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몬드의 시점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데스몬드를 바라보는 시점으로 끝난다. 변화된 건 영화의 시점만이 아니다. 바뀐 영화적 시점만큼이나 주인공 데스몬드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점 역시 변화했다. 종교적 이유 등 여타 다른 색안경을 모두 걷어내더라도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이 이야기는 실화이고,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만큼 강력한 사람은 없다는 것. 총을 들지 않는다고 그를 비웃던 모두가 떠난 자리에서 데스몬드는 동료들을 떠나지 않고 전쟁에 참여했다. 

 헥소고지 전투 속 데스몬드

헥소고지 전투 속 데스몬드 ⓒ 판씨네마(주)


총 없이 75명을 구한 남자

8년만에 메가폰을 잡은 멜 깁슨의 선택은 2차세계대전 속 실존인물 데스몬드였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였지만 시대적 부름을 거부하지 않고 군입대를 자원하는 데스몬드는 총을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주변의 천대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타인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고 전쟁에 참여해 모두가 후퇴한 곳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킨다. 언제 적군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극도의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서도 '한 명만 더'라는 끈질한 집념을 통해 그는 75명의 부상자를 하룻밤동안 살려낸 마법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감독 멜 깁슨과 주인공 데스몬드의 종교적 배경이 겹쳐 특정 종교를 옹호하는 영화처럼 보일 수 있으나, 영화가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종교인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정작 데스몬드가 총을 들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아버지와 관련된 개인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영화는 비판을 잠재운다. 결국 데스몬드는 전쟁에 참여해 그 누구보다 뛰어나게 국가의 의무와 종교적 의무를 동시에 해냈다.

전쟁을 소재로 한 장르영화이지만 <핵소 고지>는 전투 장면에만 방점을 찍지 않는다. 감독 멜 깁슨은 주인공 데스몬드의 유년기의 삶부터 찬찬히 영화에 담는다. 유년시절 폭력에 대한 트라우마와 사랑을 키우는 과정, 총을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훈련소에서 천대받고 군사법재판에 서게 되는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 2차 세계대전 오키나와 헥소고지 전투에 대한 묘사까지. 2시간 넘는 러닝타임이지만 멜 깁슨은 전혀 지루하지 않게 영화를 이끌어 나간다.

CG를 최대한 자제하고도 극도의 전쟁 리얼리티를 만들어낸 연출도 훌륭하지만, 가족, 폭력, 전쟁, 미국적 가치 등을 곳곳에 녹여낸 감독의 연륜이 돋보인다. 특히나 군법재판에 서게 된 아들 데스몬드를 도와주기 위해 오래된 참전복을 입고 찾아온 아버지와 그가 가져온 편지는 단층적으로 흐를 수 있었던 영화의 주제를 단번에 바꾼다. 뿐만 아니라 헥소 고지 지하벙커에서 부상당한 적군까지 치료하는 데스몬드의 휴머니티는 2시간 동안 고집스럽게 그가 지키고자 했던 신념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데스몬드의 재판에 찾아온 아버지

데스몬드의 재판에 찾아온 아버지 ⓒ 판씨네마(주)


실화임에도 극도의 긴장감

반전없이 흐르는 단층적 플롯은 <헥소 고지>가 가지고 있는 치명적 약점이기도 하다. 모두가 데스몬드가 해낸 영웅적 서사와 결국 그가 모든 것을 극복할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지루할 틈은 없다. 영화는 극도의 긴장감으로 관객을 몰입시킨다. 철저한 고증과 실감나는 전쟁묘사는 물론이고, 다양한 캐릭터로 만들어진 입체적 서브 플롯과 그들의 연기는 전쟁 영화를 찾는 관객들의 요구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주연을 맡은 앤드류 가필드의 연기 역시 왜 젊은 나이에 그가 거장들의 주연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지 말해준다. 무엇보다도 그의 호연은 왜소한 체격에 종교적 소수자로서 군의 가장 밑바닥에 있었던 데스몬드가 어떻게 높은 고지에서 신념을 지킬 수 있었는지 관객들을 설득한다.

연출적 기교와 플롯의 복잡함보다는 뚝심있게 장르적 특성과 주제를 밀어붙인 이번 영화는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6개 부분 노미네이트 되었다. <브레이트 하트>와 <아포칼립토> 등 아카데미와 인연이 깊은 멜 깁슨 감독이기에 이번 영화도 한 두 분야에서의 수상이 점쳐진다. 특히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좋아하는 아카데미 시상식 특성상 <헥소 고지>는 아카데미 입맛에 맞는 영화라 할 수 있다.

멜 깁슨이 가진 여성편력과 종교적 다툼을 뒤로 하고, 이 만큼 뚝심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이 또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의 신작이지만 이번 작품을 통해 멜 깁슨은 계속해서 한 자리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켜야 할 신념을 가지고 같은 자리에 서 있는 데스몬드처럼 말이다.

 총을 잡지 않는 데스몬드

총을 잡지 않는 데스몬드 ⓒ 판씨네마(주)


끈임없이 유동하고 변화했던 건 오히려 데스몬드와 그를 향한 시선일 것이다. 멜 깁슨은 영화를 통해 데스몬드를 향한 잘못된 시선을 하나하나 제자리로 돌려 놓는다. 경멸스런 동료들의 눈빛을 용기에 대한 찬사로 바꿔어 놓는다. 색안경이 걷어지자 영화는 곧곧에 존재하는 우리의 시선까지도 바로잡는다. 진짜 강함이 무엇인지? 참담한 고통이 수반되는 전쟁을 통해 우리가 지키려고 했던 가치는 무엇인지? 한가지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보지 못했던 본질이 있지 않았는지? 데스몬드의 이야기는 2차세게대전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신념과 가치를 지키는 일이 융통성없는 자세로 천대받는 지금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헥소고지 멜 깁슨 앤드류 가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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