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제13차 범국민행동 촛불집회 본집회 무대에 올라 발언 중인 시네마달 김일권 대표.

지난 21일 제13차 범국민행동 촛불집회 본집회 무대에 올라 발언 중인 시네마달 김일권 대표. ⓒ 하성태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때문입니다. 시네마달은 강정마을, 용산참사, 밀양송전탑, 세월호참사 등 사회적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다큐멘터리를 전문적으로 배급하고 있는 조그마한 회사입니다. 저희는 세월호 다큐멘터리를 배급했다는 이유로 청와대로부터 직접 내사 지시가 떨어지고 함께 일하는 직원들의 핸드폰이 사찰되고 국가 기관의 지원사업으로부터 배제되어 블랙리스트로 관리되고 있는 가난한 회사입니다.

저희뿐만 아니라 많은 영화인들과 문화예술계 사람들이 저희와 유사한 피해를 당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 이번 블랙리스트 사건을 통해 하나둘씩 밝혀지고 있습니다.(중략) 그리고 오늘 김기춘 실장과 조윤선 실장이 블랙리스트 때문에 구속되었습니다. 김기춘과 조윤선이 누구입니까.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입니다. 당연히 박근혜 대통령 또한 블랙리스트의 범죄에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내려와야 할 것입니다.

또한 블랙리스트로 문화계를 탄압했던 영화진흥위원회 관계자와 문화예술계 관련 부역자들을 즉각 파면시키고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좌천되고 사퇴당한 양심적 공무원들은 당장 복직되어야 할 것입니다."

좀처럼 무대에, 공개된 자리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 한 영화인이 광화문광장 촛불집회 연단에 올랐다. 딱히 호소어린 목소리나 몸짓은 아니었지만, 또박또박 준비한 원고를 읽는 목소리에 결기가 느껴졌다. 영화 <다이빙벨>의 배급사인 '시네마달'의 김일권 대표가 그 주인공이었다.

김기춘 전 실장이 특별 관리한 '블랙리스트 피해자' 시네마달 

 지난 12월 언론노조가 공개한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 비망록 중 시네마달과 다이빙벨 언급 부분.

지난 12월 언론노조가 공개한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 비망록 중 시네마달과 다이빙벨 언급 부분. ⓒ 전국언론노동조합


블랙리스트를 작성‧관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직권 남용 등의 혐의로 전격 구속됐던 지난 21일, 김일권 대표는 제13차 범국민행동 촛불집회 본집회 무대에 올랐다. 시네마달이 배급한 세월호 관련 다큐 <다이빙벨>은  지난 2014년 광주비엔날레에서 논란을 일으킨 홍성담 화백의 '세월오월'과 함께 김기춘 전 실장이 가장 주목(?)한 작품 중 하나다.

블랙리스트를 세상에 알리고 관련자들의 범죄 혐의를 입증하는 주요 단서가 된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일지에는 '시네마달 내사'라는 내용이 위풍당당(?)하게 등장한다. 그해 <다이빙벨>의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이 끝난 뒤인 10월 22일과 24일자에는 '長(장), 다이빙벨 상영-대관료 등 자금원 추적-실체 폭로', '시네마달 내사-다이빙벨 관련'이란 메모가 등장한다. 

이후 시네마달이 <다이빙벨>을 재개봉하고 <나쁜 나라> <업 사이드 다운> 등 '세월호 다큐'를 연이어 배급하면서 국정원과 검‧경이 시네마달 직원들의 통신자료를 조회한 정황도 드러났다. 털어 봤자 먼지 한 톨 날 것 없는 독립영화 배급사에 세무조사까지 실시했다. 그 사이, 영화진흥위원회(아래 영진위)는 이 기간 시네마달이 배급한 다큐멘터리들을 과거와 달리 개봉 지원작에서 배제했다.

이쯤 되면, 전방위적인 압박이다. 고사 직전인 독립영화의 개봉/배급 상황을 놓고 볼 때, 영화진흥위원회가 공모하는 '다양성 영화 개봉 지원'에서 시네마달이 배급한 영화가 지속적으로 탈락한 상황은 회사 차원에서 큰 타격으로 작용했다. 기간 내 <다이빙벨> 개봉 전후 영진위의 수장은 김세훈 위원장이었다. 최근 구속된 김종덕 전 문화체육부장관의 인맥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김 위원장은 블랙리스트 논란과 함께 영화계로부터 '블랙리스트 부역자'로 지탄과 사퇴 요구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다이빙벨> 개봉 이후 시네마달이 배급한 작품은 '세월호 다큐' 뿐만이 아니었다. 또 소위 사회파 영화뿐만이 아니었다. DIY 방식으로 인공위성을 만들어 우주로 띄우겠다는 아티스트 송호준이 주인공인 <망원동 인공위성>도 있었고, 생태 다큐멘터리라 할 만한 <잡식가족의 딜레마>도 배급했다.

하지만, 독립 다큐멘터리의 특성상 '밀양 투쟁'을 다룬 <밀양 아리랑>이나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그린 <그림자들의 섬> 등 이른바 '사회적 다큐'나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를 다룬 다큐들이 다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 강정을 다룬 <잼 다큐 강정>이나 용산 참사를 기록한 <두 개의 문> 역시 시네마달이 배급한 작품이었다.

2008년부터 배급을 시작한 시네마달이 독립영화 생태계에서 의미 있는 족적을 그려나가는 것은 물론 존재 자체로 독립 다큐들의 배급/개봉에 있어 중차대한 배급사라는데 이견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독립 다큐 전문 배급사가 무려 '왕실장'이라 불렸던 김기춘 전 실장의 관심(?)을 받고,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의 중심에서 사찰과 세무조사, 영진위 지원 배제 등 갖가지 탄압을 당했다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찍히면 죽는다"와 다를 바 없는 '밥줄 끊기'를 박근혜 정부가 단행한 것이다. 

독립영화계가 '시네마달 살리기'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

 시네마달이 배급해 온 대표적 다큐멘터리 영화들. 대부분 정치·사회적인 소재를 다룬 작품이었다.

시네마달이 배급해 온 대표적 다큐멘터리 영화들. 대부분 정치·사회적인 소재를 다룬 작품이었다. ⓒ 시네마달


독립영화 전문 배급사가 하나 둘 고사 직전에 처하고 있는 상황에서, 블랙리스트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시네마달 살리기'에 대한 목소리가 독립영화계를 중심으로 하나 둘 고개를 들고 있다. 김일권 대표가 광화문광장 무대에 선 것도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의 제안으로 이뤄졌다는 후문이다. 

블랙리스트 파문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가던 지난 연말, 시네마달은 도올 김용옥 선생의 중국여행기 <나의 살던 고향>을 배급, 1만 관객을 돌파했다. 김 대표 이하 전 직원들이 발품을 팔면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다.

그러는 사이, 블랙리스트 파문이 박 대통령의 헌정질서 파괴를 입증할 중대한 죄목으로 거론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핵심 인물로 지목된 김기춘 전 실장과 조윤선 장관의 구속으로까지 이어졌다. 이와 더불어 <다이빙벨> 배급 이후 세무조사나 사찰 정황 등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함께 분노했던 독립영화인들 역시 시네마달을 이대로 고사시킬 수 없다는 중론이 모아지고 있는 분위기다.

시네마달의 한 관계자는 <오마이스타>와의 통화에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심각성에 공감한 영화인들 중심으로 '시네마달 지키기 공동 연대'에 대한 움직임이 일어 나고 있다"며 "한국독립영화협회와 시네마달이 배급했던 영화를 연출했던 감독들과 여타 독립영화인들이 공동 주최하는 형식으로 펀딩을 전개해 나갈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시네마달은 2017년 라인업으로 밴드 '더 모노톤즈'의 이야기를 다룬 갈재민 감독의 <인투 더 나잇>과 성미산 마을을 배경으로 한 성장기인 강석필 감독의 <소년, 달리다>, 김태일 주로미 감독의 <올 리브 올리브>, 김정 감독의 음악다큐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를 예정하고 있다.

하지만 앞선 두 작품의 경우, 독립영화계와 각종 영화제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영진위를 포함 개봉 지원을 받지 못했다. 네 작품 모두 정확한 개봉 시기가 불투명한 이유다. 배급과 회사 운영 자금과 관련한 뾰족한 묘수가 없는 상황에서, 일단 이번 설 연휴 이후로 조심스레 계획하고 있는 펀딩의 성공 여부에 따라 이들 작품의 개봉 시기를 확정지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예술은 '다른 사람의 슬픔에 따라 슬퍼하고 다른 사람의 영혼과 융합시키는 감정'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예술은 여기 광화문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고 광화문 광장에 타오른 촛불입니다.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촛불 조명입니다. 바로 촛불, 그 하나하나가 모여 밝히는 조명은 그 어떤 조명보다 아름답고 위대합니다. 그 촛불이 있는 곳에 항상 카메라가 함께할 것입니다"

광장의 촛불시민들을 숙연하게 만든 김 대표의 발언은 영화인으로서 할 수 있는 진정성 있는 호소였다. 특검팀은 블랙리스트가 헌정 질서를 유린하고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한 중범죄로 인식하고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반면 이 영화인들을, 예술인들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 블랙리스트의 책임이 일선 공무원들에게 있다는 '망언'을 전했다. '법기술자'로 알려진 김기춘 전 실장 역시 특검 조사에서 "블랙리스트가 불법인지 몰랐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3일, 문체부 역시 허울뿐인 대국민사과를 발표해 문화예술계의 지탄을 받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향후 문체부와 영진위를 비롯한 관련자들과 부역자들의 사퇴와 처벌이 수반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문체부와 영진위의 정상화까지 분명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시네마달과 같이 블랙리스트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이 보란 듯이 다시 일어서는 일이 중요하다. 직접적인 피해자인 블랙리스트 관련자와 부역자들에게 심정적 단죄를 주기 위해서라도, 문화예술인들이 피해와 타격을 극복하기 위한 상징적인 차원에서라도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유린당한 문화예술계와 영화계가 블랙리스트 이전, 아니 이후 좀 더 발전적인 환경을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 되어 줄 것이다.

블랙리스트 시네마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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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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