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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 없는 바른 말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던 한용이는 재수 없는 놈이었다. '꾸준히 복습하고 수업에 앞서 예습하면 학원에 가지 않아도 성적을 올릴 수 있다'는 주장에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바른 말 하는 그에게 누구도 토달지 못했다. 고3 봄, 어떻게 하면 모의고사 점수를 올려볼까 고민하며 질문했던 뒷자리 녀석들은 이내 다시 책상에 얼굴을 붙이고 잠이 들었다. 나지막이 '재수 없는 새끼...'를 읊조리며 말이다. 착실한 모범생이었던 한용이는 대입원서에 한 줄 추가하길 바랐던 반장이 되지 못했다.

적의 총탄에 부모를 잃은 가련한 대통령의 영애를 공격하는 모습은 참을 수 없었다. 그녀가 독재자에게 은마아파트 30여 채 가격의 비자금을 받은 것은 잘못한 일이었다. 정수장학회나 육영재단 등 조목조목 따지고 드는 상대 후보가 틀린 말 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상대 후보를 인정하는 것은 젊음을 바쳐 근대화에 앞장섰던 찬란한 70년대의 경제개발과 산업화를 통째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사생활이나 정견, 식견 등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바쁜 벌꿀, 이산화 가스, 산소 가스, 지하경제 활성화 같은 주옥같은 언변으로도 그녀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집에서 쿠키나 굽고 차 마시는 대신 경력을 택했다"는 한 마디로 모든 전업주부들에게 미운털이 박힌 힐러리 클린턴은 바람난 남편을 감싸 안고 폭넓은 의정 및 행정부 활동을 벌여왔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졌다. 수많은 유명인들과 오피니언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바뀌지 않았다. 진보적 정책을 내세우면 샌더스를 의식해서라고 수군거렸고 트럼프를 비판하면 월가의 슈퍼팩Super pac, 미국의 억만장자들로 이뤄진 민간 정치자금 단체를 더 받은 건 그녀라고 조롱했다. 트럼프의 세금 탈루 혐의가 절세의 묘법이 되었던 그 때, 힐러리의 조리 있고 똑부러지는 바른 말들은 그녀를 토론의 승자로 만들었을지언정 선거의 승자로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정치적 올바름, 바른말들,트럼프는 속시원히 긁어냈다
 정치적 올바름, 바른말들,트럼프는 속시원히 긁어냈다
ⓒ 참여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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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의 똑부러지는 바른 말들은 선거의 승자로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왜?
 힐러리의 똑부러지는 바른 말들은 선거의 승자로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왜?
ⓒ 참여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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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이 되어버린 올바름

단어는 필요에 의해 생긴다. 강남 좌파, 패션 좌파, 리무진 좌파, 샴페인 사회주의자. 리버럴(함)Liberal, 자유주의 또는 진보주의를 지칭하는 유사한 단어들이 여럿 생겼다. 그들은 성정체성의 다름을 인정하고 석유산업을 힐난하며 허머 자동차를 비웃고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는데다가 종교적이라는 이유로 백화점 크리스마스 캐럴 금지에 동참한다. 그러나 틀린 것 없는 그들의 주장은 때로 훈계처럼 들린다. 청교도를 바탕으로 미국은 성장했다. 지금도 대통령은 성경에 손을 올리고 취임선서를 할 뿐아니라, HBO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뉴스룸> 오프닝 대사가 사실이라면 '천사를 믿는 성인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몇몇 도시는 무슬림의 항의로 달력에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표시를 달력에서 지우고 대형 백화점에는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수백 년 간 지내온 명절을 올바르지 않다고 표현 못하게 하는 저 지점. 아니꼬워도 따랐던 사람들은 충분한 설득과 논의를 거치지 못한 채 올바르다는 이유로 강요당한다. 뿐만 아니라 리버럴(함)을 주장하는 이들은 때로 위선적이기도 하다. 수십 개의 방이 딸린 대저택에 살면서 지구 온난화를 그렇게나 걱정하는 앨 고어가 그렇고, 여성 유리천장 운운하더니 미성년자 강간범 변호를 위해 '12세(여아) 피해자가 섹스를 즐겼기 때문에 강간이 아니다'라고 변호한 걸 인터뷰한 녹음파일이 드러나 곤욕을 치렀던 힐러리가 그렇다(변호사는 그 어떤 피의자라 할지라도 변호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걸 자랑하는 건 다른 문제다). 정치적 올바름을 신념이 아니라 과시나 외연의 확장으로 사용할 때 생기는 문제다.

바른말의 불편함을 긁어낸 트럼프

이 간극에 트럼프가 들어와 앉았다. 아니꼬워도 바른말이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던 불편함을 트럼프는 속시원히 긁어냈다. 힐러리와 민주당의 말 중에 틀린 것은 없었다. 트럼프는 세금을 탈루했고 여러 번 파산했으며 그럼에도 자신의 자산은 보전했다. 성추문도 있고 인종적 편견도 갖고 있으며 무엇보다 정직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트럼프를 찍지 않으면 불편해지고 속마음을 부정당하는 자신이 싫었기 때문이다.

노동력을 착취하는 대기업에 맞서기보다 이민자들에게 화풀이하는 게 심리적 위안이 빠르다. 나와 다른 성정체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혐오하는 게 쉽다.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크리스마스 분위기의 흥을 깨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으며 피부색이 다른 사람을 힘들게 배려하기 싫다. 이러한 이기심에 트럼프는 똬리를 틀고 바른말 하지만 재수 없는 기존의 정치인들의 대안이 되었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벌고 더 똑똑하고 더 올바르다고 하는 이들의 태도가 차악을 선택해야 했던 이번 대선에서 최악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트럼프의 탄핵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우리의 태도를 먼저 반성해야 한다. 대통령만 놓고 보자면 미국보다 우리가 먼저 혐오의 늪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걸맞은 정부

1811년 조셉 드 메스트로(Joseph de Maistre)라는 프랑스 정통 보수주의자가 '왕정이나 민주주의나 국가가 생기면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고 한 말을 최근 유시민 작가가 '모든 국민은 그에 걸맞는 정부를 갖는다'고 인용해 화제가 되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우리의 대통령은 우리의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부정하고 싶지만 다른 상대에 대해 내가 어떠한 태도를 보였는가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만든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조금만 이견이 있어도 여혐, 남혐으로 몰아가고 젊은 세대에게 아픔을 강요하고 늙은 세대를 '틀딱틀니를 부딪치는 소리를 희화화한 것으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노인층을 이르는 말'으로 낮춰 부르는 갈등은 광화문에 나가 목소리라도 낼 수 있는 지금을 그리워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세대와 성별로 깊어진 갈등은 외국인노동자와 노약자들에게 번져갈 것이고 결국 당신에게 옮겨갈 것이다.

트럼프는 결국 탄핵될 것이다. 우리가 가장 최근에 뽑았던 대통령의 말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올바른 세상을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올바른 식견과 주장에 앞서 이견을 가진 상대를 대하는 태도이다. 뉴욕은 2월 중순인데 봄날 같다. 이민자인 나의 마음은 아직 겨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차양현님은 칼럼니스트입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트럼프, #미국대선 ,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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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가 1995년부터 발행한 시민사회 정론지입니다. 올바른 시민사회 여론 형성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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