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은유하는 다양한 표현이 있지만, 그중 가장 마음에 든 단어를 꼽자면 바로 '아카이브(기록물 저장소)'이다. 이는 한 사람의 육체가 단지 물질적이거나 자연적이지 않으며, 규범과 관습이 기입되는 사회적 공간임을 적확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동시에 이 표현은 한 인간의 생애를 제대로 포착하는 말이기도 하다. 마치 거대한 기록물 저장소처럼, 우리의 삶은 각자가 보고 들은 것들, 행하고 말한 것들 그리고 형성한 관계들로 가득 차 있다. 이는 한 사람이 어떤 인간인가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요소들임과 동시에 누군가를 이해하는 좋은 정보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편으로 그런 질문이 들기도 한다. 만약 그러한 요소들이 모두 사라지고, 내가 나의 지난 시간과 주변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말하자면 기록물 저장소가 텅 비어버리게 된다면 말이다. 그때의 나도 여전히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내가 아님의 경계를 넘어서게 된 것일까? 사실 예전에는 이런 것들이 막연한 궁금증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전보다 시간이 빨리 흘러감이 느껴지고, 비교적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증상들이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는 뉴스를 볼수록, 이 문제는 그만큼 현실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말하자면 이제 이 일은 '아주 일어나지만은 않을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카이브가 텅 비게 될 때, 나는 무엇이 될까?

 나 자신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여전히 내가 나로 존재하도록 규정하는 건 무엇일까.

나 자신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여전히 내가 나로 존재하도록 규정하는 건 무엇일까. ⓒ 그린나래미디어㈜


2014년에 개봉한 영화 <스틸 앨리스> 바로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능력 있는 교수로서 탁월한 직업적 성취를 이루고 화목한 가족 속에서 사랑을 느끼며 살아가는 앨리스.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일상을 살고 있던 그녀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바로 그녀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의 기억력을 점검하며 시간을 보내지만 결국 증상은 점차 악화하고 앨리스는 병원으로부터 확진 판정을 받게 된다. 영화는 앨리스가 알츠하이머를 앓으며 겪는 변화와 그 속에서 그녀가 보이는 반응을 담담하게 비춘다.

사실 세상에 무섭지 않은 병이 없겠지만, 특별히 알츠하이머가 더욱 두렵게 느껴지는 것은 그 병이 누군가로 하여금 지금까지의 자신을 완벽하게 상실하게 만들리라는 점 때문이다. 과거와 사람들도,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낸 현재도 빠른 속도로 사라져간다. 심지어 내가 습득한 언어나 사회적 관습도 기억나지 않게 된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런 스스로가 일정 시간 세상에 남겨진다. 그래서 영화 속 앨리스도 처음 발병 사실을 고백할 때 자기 스스로가 지워지고 있다며 울부짖는다. 심지어 그녀는 병이 악화한 순간을 대비해 자살 계획을 세워두기도 하며, 알츠하이머 환자로서 사람들을 만나는 게 두렵고 부끄럽다고 말하기도 한다.

과연 그 병 이후에는 상실만이 있을까

 이길 수 없는 병을 만났다. 그녀는 패배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마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길 수 없는 병을 만났다. 그녀는 패배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마저 포기할 수는 없었다. ⓒ 그린나래미디어㈜


물론 영화는 앨리스가 절망에 빠지고 패배를 선언하는 것에서 끝을 맺지는 않는다. 그녀는 점차 자신의 병을 인정하고 그것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물론 그 과정에는 알츠하이머로 인해 달라진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는 질문도 포함되어 있다. 영화의 후반부, 알츠하이머 협회가 연 행사에서 그녀는 연단에 오른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매일 상실의 기술을 배우고 있다고. 그리고 그렇게 달라져 이전의 스스로와 멀어진 그녀는 무능해지고 우스워질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런데도 그것은 알츠하이머라는 별일뿐 자신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자기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것, 순간을 즐기는 것을 하겠다고 말한다. 지금의 행복과 사람들이 주는 사랑을 느낄 것이라고.

그녀의 연설을 듣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상실'의 관점에서만 바라본 것이 아니었을까. 마치 상실의 기술을 어서 습득하라고 자신을 몰아붙였던 앨리스처럼 말이다. 아카이브는 기록물들이 저장되어있는 곳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의 쌓임이 연속되는 곳이기도 하다. 비록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그 사람이 가진 기억이 사라질지도 모르고, 경험은 축적되지 못한 채 스쳐 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그곳에 또 다른 감정과 경험이 방문하지 않을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마치 앨리스가 기억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매일 새로운 기쁨과 행복을 느꼈던 것처럼. 아카이브는 조금 황량해지고 기록의 방식은 달라질지 모른다. 하지만 앨리스가 세상에 존재하는 한, 그곳은 문을 닫지 않는다.

기입은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여전히 앨리스다

 감동적인 연설 이후, 그녀는 그녀가 예상한 대로 차츰 기억을 잃어 간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앨리스로 존재한다.

감동적인 연설 이후, 그녀는 그녀가 예상한 대로 차츰 기억을 잃어 간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앨리스로 존재한다. ⓒ 그린나래미디어㈜


사실 이 영화는 명징하게 메시지를 드러내진 않는다. 또 앨리스와 주변인들의 갈등을 복잡하고 만들거나 그녀의 사회적 위치를 부각할 여지가 있음에도, 이 영화는 앨리스의 병과 달라지는 그녀에게 조용히 초점을 맞추기만 할 뿐이다. (심지어 앨리스의 자살 또한 우발적인 계기로 중단된다) 나는 그것이 이 영화가 다루는 주제가 지닌 내재적 한계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앨리스가 말하듯 알츠하이머는 지옥 같은 고통을 안겨준다. 이런 상황에서 마냥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지거나 감동적인 순간만을 위한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은, 자칫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낭만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아마 감독들도 그걸 원치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이 영화가 기억을 잃어도 앨리스는 앨리스라는 말을, 알츠하이머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을 놓지 않으려 한 그녀의 투병기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으리라 생각한다. 영화의 마지막, 그녀의 딸 리디아는 마치 앨리스의 상황을 대변하는 듯한 소설의 한 구절을 읽어준다. 그리고 이를 듣는 앨리스의 표정에서 미묘한 감정의 변화들이 감지된다. 리디아는 앨리스에게 무엇을 느꼈냐고 묻고, 앨리스는 웃으며 '사랑'이라고 답한다. 병이 더욱 악화한 그녀는 이제 간단한 단어를 말하는 것에도 어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느낀다. 그것이 금세 사라질지라도 기입은 멈추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영화의 제목처럼, 그녀는 여전히 앨리스다.

스틸 앨리스 알츠하이머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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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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