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정치부회의>의 한 장면.

JTBC <정치부회의>의 한 장면. ⓒ JTBC


지난 16일, JTBC 보도부문 손석희 사장은 아마도 <뉴스룸>의 차움 관련 특종이 '길라임'이란 닉네임에만 집중되자 '뿔'이 나지 않았을까. 하루 전날 터트린 박근혜 대통령의 차움 대리처방 의혹 특종보도가 의도치 않게 '길라임'이란 닉네임에 묻혔다고 여겨져서 말이다. 그래서 <뉴스룸>은 지난 16일 "본질은 가명 아닌 가명 뒤 불법정황"이란 일침을 놓는 제목의 보도로 '팩트'를 환기시킨 것 아니었겠나.  

그렇게 '차움'이 우리에게 왔다. '시크릿가든'이라는 휴게시설을 가진 VIP 병원. 지난 19일 전국적 관심 속에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가 '대통령의 시크릿'편에서 박 대통령이 줄기세포 불법시술을 받았다고 폭로한 바로 그 병원. 사실 이 차움을 먼저 인지(?)한 것이 JTBC 드라마 <밀회>의 정성주 작가와 안판석 피디라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 없을 것 같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정국 속에서 드라마에서 스쳐지나갔던 차움 건물을 '네티즌 수사대'는 귀신 같이 찾아냈다. 그렇게, 여러모로 <밀회>는 현 시국을 예견한 '명작'의 반열에 올려야 할 것 같다. 아니, 이미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성주 작가는 "우연의 일치"라 극구 부인했지만, 마치 최순실과 정유라의 전방위적 활약(?)을 감지하고 이를 드라마에 반영한 듯한 장면들은 이미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교육부가 발표한 이화여대의 '정유라 특혜' 전말과 전격 체포 후 구속된 장시호의 모습을 목도하며, 이 <밀회>를 다시 끄집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비단 현실과의 근접성 때문만은 아니다. <밀회>가 가리켰던, 그리고 현실을 반영하고 그 현실을 공격했던 지점이 결국 작금의 우리네 2016년 11월 현재와 밀접히 맞닿아 있어서다. 어쩌면, <밀회>의 오혜원(김희애 분)이 이선재(유아인 분)와 맞이했던 그 결말은 우리가 곱씹고 수긍해야 할 미래여야 할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1%였을 장시호와 정유라의 현재

눈만 드러낸 장시호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자금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체포된 최순실씨 조카 장시호씨가 20일 새벽 검찰 조사를 받은 후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서 나와 구치소로 향하는 호송차에 오르고 있다.

▲ 눈만 드러낸 장시호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자금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체포된 최순실씨 조카 장시호씨가 20일 새벽 검찰 조사를 받은 후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서 나와 구치소로 향하는 호송차에 오르고 있다. ⓒ 연합뉴스


교육부에 따르면, 이대 입학처장은 "수험생 중에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가 있으니 뽑으라"고 면접위원들에게 지시, 아니 강조했다. 그리고 정유라는 금메달을 면접장에 들고 들어갔다. 정씨는 면접평가에서 최고점수를 받았다. 그 와중에 일부 면접위원은 정씨보다 순위가 높은 수험생에게 낮은 점수를 부여했다. 정씨 때문에 떨어진 학생이 나온 연유다.

명백한 입시부정이요, 특혜다. 다른 의혹은 더 가관이다. 정씨는 한 번도 출석하지 않은 수업에서도 학점을 받았고, 시험은커녕 과제물을 제출하지 않았는데도 학점을 받았다. 어느 교수는 대신 과제를 제출했다. 그랬으니, 대리출석과 대리시험은 기본이었을 터. 오늘(22일) 오전, 검찰은 이대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아직 입국조차 하지 않은 정유라가 해외에서 벌벌 떨고 있을지 모른다면, 그의 사촌 언니인 장시호는 지난 18일 서울 도곡동 친척집(?) 인근에서 긴급 체포된 이후 전 국민 앞에 얼굴을 드러내야 했다. 장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가 문체부로부터 받은 예산 6억7000만원과 삼성그룹으로부터 후원 받은 16억 원 중 일부를 횡령함 혐의로 21일 밤 전격 구속됐다.

대한민국 1%의 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알려진 '최태민 3세'인 두 사람은 결국 해외에서 도피 중이거나 구치소에 감금됐다. 그 중 장시호씨는 적어도 10대부터 세상 그 무엇도 무서울 것 없는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디스패치가 지난 19일 보도한 <"그들은, 거의 무직"…장시호와 사촌들, 화려한 과거>를 보면, '최태민 3세'들과 장시호의 여느 재벌가 못지않은 화려한 삶은 그 어떤 품위나 품격, 존엄을 찾아보기 힘들다. <밀회>가 다시 떠오른 것도 사실 이 대목이었다.

취재한 듯, 정성주 작가가 예견한 <밀회>의 진짜 속내   

 2014년 방영된 드라마 <밀회>의 인물관계도.

2014년 방영된 드라마 <밀회>의 인물관계도. ⓒ JTBC


"그 사람들 기분 좋게 돈 쓰게 하고, 그걸로 돈 벌고, 그런 걸 두루 돕는 게 내 일이야. 먹이사슬, 계급, 그런 말 들어 봤어? 나는 그 중간쯤 되겠지, 우아한 노비? 꼭대기는, 그 여자가 아니라 돈이다. 아니구나. 진짜 꼭대기는, 돈이면 다 살 수 있다고 끝도 없이 속삭이는 마귀."

<밀회>의 오혜원(김희애 분)은 대기업 산하 예술재단을 실제 운영하는 기획실장이다. 그래봤자, '우아한 노비'다. 회장님은 물론 사모님인 예술재단 이사장, 친구인 아트센터 대표의 시중까지 들어야 한다. 말이 시중이지, 회장의 채홍사 역할까지 도맡아야 했다. 침대 위 송사를 포함 각종 지저분한 일까지 처리하면서 오혜원이 얻은 것은 마귀가 속삭이는 그 돈이요, 일말의 지위와 권력이다.

<밀회>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렇게 '마귀'에 홀려 살아가던, 심지어 한때 예술과 (클래식)음악에 심취했던 오혜원이 어떻게 구원받고 새로운 '오혜원'으로 태어나느냐. 정성주 작가는 그 원동력을 다시 예술과 사랑에서 찾았다. 스무 살이나 어린 이선재(유아인 분), 순수한 사랑과 예술적 영감을 믿고 또 실천하는 그 선재와의 사랑과 각성을 통해 오혜운은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순수한 사랑과 예술. 나이브한 주제와 결말 아니냐고. <밀회>가 그린 '오혜원의 세계'는 사실 그러한 (대통령이 오염시킨 언어가 아닌 진짜) '순수한 마음'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먹이사슬이요, 계급 사회의 지옥도였다. 2년 후에야 만천하에 드러났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집어삼킨 탐욕과 유착의 고리들은 실로 견고하고 광범위하지 않았나.

정성주 작가가 마치 취재를 통해 현실에서 가져온 듯한 장면만 봐도 그렇다. 드라마 속 명문대 피아노학과 부정 입학을 필두로 이름까지 똑같은 극 중 정유라의 잦은 결석과 무속인이자 투자전문가인 엄마의 대학 방문은 최순실 모녀의 이대 농락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밀회>는  두 모녀가 독일로 도피를 가는 것으로 끝을 냈지만, 현실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바대로 더 드라마틱하다.

2016년, 현실의 '오혜원들은

 드라마 <밀회> 속 오혜원의 최후 변론 장면.

드라마 <밀회> 속 오혜원의 최후 변론 장면. ⓒ JTBC


아트센터 대표의 애인이 누구를 연상시키는 호스트바 출신이라거나, 극 중 정유라의 출석을 부르던 교수가 뒤이어 '최태민'을 호명하는 장면은 사실 정성주 작가의 인장과도 같다. 이 부분이 더 화제가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밀회>가 2년 후에 터진 이 참사와도 같은 시국에 예술로서의 인장을 새기는 이유는 오혜원의 참회를 기어코 보여주고 실현시키기 때문이다.

"제가 주범이 아니라는 말로 선처를 구할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행한 모든 범법행위는 누구의 강요도 아니고 오직 저의 선택이었습니다. 잘못된 거죠. 그 덕에 저는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법인카드, 재단 명의의 집, 자동차, 고용인.

저의 성장 배경이나 저 혼자만의 능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라 그 모든 걸 다 진짜 제 걸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제가 포기한 음악의 세계에도 마음껏 힘을 행사하고 싶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던 것처럼 유전자에 저금이 돼 있는 것처럼 아무도 뺏지 못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재단 관련 비리에 연루된 오혜원은 결국 법정에 서서 자신의 죄를 모두 인정한다. 물론, 드라마라 가능한 이선재와의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생의 대차대조표"라거나 "인생의 명장면"으로 표현한 그 사랑으로 인해 오혜원은 "심지어 나라는 인간이 나 자신까지도 성공의 도구로만 여겼"고, "저를 학대학고 불쌍하게 만든 건 바로 저 자신이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정성주 작가는 이러한 결말을 통해 어쩌면 비대하고 비정상적인 권력을 함께 키워준 것은 어쩌면 오혜원과 같은 '우리들'일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그 오혜원도 죄인이고, 그 오혜원과 같은 삶을 살지도 모르는 우리들 역시 '공범'일수 있다는 일깨움. 자성이 필요한 '부역자'들이 차고 넘친다는 일리있는 비판.  이쯤 되면, <밀회>가 누구를 비판하고 그 비판점들을 포함해 누구에게 말을 걸고 있느냐가 확실해지지 않는가.

2016년 11월로 돌아와 보자. 최순실의 도피를 도왔던 이들,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참여했던 이들 역시도 현실의 '오혜원'들이다. 예술과 대중문화와의 접점을 고려하면, 아마도 구속된 차은택 정도가 딱 들어맞는 인물이 아닐는지. 유명 광고 감독에서 문화계를 좌지우지하며 각종 이권을 챙겨온 그 차은택 말이다.

<밀회>의 오혜원은 떳떳하게 죄를 인정하고 구속됐다. '연하남'이자 '제자' 이선재가 있어서라고 하기엔, 드라마 속 그의 참회는 더없는 진심이었다. 반면 현실 속 최순실과 차은택의 참회와 눈물을 목도하는 일은 여전히 버겁고 힘들다. 정유라는 여전히 도피 중이고, 장시호가 반성 중이란 보도는 듣도 보도 못했다. 더 나아가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사과와 눈물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언제나, 현실이 영화를, 드라마를, 서사를 이긴다. 

밀회 최순실 정유라 장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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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오마이뉴스 23년차 직원. 시민기자들과 일 벌이는 걸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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