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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1976년생이고, 1980~90년대에 초중고를 나온 남성이다. 2000년대 이후의 상황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나와 비슷한 또래에게 있어 성의식 형성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경험은 나처럼 의무적인 학교 공동체 생활, 특히 중·고등학교 생활의 기억과 경험이었을 것 같다.

전문지식이 전혀 없는 내 경험으로는 남중·남고를 다닌 대다수 남성들의 성의식은 포르노적 영향에 의해 크게 규정된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 시기 남성들의 성의식 주류가 그런 상황들을 집단적으로 겪으며 형성된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다.

나를 비롯해 내 주변은 온통 '여성혐오'를 달고 살았던 것 같다. 호기심을 갖는 동질성에 서로 공감하고, 각자의 정보를 공유하며, 내가 해보지 못한 경험을 동경하는 남성 집단에게 '성'이라는 주제는 항상 '포르노', '여성혐오' 등이 강력하게 자리 잡았다.

여성혐오적인 욕을 잘하고, 실제이든 허구이든 포르노적 경험을 많이 떠벌리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유무형의 자극에 모두가 지속적으로, 집단적으로 노출된다. 여성혐오적인 남성들의 성의식은 그렇게 자가 발전하며 재생산된다.

분명히 추구해야할 가치인 '여성주의'

군대는 말 할 것도 없고, 대학과 직장에서도 어떤 사회적 규범 안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서로 은밀하게 공감하고 공유하는 것이 주류 남성들의 여성혐오적 성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대학에 다닌 90년대 중반에 학생운동과 사회운동 내에서 그 전보다 좀 더 폭넓게 여성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 역시 그 즈음에 여성주의를 접했고, 특히 성폭력에 대한 태도와 해결방안에서 운동적으로 체화해야 하는 당위적 규범 정도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러나 솔직히 그때나 지금이나 '모르니 배운다', '지향해야 한다', '노력해야 한다'를 넘어선 적은 없었다.

나는 여성주의를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분명히 생각하지만 그것은 내가 속한 운동 공동체 내에 머물고, 정작 '다른' 생활 공동체에서는 그러지 못하는 이중성을 항상 겪으며 살아왔다. 이를테면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모임, 대학 동아리 모임, 학과 동기들과의 모임, 직장 등에서는 여성혐오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했다. 아니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소심하게, 내 개인적인 생각을 슬쩍 드러내는 수준에서, 아니면 그냥 도망가거나, 사실상 대부분은 여성혐오적 분위기에 편승해서 살아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남성들끼리 쓸데없는 농담을 주고받거나, 자신의 기분과 생각을 표현하는 대화에서 여성혐오적 욕을 많이 쓰는 것에 별다른 제동을 걸거나 불편함을 제기하지 않는다. 아니 진심으로 불편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고 해야 하겠다. 그냥 내가 안 쓰는 정도... 간혹 친밀감을 준답시고 공감하는 정도... 대학에 다닐 때도 성매매를 하는 동기들, 선후배들에게 그런 것 안 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으로 존중(?) 받고 권유 당하지 않는 정도였다.

중소기업 직장에 다닐 때 부서 회식 후 노래방에 가서 상사가 도우미를 부르면 자리를 피하는 정도... 내 기억에 딱 한 번 피하지 못하고 끝까지 붙들려 있었던 적도 있다. 직장 동료들에게도 성매매 안 하는 친구로 인식돼서 같이 어울릴 때는 아예 그런 시도를 안 하거나, 아니면 나를 빼고 하거나 하는 상황이었다.

가장 일상적이고 어려운 문제, 여성혐오적 욕설과 표현

지난 5월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 추모 메시지 남기는 예비역 지난 5월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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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노동조합 상근자로 일한다. 99%가 남성 조합원들로 이루어진 노동조합에서도 위와 같은 상황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그에 대한 나의 대응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상적인 대화에 여성혐오적 욕설과 비난이 오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조합원들 간의 술자리 이후에 노래방에서 도우미를 부르는 일도 분명히 있다.

물론 나를 비롯한 주요 간부들 모르게 말이다. 추측컨대 민주노총에 소속된 단위노동조합 간부들 중에 성매매를 하는 경우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물론 아는 사람만 알도록 말이다. 실체를 드러내는 사례를 몇 가지로 분류해보겠다.

박근혜 퇴진 운동이 한창인 요즘 같은 때 가장 흔한 풍경은 "박근혜 XX년", "최순실 미친년", "여편네들이 다 말아 먹네", "암탉이 설쳐대니까 나라꼴이 이 모양이지", "비아그라는 X 빤다고 샀겠나" 등등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다.

물론 회의 자리나 집회 발언 등에서 그러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40~50대 남성 조합원들이 끼리끼리 얘기하는 중에 종종 들려오는 말들이다. 노동조합 공식석상이나 발언 중에도 간혹 그런 표현들이 등장한다. "여성의 치마와 발언은 짧아야 좋다",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아봐서 저렇다" 등등...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고 뼛속 깊이 박혀 있는 성차별과 여성혐오에서 나오는 다양한 욕설과 표현들.

상근하는 여성 간부에 대한 조합원들의 태도는 일단 '경리 아가씨'이다. 비혼 여성이면 더욱 심하고, 웬만한 기혼 여성도 마찬가지이다. 처음 접하게 되는 조합원이나 상담 오는 비조합원들은 오히려 조심하는 경향이 있지만, 노조활동 구력이 있는 사람들이 잘못을 더 많이 저지르곤 한다.

술에 취한 경우에는 매사가 정말 위태롭다. 본인들 얘기로는 하나같이 "고생하는데 안쓰러워서", "잘 해주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려는 것"이 그 동기이다. 경계를 넘나드는 언어적인 성희롱은 둘째로 치고, 구체적인 행위로는 동의 없이 손을 잡거나, 포옹을 시도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나마 여성 간부라는 권력관계에 있고 평소에 잘 아는 사이여서 본인 또는 주변에 의해 중간에 제지당해 미수에 그치는 경우도 있지만, 순식간에 저질러지는 상황이 더 많고 대부분의 가해자는 그 자체가 성희롱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하지 못한다. 이에 대한 사후처리는 가벼운 경고로 끝나거나, 대다수는 그조차도 없이 그냥 넘어간다.

카톡으로 야동 보내주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야동이나 사진, 음담패설 등을 주로 카톡으로 보내주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잘 알고 친한 남성들 사이에서 벌이지는 일이다. 문제는 이런 것이 친밀감을 표현하고 우정을 돈독히 하는 일종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좋은 게 있으면 돌려 봐야지"로 대표되는, 야설과 성인잡지를 돌려보던 중·고생 때부터 이어오는 그 방식이 사회에서도 계속 된다. 조합원들도 마찬가지인데, 경선으로 치러진 노동조합 선거에서 선거운동원이 조합원 유권자들에게 카톡으로 선거정책 내용과 함께 야동을 같이 보내는 일도 있었다. 정말 진심으로 '미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습관처럼 노래방에서 도우미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돈이 드니 매번 그러기는 힘들겠지만, 이런 걸 즐기는 친한 사람들끼리 날을 잡아서 음주 후 노래방으로 놀러 간다. 아니면 소위 접대의 성격을 갖는 자리가 이렇게 만들어지기도 한다. "나는 노래방 가면 실컷 주무르다 온다", "노래방에 그 재미 아니면 뭐 때문에 가나"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보통 조합원들 몇몇이 언제 어디서 그랬다고 사후에 알게 되는데, 애써 노조와는 무관한 일로 선을 긋고 '개인들이 그러는데 별 수 있나' 하고 그냥 넘어간다. 돈이 없으니 내 주변에서 룸 같이 비싼 곳에 가는 경우를 본 적은 없지만, 임금이 높은 정규직들의 경우에는 사측이 작심하고 룸에서 노조간부들을 접대하며 노조활동을 갉아먹는 상황이 끊이지 않고 폭로돼 왔다.

노동조합의 공식적인 행사와 일정에서 여성혐오적 발언과 욕설 등을 하면 안 된다는 정도의 인식은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 역시도 사적인 삶의 영역에서는 전혀 그러지 않는 이중성을 대다수가 갖고 있다. 최소한 반성폭력 교육과 성평등 교양 등을 배치해야 하지만 그조차도 현안을 핑계로 우선순위에서 항상 밀린다. 혹은 우리 조합원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다. 기회가 있을 때 가끔씩 지적하지만 간부로서 으레 하는 잔소리, 또는 소위 '범생이' 취급을 받고 마는 것이 사실이다.

나 같은 수준과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필요할까? 기본적으로 공동체 내의 꾸준한 캠페인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어떠한 실천도 못하고 있다. 적합한 수준의 안내와 적절한 교육 방식이 절실하지만, 내 고민은 턱 없이 부족하고 의지도 박약하다. 부끄럽지만 도움이 필요하다는 핑계만 댈 뿐이다.

스스로에게 다시 묻는다. 그래서 노동조합에 있는 나는 무엇부터 해야 할까?

① 조합원 의무교육에 반성폭력 강의 배치, ② 연1회 이상 성평등 교양 배치 ③ 조합간부 연1회 성평등 교육 필수 이수 ④ 조합 내부 수칙으로 여성혐오 추방 캠페인….

아는 것도, 떠오르는 것도 이것밖에 없다. 물론 노동조합 조직 내에서 이런 일들을 추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당장 '책임질 수 있을까?' 자신 있게 장담하기도 조심스럽다. 그래도 하나하나 해보는 수밖에 더 있겠나. 우리 조합원들을 사로잡을 반성폭력 강사부터 알아봐야겠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노동현님(가명)은 민주노총 가맹·산하 단위노동조합 상근간부를 맡고 있는 노동당 당원으로, 노동당 여성위원회가 페미니즘에 대해 고민하는 남성 당원들과 함께 시작한 '남성성들: 남성 페미니스트 글쓰기 연재'에 참여합니다.

'남성성들: 남성 페미니스트 글쓰기 연재'는 페미니즘에 대해 고민하는 남성 노동당원들이, 노동당 여성위원회와 시작한 글쓰기 시리즈입니다. 여기에서 '남성성' 이란 R.W.코넬의 저작 <남성성/들>에서 인용한 것으로, 하나의 '남성성'이 존재한다기보다 만들어지고, 수행되는 개념으로서 한국사회의 남성성이 어떻게 실천되고 유지되는가를 성찰적으로 나누기 위한 개념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태그:#남성성, #남성 중심 노조, #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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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아르바이트 노동조합. 알바노동자들의 권리 확보를 위해 2013년 7월 25일 설립신고를 내고 8월 6일 공식 출범했다. 최저임금을 생활임금 수준인 시급 10,000원으로 인상, 근로기준법의 수준을 높이고 인권이 살아 숨 쉬는 일터를 만들기 위한 알바인권선언 운동 등을 펼치고 있다. http://www.alba.or.kr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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