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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네팔 국경 도시 소나울리. 도시 한폭판으로 한 수행자가 걸어가고 있다. ⓒ 송성영
인도와 네팔을 오가는 사람들, 특히 룸비니를 오가는 여행객들 대부분은 이곳 소나울(Sonauli)를 거치게 된다. 그들은 네팔과 인도 여행지 중에 이곳을 모기와 파리가 득실거리는 최악의 도시로 손꼽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네팔이나 인도의 여느 혼잡한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나울리는 네팔과 인도의 국경 도시이지만 총기를 소지한 군인들의 삼엄한 경계가 없다. 반밧사 국경이 그랬듯이 국경이라는 긴장감 따위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형형색색 현란하게 치장한 육중한 화물 트럭들이 일정한 절차를 밟기 위해 비좁은 국경 부근에 길게 늘어서 있을 뿐이다.

버스에서 내려 잠시 주변을 둘려 보다가 순박한 눈망울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젊은 네팔 사내에게 다가가 물었다.

"출입국관리 사무소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저기요."

사내는 길 양옆으로 고만고만하게 늘어서 있는 상점 어딘가를 손짓한다. 하지만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출입국관리사무소라 할 만한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물었더니 젊은 사내는 빙그레 웃더니 자신을 따라오라며 앞장서 걷는다. 청년은 백 미터도 채 안 되는 지점에서 다시 손짓을 한다. 출입국관리 사무소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출입국관리사무소는 국경 문 근처에 있었는데 길가의 허름한 상점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그나마 유리창에 '이미그레이션 오피스'(Immigration Office)라는 문구가 붙어 있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가만 보니 인도 출입국관리사무소였다.
소나울리 인도 출입국관리사무소 ⓒ 송성영
네팔 출입국관리사무소를 찾아가야 할 것 같아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인도에서 네팔로 들어왔을 때를 생각했다. 돌이켜 보니 밧바사 인도 국경에서 분명 네팔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입국절차를 밟았다. 이제 인도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인도 사무소를 찾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일단 사무소 안으로 들어섰다. 사무소 직원으로 보이는 인도 사내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짤막하게 말했다.

"여권 주세요."

사내에게 여권을 내밀자 간단한 입국 서류를 내민다. 설문지 같은 서류에 적당히 공란을 채워 건네줬더니 여권에 도장을 찍어준다. 그게 전부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싱거울 정도로 간단한 절차를 마치고 국경 문으로 향했다. 반밧사 국경과 마찬가지로 정복 차림의 경찰이나 군인들, 그 누구도 소나울리 국경 관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제지하거나 검문하지 않고 있다.

국경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남아 있는 네팔 루피를 인도 루피로 환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국경문을 넘어서면 더 이상 네팔 루피는 필요치 않다. 환전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저만치 길거리에 누워 있는 걸인이 보였다. 지갑에 남아 있는 네팔 지폐를 몽땅 꺼낸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간다. 그가 부스스 눈을 떠 나를 올려다본다.

그에게 돈을 건네는 순간, 카스트 계급이 떠올랐다. 카스트는 인도 네팔뿐만 아니라 돈으로, 자본으로 굴러가는 어느 나라든 존재한다. 돈이, 자본이 카스트다. 자본은 빈부를 생산해 내고 부조리한 계급을 생산해 낸다.

자본으로 굴러가는 사회에서는 돈이 많으면 최상층 계급 브라만이 될 수 있고 돈이 없으면 최하층 계급 수드라가 될 수 있다. 자본을 공평하게 나눌 수 있다면 현대판 카스트 계급을 무너뜨릴 수 있다. 하지만 자본은 탐욕의 생산물이다. 인간의 탐욕은 싯다르타의 시대나 지금이나, 더 나아가 미래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싯다르타, 붓다가 탐욕을 버리고 자비를 베풀어야 자유로울 수 있다 가르쳤던 그 시대보다 지금이 더 탐욕스럽다.

붓다뿐만 아니라 인류의 모든 성인들은 탐욕을 버리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탐욕은 집착이다. 내가 남아 있는 네팔 돈을 악착같이 환전하여 뭔가를 좀 더 누려보겠다는 것은 탐욕스러운 집착이다. 집착은 마음의 감옥이다. 집착을 버리면 자유롭다. 이것이 진리다.

진리를 알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그냥 아는 게 아니라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다. 탐욕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열쇠는 나보다 가난한 누군가에게 베푸는 자비심에 있다. 나는 그 집착의 감옥에서 잠시잠깐 만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심정으로 걸인에게 네팔 지폐를 건넸다.

나는 걸인의 고통스러운 눈빛을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지갑에 남아 있던 1500여 네팔 루피를 건네주고 국경문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따지고 보면 그 걸인이 내게 보시의 기회를 준 것이다.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준 걸인이야 말로 또 다른 나의 붓다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는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소나울리 인도 네팔의 국경문 ⓒ 송성영
국경문을 통과해 다시 인도로 들어섰다. 소나울리는 인도와 네팔에 걸쳐 있다. 네팔에 비해 인도의 소나울리는 좀 더 지저분하고 혼잡했다. 국경 문을 넘어 백 미터도 채 안 된 거리에서 소똥을 밟고 말았다. 소똥을 밟는 순간 비로소 인도로 너머 왔음을 실감했다. 인도에서 나를 반겨준 것은 그 누구도 아닌 길거리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쓰레기와 소똥, 그리고 찌는 듯한 무더위였다.

네팔에서 30일 비자로 20여 일을 보냈다. 한국을 떠나와 인도 네팔을 떠돌아다닌 지 벌써 120일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사람과 가축에 뒤섞여 굴러가는 차량들. 자동차들이 움직일 때마다 건조한 흙먼지, 그 사이로 릭샤와 오토바이들이 위태롭게 빠져나가고 있다.

이제 다시 어디로 가야 하는가. 네팔 국경을 넘어 인도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나는 목적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20여 일 전, 인도에서 네팔 국경을 처음 너머 갔을 때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딱히 목적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서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만 되풀이 되고 있었다.

나는 다시 호사스러운 궁전 생활을 버리고 수행자의 길, 고행 길을 나섰던 싯다르타를 떠올렸다. 왕자로서의 신분은 물론이고 아내와 사랑하는 어린 딸을 비롯한 모든 가족들을 등지고 수행자의 길로 나섰을 때 어느 지역으로 가겠다는 뚜렷한 목적지가 있었을까. 목적지는 따로 없었을 것이었다. 그가 가고자하는 길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고통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생로병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 그 길이 그의 목적지였을 것이다.

싯다르타의 목적지가 생로병사에서 벗어나는 길이었다면 나의 목적지는 이혼을 요구해 오는 그녀에 대한 분노에서 벗어나는 길이었다. 가라앉혔다 싶으면 다시 솟구쳐 오르는 분노심, 그녀에 대한 분노의 불씨는 내 안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나는 싯다르타를 떠올리다가 룸비니와 더불어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부다가야, 처음 법을 설한 초전법륜지 사르나트, 그리고 열반에 든 쿠시나가르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 4대 성지보다는 출가한 싯다르타가 어디를 떠돌아다니며 어디에서 수행을 했는지, 그 수행처에 가보고 싶었다.

깨달음을 얻은 완성체 붓다보다는 모기나 온갖 독충에 물려가며 고행을 했을 인간, 싯다르타가 걸었던 길을 따라가고 싶었다. 푹푹 찌는 더위에 사막처럼 황량한 길을 무한정 걸어 온갖 독충들이 우글거리는 습한 정글 숲을 지나쳤을 것이었다. 탁발을 해가며 거지처럼 떠돌아다닐 때 신발은 제대로 싣고 다녔을까.

싯다르타는 동인도, 가야(gaya) 지역에 자리한 '둥게스와리'(Dungeshwari 인도말로 '버려진 땅')에서 5년 동안 용맹정진을 했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둥게스리와리는 가야 사람들이 시체를 버리는 '시타림'이었기에 먹을 것도 걸식할 데도 마땅치 않았으리라.

기록에 보면 싯다르타는 다섯 명의 도반과 함께 하루에 한 알의 대추를 먹어가며 용맹정진을 했다. 당시 고행주의자들이 그랬듯이 목욕도 하지 않고, 음식도 구하지 않고, 잠도 가능하면 자지 않았다. 그렇게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꼼짝 않고 선정에 들곤 했다고 한다.

일단 싯다르타가 고행을 했던 가야, 둥게스와리로 목적지를 정했다. 소나울리 버스터미널에서는 가야로 직행하는 버스가 없다고 한다. 가야로 가기 위해서는 고락푸르(Gorakpur)로 갈 수밖에 없었다. 버스는 나침반마저 녹여 버릴 것 같은 한낮의 숨 막히는 더위를 뚫고 고락푸르를 향해 내달렸다.

3시간 반 정도 달려 온 버스는 나를 혼잡한 고락푸르역 앞에 내려줬다. 온갖 차량들과 매연, 거기다가 숨이 턱턱 막혀 오는 뜨거운 열기가 온몸으로 덮쳐왔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접하는 열기였다. 도시의 열기가 섭씨 40도는 족히 넘을 것 같았다. 이 숨막히고 혼란스러운 도시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가야로 가기 전에 먼저 고대도시 바라나시부터 가기로 했다. 네팔 국경을 넘어 인도 바라나시로 가려면 반드시 고락푸르를 거쳐야 한다. 바라나시로 가는 버스나 열차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들어서는데 한 젊은 서양인이 자전거를 끌고 나오며 내게 눈인사를 한다. 금방 물속에서 나온 듯 사내의 옷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다.

고락푸르역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매표소 앞은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었다. 등줄기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숨이 막혀왔다. 외국인 전용 매표소를 찾아 헤매다가 러시아에서 왔다는 중년부부를 만났다.

"외국인 전용매표소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도 알아봤는데 없습니다."

바라나시나 델리에서처럼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외국인 전용 매표소가 따로 없다고 한다. 저 길게 늘어서 있는 현지인들 틈에서 어떻게 표를 끊어야 할지 난감했다. 난감해 하는 내 표정을 보더니 러시안 중년 남자가 물었다.

"어디로 가려 합니까?"
"바라나시로 가려 합니다."
"우리도 바라나시로 가려 하는데 표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아, 어떻게 하지요?"
"우리는 하루 더 머물다 갈까 합니다. 내일이면 표를 구할 수 있다니까요."

나는 숨 막혀 죽을 것만 같은 무더위를 견뎌낼 재간이 없다. 기록 사진은 물론이고 사진기를 꺼낼 여력도 없다. 러시안 중년 사내가 알려준 방향으로 납덩이처럼 짓눌러 오는 배낭을 베고 사력을 다해 걸었다. 바라나시로 가는 버스 터미널이 500미터 지점에 있다는 것이었다. 아픈 다리가 질질 끌려오는 느낌이다. 500미터를 넘게 걸은 것 같은데 버스 터미널은 보이지 않는다. 생수 한 통을 사면서 상점 주인에게 물었더니 한참 더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생수를 마시고 또 마셔도 갈증은 가라앉지 않는다. 생수를 마시는 족족 땀으로 배출되는 것만 같다. 복잡한 시장 바닥을 통과해 1킬로미터는 족히 걸었을 터인데 버스 터미널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다가는 열병으로 쓰러질 것만 같다. 이렇게 먼 거리인 줄 알았으면 애초에 오토 릭샤를 잡아탔을 것이었다. 그렇게 또 500미터를 족히 더 걸었을 무렵 작은 버스 터미널이 나왔다.

벌써 생수가 바닥이 났다. 다시 생수 한 통을 더 사서 발칵 발칵 들이켰다. 1시간 정도 기다리자 바라나시로 간다는 다 낡은 로컬 버스가 차문을 열었다. 버스에 오르기 전에 생수 한 병을 더 샀다. 벌써 3병째다. 뜨거운 양철지붕 같은 좌석에 겨우 엉덩이를 붙였다. 로컬버스가 그렇듯이 에어컨은 말할 것도 없이 그 흔한 선풍기 한 대 없다.

버스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뜨거운 열기 속에 30분 넘게 앉아 있었다. 버스 안은 마치 한증막 같다. 숨이 막힌다. 고난의 길목에서 호흡을 가라앉히고 떠올렸던 싯다르타의 고행길이니 깨달음으니 자비의 말씀들조차 거추장스럽다.

승객들이 하나 둘씩 좌석을 다 메우고 통로까지 들어차고 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이러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질 것 같다. 룸비니 한국사원에서 아침에 미숫가루를 물에 타 먹은 게 전부다. 버스 터미널을 찾겠다고 푹푹 찌는 태양 아래 걸었으니 체력도 고갈이 났다.

사력을 다해 배낭을 챙겨 숨막히는 버스에서 빠져 나왔다. 버스 터미널 근처에 잔디가 깔린 정원이 보인다. 나무 그늘을 찾아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뚱아리를 눕혔다. 나무 그늘 사이로 언뜻 언뜻 보이는 하늘이 노랬다. 노래진 하늘을 바라보며 옹알거렸다. 여기서 잠들면 안 된다. 눈을 떠야 한다. 눈을 감으면 안 된다. 그 다음부터는 아무런 기억이 없다.

얼굴로 쏟아지는 물기를 느끼며 눈을 떴다. 내 주변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내 눈앞에 생수병을 들고 있는 인도 여인이 환하게 웃고 있다. 그리고 내게 말한다.

"우리는 당신이 죽은 줄 알았어요."

여인이 내게 생수를 건네며 물을 마시라고 한다. 꿈인 줄 알았는데 꿈이 아니었다. 여인이 내게 다시 말한다.

"괜찮아요?"
"아, 예 괜찮습니다."
"당신은 숨을 제대로 못 쉬고 쓰려져 있었어요. 그래서 당신 얼굴에 물을 부었어요."
"고맙습니다."

그제야 나는 열병으로 쓰려져 있다가 다시 의식을 되찾았다는 것을 알았다. 아픔을 느끼는 내 살과 뼈가 그대로 있었다. 배낭도 그대로 있었다. 나는 여전히 인도에 있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다만 바라나시 가는 버스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인도 여인이 내 얼굴에 부었던 물은 자비의 생명수였고 붓다의 말씀이었다.
불볕 더위에 열병으로 쓰러진 내게 생수를 건넸던 인도 여인 ⓒ 송성영
태그:#소나울리 국경마을, #진리와 자비, #고락푸르, #열병 , #생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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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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