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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을 편하게 먹을 날은 언제쯤 다시 돌아올까?
 계란을 편하게 먹을 날은 언제쯤 다시 돌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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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식품을 살 때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비)'를 그리도 따지건만, 신선식품의 경우에는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 1인 가구의 비애다. 재택근무자일지라도 '혼자 산다'는 것은, 계획성 있게 밥을 차려 먹지 않으면 썩거나 물러지는 식재료가 생기기 쉬운 조건이다.

나 역시 잠깐 방심했다고 보고 싶지 않은 꼴을 목격한 적이 여러 번이다. 싹이 잔뜩 난 감자를 보며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아 칼을 든 채로 몇 초간 공포를 느껴야 했고, 맛이 이상해진 볶은 양파를 씹다 뱉어 한동안 양파를 먹는 것이 두려워졌다. 냉장고에서 물러진 숙주가 내뱉는 어마어마한 수분에 질겁하며 수분을 털어내 숙주를 내다 버린 것도 인상을 찌푸렸던 경험이다.

신선식품의 경우 싸다고 많이 사서 방치했다가 끔찍한 뒤처리를 하느니 그냥 적게 사서 빨리 먹어치워 버리는 게 낫다는 교훈을 얻었다. 집에서 근무할 때가 많은 내 경우도 이러할 진데, 평일 내내 아침부터 밤까지 밖에서 노동하는 1인 가구의 냉장고 속 신선식품은 더욱 상하기 쉬울 것이다.

돈 냄새를 맡은 대기업에서는 1인 가구를 타깃으로 한 유통점을 열었다. 이런 곳에서는 낱개 세척 채소, 볶음용 모듬 채소, 된장찌개 채소 등 990원으로 한 끼~두 끼를 해결할 만큼의 채소를 포장해서 판다. 전통시장에서 같은 가격으로 훨씬 더 많은 양을 구매할 수 있음에도, 1인 가구용 상품의 수요는 존재한다. 4개 묶음 계란을 990원에 판 것도 비슷한 맥락의 기획이다. 잘만하면 30알 짜리 한 판을 3000원대에 살 수 있던 시절의 얘기니, 4알에 990원짜리 계란을 사먹는다는 것은 '호갱님' 인증이다.

호갱님이 된 데에는, 원룸에 옵션으로 있는 냉장고에 계란을 위한 자리가 7구밖에 없다는 이유도 있으나 부차적이다. 핵심은 내가 집에서 좀처럼 요리를 안 해 먹게 됐다는 것이다. 조리시설이 열악하고 누군가와 함께 먹을 수 있는 식탁이 없는 원룸인지라 요리해서 먹는 기쁨이 적은 편... 이라고 합리화 해보지만 귀찮음이 가장 큰 요인인 것 같다. 요즘엔 거의 라면을 끓일 때와 볶음밥 해먹을 때 정도만 가스렌지에 불을 붙인다.

자취생의 계란 안 먹고 버티기... 그래도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

계란은 자취생 요리의 화룡점정이다. 라면을 먹을 때 계란을 넣으면 동반되는 죄책감을 경감시켜준다. 영양소 균형을 챙긴 기분이 들어서다. 파볶음밥은 들어가는 재료가 적고 과정이 단조로워 자취인이 해봄직한 요리이고, 역시나 계란이 주재료다. 간장계란밥도 만들기 엄청 간단하고 맛있다. 사실 계란을 간단히 삶아서 몇 알 먹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한 끼 식사가 된다. 계란은 (드문 일이지만) 귀차니스트들도 요리하게 한다.

하지만 아무리 '가성비'를 포기한 1인 가구라도 계란 4알에 1790원은 좀 심했다... 가장 최근 1인 가구용 마트에 갔을 때 발견한 가격이다. 한 판은 7000원~1만 5000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얼마 전 4알 990원이던 시절 사둔 계란을 마지막으로 소비할 때 경건한 마음까지 들었다. 이별을 앞둔 의식을 수행하는 기분으로 껍질을 깨는 손목을 절도있게 흔들었다. 당분간 계란 '안 먹고 버티기'를 택하기로 한 탓이다. 언젠가는 가격이 내리겠지, 그때까지 다른 걸로 단백질 채우지 뭐... 계란의 부재에 큰 아쉬움을 느끼지만, 현대사회가 (지나칠 정도로) 대안이 풍요로운 시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유, 두부, 버섯, 닭가슴살, 돼지뒷다리살, 참치캔 등으로 단백질을 보충하련다.

1인 가구가 아닌 경우는 좀 더 사정이 나쁘다. 자기 한 입만 챙겨야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식구까지 신경 써야 하는, 매일 매일의 식단을 고민하는 '집안의 요리를 도맡은 자'의 경우 수심이 깊다. 매일 밥상을 내야 하는데, 계란을 쓰지 못하면 할 수 있는 요리의 폭이 너무나 줄어든다. 그래도 식당에서 조리된 음식을 사 먹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이들은 계란 한 판에 만 원이 넘어도 울며 겨자먹기로 구매한다. 설 명절이 다가오는 것도 수심을 깊게 한다. 제사상에 오르는 음식의 상당수가 계란옷을 입는다.

하지만 그런 맥락을 고려하더라도, '계란대란'과 관련해 일반소비자의 고통이 다른 누구의 것보다 강조되는 것은 우려스럽다. 예컨대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계란을 빼는 대신 500원을 깎아준다는 순두부찌개 가게, 계란지단을 뺀 김밥집 등에 대한 투덜거림이 공유된다. 내가 놀랐던 글은, "김밥에 계란 대신 맛살이 들어간 것을 보고 김밥을 패대기칠 뻔했다"는 내용의 글이었는데 공감하는 댓글이 주류를 이뤘다. 자신 보다 더 큰 고통을 받을 가능성이 큰 이들에 대한 고려, 혹은 배려가 부재한 것을 목격하는 것은 섬뜩한 일이다.

다른 선택을 해도 생존을 위협받지 않는 소비자의 '선택권'과 생존과 직결된 영세자영업자의 '생존권' 중 어떤 권리가 우선될까? '먹고 싶은 계란을 먹지 못하는 고통 vs. 마진율이 거의 남지 않고 상황이 언제 개선될지 몰라 발은 동동 구르는 영세자영업자 및 농민의 고통'이면 '닥후(닥치고 후자)' 아닐까? '계란 먹을 권리'가 무슨 천부인권이라도 되는 양, 가장 기본적으로 보장돼야 하는 권리인 것 마냥 논의되는 것이 나는 조금 의아하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계란 유통 과정의 수익배분율에 대해서도 배웠다. 이렇게 계란 가격이 올라도 농민에게 돌아가는 몫은 거의 변함 없고, '대상인'이라는 유통업자가 많은 몫을 가져간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살처분으로 피해가 막심한 농민들에게 돌아갈 보상금도 미비한데, 이와 같이 왜곡된 유통구조로 인해 농민들은 이중고를 겪는다. 계란 (뿐만 아니라 많은 상품의) 유통구조의 개선이 좀 더 사회적 의제가 되기를 희망한다.

물론 가장 큰 책임은 부유하지 못한 시민 전반이 고통을 분담하게 만든 검역당국에 있다. 일본 아오모리현에서 AI가 발생하자마자 총리가 주재하는 각료회의가 소집된 데 반해 한국에서는 서로 책임 떠넘기기로 한 달 가까이 시간이 허비됐다는 사실을 상기해본다. 분노는 이들을 향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는 가해와 피해 사실이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럴 수록 많은 힘과 그에 수반하는 의무를 가진 단체에게 책임을 묻고 구조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을 우선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무원들의 형식적인 업무 수행도 개선되길 바란다. 예방에 도움 되는 과학적인 위생관리 표준을 고안하고, 농가에서 의심사례를 즉시 보고하면 빠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체계를 기대한다. 또한 바이러스 조사 및 백신을 개발에 적절한 예산이 투입되면 좋을 텐데, '최순실 예산'으로 낭비된 것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쓰리다. 최순실의 부당한 해외 자산을 꼭 국고로 환수하고 이를 통해 사회안전망이 확충되는 날, 온 국민이 함께 계란파티를 벌여보자!

동 트기 전이 가장 어둡듯, '계란파티' 전까지 한국사회의 고통의 총량은 날로 증대될 것 같다. 마음이 춥다. 나보다 더 고통 받을 이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하는 노력을 그치지 않는 것이 나의 과제다. 쉽지 않은 일이다.


태그:#계란, #1인가구, #호갱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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