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속 장거리의 간판' 이승훈(대한항공)이 한국 선수 최초로 동계 아시안게임 4관왕이라는 새 역사를 썼다. 이승훈은 23일 오후 일본 오비히로 오벌에서 열린 2017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남자 매스스타트에서 우승을 차지해 이번 대회에 출전한 4개 종목을 석권했다. 역사상 유례없는 이승훈의 행보는 한국 빙속사의 새 역사로 남게 됐다.
 이승훈의 레이스 모습

이승훈의 레이스 모습 ⓒ 박영진


부상도 막지 못한 이승훈의 4관왕

이승훈은 이번 대회 전망이 그리 좋진 못했다. 2주 전 강릉에서 열렸던 2017 국제빙상연맹(ISU) 스피드스케이팅 종목별 세계선수권 대회 남자 팀추월 경기 도중 넘어져 정강이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여덟 바늘을 꿰매야 했고 아시안게임에 대한 전망이 어두웠다. 그러나 출전을 강행한 이승훈은 세계선수권에서의 한을 토해내듯 매 경기마다 놀라운 모습을 보여줬다.

첫 경기 5000m에서 아시아 신기록이자 2011년에 이어 대회 2연패를 달성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10000m에서도 우승을 차지해 역시 대회 2연패는 물론 2관왕에 올랐다. 부상을 입었음에도 이승훈의 10000m 랩타임은 일정했다. 10바퀴, 20바퀴, 그리고 마지막 5바퀴마다 조금씩 기록을 당겨나갔고 막판 스퍼트까지 더했다.

그리고 10000m에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후배 김민석(평촌고), 주형준(동두천시청)과 함께 팀추월 경기에 나섰다. 400m 트랙을 무려 25바퀴를 돌아야 하는 극한의 체력을 요구하는 경기를 마친 지 얼마 안됐지만 이승훈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후배들을 앞서 이끌며 레이스를 펼쳤고, 앞 조에서 먼저 경기한 일본의 아시아 신기록을 불과 3분 만에 깨고 새로운 아시아 기록으로 3관왕에 올랐다.

그리고 최근 이승훈이 주력하고 있는 매스스타트에서 정점을 찍었다. 후배들이 선두의 일본 선수들을 매섭게 추격하며 거리를 주지 않았고 그 덕분에 이승훈은 막판 스퍼트를 내며 결국 1위에 오를 수 있었다. 매스스타트 역시 대회 2연패이자, 한국 선수 최초로 아시안게임 4관왕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성실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4관왕

이승훈은 국내 대표팀에서 성실하게 훈련에 임하는 선수로 유명하다. 비시즌 기간에는 체력과 쇼트트랙 코너링 훈련을 병행하는 등 강도 높은 훈련을 남몰래 이어가고 있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2010년 이후 줄곧 장거리 스피드스케이팅의 최강자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그는 5000m 은메달, 10000m 금메달로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간판으로 떠올랐다. 불과 10000m를 세 번밖에 타지 않았음에도 올림픽 기록을 내며 금메달을 거머쥔 그였다.

올림픽 직후 2011년 아시안게임에선 3관왕에 오르며 '탈아시아급'임을 재차 확인했다. 그러나 2012년 장비 문제로 인해 슬럼프가 찾아왔다. 이 시기에 이승훈은 팀추월이라는 새로운 종목에 나섰다. 후배들과 호흡을 맞추며 도전한 끝에, 월드컵에서 사상 첫 금메달까지 획득했다. 그리고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선 팀추월 은메달로 후배들과 시상대에 올랐다.

소치 이후 이승훈은 평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매스스타트에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쇼트트랙과 흡사해 한 트랙에서 여러 명이 순위경쟁을 펼치면서 상대방과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추월경쟁이 일어난다.

쇼트트랙 선수 출신으로 탁월한 코너링과 막판 스퍼트를 가진 이승훈에게 매스스타트는 찰떡궁합이었다. 그리고 세계선수권과 월드컵에서 다수의 금메달을 따내며 이젠 매스스타트의 최강자가 됐다.

그리고 이번 아시안게임으로 4관왕이라는 최초의 역사를 써냈다. 그가 갖고 있는 아시안게임 스피드스케이팅 메달만 7개. 종전 안현수(현 빅토르 안, 금5개)의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 카멜레온 같이 다양한 종목을 두루 섭렵한 그는 이젠 한국 빙속의 대들보이자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

선배가 끌고 후배가 미는 한국 빙속

이번 대회에선 이승훈과 함께 김민석이라는 새로운 기대주도 떠올랐다. 김민석은 이승훈을 롤모델로 장거리에서 두각을 내고 있는 신예다. 그는 평창을 앞두고 1500m, 팀추월, 매스스타트 세 종목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1500m는 김민석이 등장하면서 한국 빙속의 새로운 기대종목으로 떠올랐다.

2주 전 종목별 세계선수권에서 김민석은 개인 최고기록을 내며 이 종목 5위에 올랐다. 아시안게임에서 일본 선수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장거리 선수답게 300m, 700m, 1100m, 그리고 마지막까지 고른 기록을 냈다. 팀추월에선 이승훈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중반부에서 선두로 레이스를 이끌었다.

그리고 매스스타트 역시 중반부터 일본 선수들을 바짝 추격하며 틈을 주지 않았고 결국 이승훈이 막판 스퍼트를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 김민석은 3위로 통과해 이승훈과 함께 시상대에 섰다. 신예임에도 대담하게 자신의 레이스를 펼친 김민석은 금메달 2개, 동메달 1개를 수확하며 평창에서의 또 다른 기대주로 떠올랐다.

이렇게 김민석이라는 새로운 얼굴이 떠오르는데도 이승훈이라는 모범 답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롤모델을 보며 성장하는 것은 그만큼 배울 점이나 성장속도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번 대회의 팀추월과 매스스타트가 끝난 직후 이승훈은 김민석에게 다가가 격려하며 후배를 챙기는 모습도 보여줬다. 이승훈은 매스스타트 직후 인터뷰에서 "쇼트트랙처럼 매스스타트도 작전이 중요한데, 후배들이 작전에 잘 따라주고 호흡을 맞춰줬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선배가 끌고 후배가 밀면서 한국 장거리 빙속은 꾸준히 성장해 올 수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이승훈은 "전대미문의 선수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밴쿠버와 소치에 이어 평창에서도 이승훈은 한국 빙속의 얼굴이 될 것이다. 그가 말한 것처럼 한국 빙속사에 다신 없을 전무후무한 선수가 되기 위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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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스피드스케이팅 동계아시안게임 평창동계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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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스포츠와 스포츠외교 분야를 취재하는 박영진입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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