 가능한 판타지였다. 현실에서는 도통 일어날 수 없는 대리만족을 안겨주는 차원에서, 지금과 같이 <김과장>을 둘러싼 인기는 참 좋았겠지만 드라마가 끝난 이후 몰려드는 씁쓸함과 공허함은 더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김과장>이 보여준 유쾌한 행보가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 박근혜를 비롯한 국정농단 책임자들의 연이은 법정구속과 그 궤를 함께함에 따라 주인공들이 정의 구현에 앞장서는 <김과장>의 스토리 또한 더 큰 탄력을 받게 된다.

뒤늦게 정의의 사도의 길로 들어선 <김과장>의 주인공들이 항상 꽃길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TQ그룹에 만연한 비리의 뿌리는 단단했고, 일개 사원들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악당들의 반격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주인공들에게 찾아온 위기의 순간도 종종 있었다. 그럼에도 <김과장>은 시청자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고구마를 마구 먹이진 않았다. 대신 시원한 사이다를 권했다.

 지난 30일 종영한 KBS <김과장> 한 장면

지난 30일 종영한 KBS <김과장> 한 장면 ⓒ KBS


혹자는 지나치게 발랄함을 강조한 나머지, 자칫 유치하고 애들 장난처럼 보이는 <김과장>의 스토리에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극적 긴장감을 유도한다는 명분 하에, 주인공을 계속 궁지에 몰아가지 않더라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해준 <김과장>의 성공신화는 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 이후 터져나올 '사회정의구현'류의 드라마들이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게 한다.

이제 시청자들은 주인공들에게 끊임없이 시련을 부여하는 스토리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지난주 종영한 SBS <피고인>은 비록 시청자들에게 계속 고구마를 먹이는 답답한 극적 설정들을 이어갔지만 시청자들이 기꺼이 고구마를 먹어주는 것도 정도가 있다. 부정부패가 만연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몇몇 정의로운 의인들이 절대 권력으로 똘똘 뭉친 악인들을 처단하는 과정은 쉽진 않다. 하지만 오히려 위기에 놓인 주인공들이 적절한 선에서 반격을 시도하고, 그에 따른 성공으로 소소한 즐거움을 안겨주었던 <김과장>이 속 시원하게 다가온 이유에는 그동안 시청자들을 힘들게 했던 소위 '고구마 드라마'에 대한 반감도 한 몫했을 것이다.

 지난 30일 종영한 KBS 드라마 <김과장> 한 장면

지난 30일 종영한 KBS 드라마 <김과장> 한 장면 ⓒ KBS


박현도의 구속으로 TQ그룹의 구성원들을 괴롭힌 상황들이 어느 정도 일단락됐던 <김과장>처럼,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던 대한민국 또한 박근혜 구속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하지만 박근혜 구속은 끝이 아니라,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한 또 다른 시작이다. 박현도 구속으로 정의를 되찾은 TQ그룹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룬 성취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자신이 힘들게 이룩한 업적을 과시하며 그 공로를 인정받으려는 대신, 조용히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간 김성룡의 모습은 그래서 그 어떤 드라마의 해피엔딩보다 더 잔잔하고 깊은 여운을 남긴다.

쉽게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싸워준 현실의 김성룡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쾌거. 지난 20회 동안 국민의 답답한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시원한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애쓴 <김과장> 제작진과 배우들. 드라마 속 김과장처럼 부정과 불합리에 맞서며 무너져가는 대한민국을 바로 살리기 위해 애쓴 민주시민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은 3월의 마지막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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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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