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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가 풍류를 즐겼던 세연정 모습
 윤선도가 풍류를 즐겼던 세연정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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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버디 몃치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의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 박긔 또 더야 머엇리." "쟈근거시 노피 떠셔 만물을 다 비취니, 밤듕의 광명(光明)이 너만니 또 잇냐, 보고도 말 아니 니 내 벋인가 노라"

윗글은 조선 중기 문신이며 시인인 고산 윤선도(1587~1671)의 <고산유고>에 실려 전하는 서시와 끝 수 내용이다(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하늘아래 치욕을 당했는데 어찌 살 수 있겠는가?" 한탄하며 은둔생활을 하기위해 제주도로 향하던 윤선도는 뜻하지 않게 보길도에 둥지를 틀었다. 보길도에 머물면서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달 다섯을 벗삼아 <오우가(五友歌)>를 짓고 노래하며 현실정치의 무상함을 달래면서 변하지 않는 다섯 벗을 찬양했다.  

망국의 치욕 느껴 은둔생활하기 위해 제주로 가려다 머문 보길도

윤선도는 병자호란 때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제주도로 향하다 보길도의 자연경관에 감동하여 머물렀다. 제주도행 바람을 기다리다 태풍을 만나 떠나지 못한 그는 격자봉에 올라 신선이 놀고 갈만한 곳이라 하여 '선경보길도'라고 탄복한 후 "하늘이 나를 위해 예비해 놓은 곳"이라며 보길도에 정착했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남긴 흔적은 여럿 있다. 윤선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부용동과 세연정을 위시하여 돛단배를 타는 시절 제주도로 가기위해 바람을 기다리던 대풍기미,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쉬어가기 좋은 곳이라는 의미의 정자리, 윤선도가 제주도행을 포기하고 섬에 오른 등문, 윤선도가 이곳으로 들어와서 손님을 맞이하고 보냄에 있어 사심이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이별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 청별리. 청별리는 현재 보길도 소재지로 건너편 노화도 중심인 이목리와 마주보고 있다.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룬 세연정

전시실에는 윤선도가 한글로 쓴 <어부사시사>가 보인다
 전시실에는 윤선도가 한글로 쓴 <어부사시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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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는 윤선도가 51세 때부터 13년간 글과 마음을 다듬으며 <어부사시사><오우가>와 같은 훌륭한 시가문학을 이루어 낸 곳이다. 보길도에는 동양의 자연관과 성리학의 사상이 흐르고 있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통해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도록 한 윤선도의 뛰어난 안목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세연정(洗然亭)이다.
 
세연이란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 지는 곳'이란 뜻으로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때 지은 정자다. 윤선도는 섬의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부용동이라 이름짓고, 섬의 주봉인 격자봉 밑에 낙서재를 지어 거처를 마련했다.
고산 윤선도가 기거하며 후학을 길러낸 낙서재 모습
 고산 윤선도가 기거하며 후학을 길러낸 낙서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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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은 두 차례의 귀양을 가고 벼슬을 하여 서울로 가거나 해남의 금쇄동 등에서 지내기도 했으나, 낙서재에서 삶을 마치기까지 섬 여기저기에 세연정, 무민당, 곡수당 등 건물을 짓고, 바위 등 자연의 경승에 대(臺)의 명칭을 붙였다. 이 정자와 대가 모두 25여 개소에 이르며 오우가, 산중신곡 등 많은 가사와 유명한 어부사시사를 비롯하여 자연을 노래한 많은 시를 남겼다.

일행을 안내한 분은 보길정자교회 임영기 목사다. 32년 전 해남에서 보길도로 이사와 목회를 하는 임영기 목사는 12년 전 정자리에 있는 폐교를 사들여 보길정자교회를 세우고 주민들과 힘을 합쳐 마을공동체를 건설하고 있다. 다음은 임 목사가 세연정에 관해 안내한 내용이다.

윤선도 유적을 대표하는 세연정

세연정 앞에 있는 연못은 500여년전에 만들었지만 한번도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물이 많이 쏟아져 들어오면 구부러진 모서리에 부딪혀 속도가 줄도록 과학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세연정 앞에 있는 연못은 500여년전에 만들었지만 한번도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물이 많이 쏟아져 들어오면 구부러진 모서리에 부딪혀 속도가 줄도록 과학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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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기념물 제37호인 부용동정원은 윤선도의 유적지이다. 유역면적 3천여 평의 세연정은 부용동 입구에 있다. 세연정을 중심으로 연못(205여 평)과 계담(600여 평)과 판석재방과 동대, 서대, 옥소대, 칠암, 비홍교와 동백나무, 대나무,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소쇄원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정원인 세연정은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에서 '원림'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세연정 상석에서는 회수담 건너편에 있는 '동대'와 '서대(높이 2.2m, 길이7.5m정방형) 위에서 무희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광경을 보고 즐겼다.

연못에 고인 물이 썩지 않게 하기 위해 물이 돌아나가도록 만든 '회수담' 연못 속에는 중간 중간에 바위들이 있어 물이 돌아나가도록 설계돼 있다. 회수담으로 통하는 물길위에는 '오입삼출다리'가 있다. '오입삼출'이란 물이 들어가는 입구의 구멍은 5군데이지만 나가는 구멍은 3군데라는 의미로 수위를 조절하기 위한 장치다.

우주를 생각하고 만들었다는 돌다리, 판석보 

속이 비어 공명하는 다리인 '판석보'로 다리, 보, 폭포의 세 가지 역할을 했다
 속이 비어 공명하는 다리인 '판석보'로 다리, 보, 폭포의 세 가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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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고목 소나무와 정자가 닿을 듯 말듯하고, 소나무와 연꽃이 닿을듯 말듯한 경치를 '세연고송'이라고 부르며 보길도 8경 중 2경에 속한다
 멋진 고목 소나무와 정자가 닿을 듯 말듯하고, 소나무와 연꽃이 닿을듯 말듯한 경치를 '세연고송'이라고 부르며 보길도 8경 중 2경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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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정에서 옥소대로 건너가는 판석보는 네모난 다리지만 예사 다리가 아니다. 연못에 물이 고이도록 보의 역할을 하지만 속이 비어서 공명하는 '굴뚝다리' 역할을 한다. 속이 비었기 때문에 물이 넘칠 때 폭포소리가 울린다. 즉, 다리와 보, 폭포의 3가지 역할을 하는 과학적인 다리다.

세연정을 향한 보길초등학교 담장너머에는 동백나무가 여러 그루 심어져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교장관사였던 이곳에서 세연정을 바라보는 경치가 보길도 8경 중 2경에 속한다.

멋진 고목 소나무와 정자가 닿을 듯 말 듯하고, 소나무와 연꽃이 닿을 듯 말 듯한 경치를 '세연고송'이라 부른다. 임영기 목사가 보여줄 게 있다며 따라오라고 해 간 연못주변에는 커다란 나무 그루터기 하나가 보였다. 임영기 목사의 설명이다.    

"30년 전에는 일인들이 심었던 벚나무 100여 그루가 있었는데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해 벚나무를 제거하고 동백나무를 심었습니다."

계담에 있는 '흑약암'은 커다란 황소를 닮았다. '흑약제연'이란 효사에서 따온 말로 '뛸 듯하면서도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뜻이다. 임영기 목사가 가리키는 나무 그루터기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심었다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잘라버린 벚나무 밑둥이다
 계담에 있는 '흑약암'은 커다란 황소를 닮았다. '흑약제연'이란 효사에서 따온 말로 '뛸 듯하면서도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뜻이다. 임영기 목사가 가리키는 나무 그루터기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심었다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잘라버린 벚나무 밑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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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지 계담에 있는 칠암 중의 하나인 '혹약암'은 커다란 황소를 닮은 바위이다. 이 바위는 '혹약제연'이란 효사에서 따온 말로, "뛸 듯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뜻이다. 즉, 혹약암은 마치 힘차게 뛰어갈 것 같은 큰 황소의 모습을 닮은 바위를 말한다. "3정승을 준다해도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때가 되면 뛸 수도 있었다는 정치적 야망을 숨긴 말이 아닐까?

윤선도 시절 사용한 사설 봉화대와 일제강점기 시절의 신사터

임영기 목사로부터 깜짝 놀랄 질문을 받았다. "산정상이 아닌 평지에 있는 봉화대 본 적 있습니까?" "에이! 말도 안돼!"라고 일축한 후 설명을 요구하자 임 목사가 대답했다.

일행을 안내한 임영기목사가 서있는 뒤편에는 윤선도가 주연을 즐길 때 2킬로미터 떨어진 낙서재와 연락하기 위한 사설 봉화대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봉화대터에 신사를 만들어 학생들로 하여금 강제로 참배케 했다고 한다
 일행을 안내한 임영기목사가 서있는 뒤편에는 윤선도가 주연을 즐길 때 2킬로미터 떨어진 낙서재와 연락하기 위한 사설 봉화대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봉화대터에 신사를 만들어 학생들로 하여금 강제로 참배케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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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를 즐겼던 윤선도가 기거하며 독서를 하고 후학을 가르친 낙서재는 세연정에서 2㎞쯤 떨어져 있습니다. 잔치를 하다 술과 안주가 떨어지면 봉화를 올려 주안상을 조달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시절  보길공립초등학교를 졸업한 전임교장 박창희(1회 졸업생)씨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뒤편과 연못사이에 있는 옛 봉화대 터에 신사를 세우고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고 합니다."

고산 윤선도의 세연정을 구경하다 일본의 대표적 정원 중 하나인 교토 '은각사' 모습이 떠올라 자연스럽게 두 정원이 비교됐다. 필자는 8년 전 일본의 대표적 정원 중의 하나라고 알려진 '은각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15세기에 만들어진 '은각사'는 '금각사'의 화려함과는 달리 소박하고 검소한 모습이었다. 정원에 들어서면 후지산 비슷한 모래 탑이 보였다.

일본의 대표적 정원인 교토의 '은각사' 모습으로 하얀모래는 바다의 파도를 상징하며 소나무 아래 봉화대처럼 솟아오른 하얀 모래탑은 후지산을 상징한다. 지나치게 인위적인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대표적 정원인 교토의 '은각사' 모습으로 하얀모래는 바다의 파도를 상징하며 소나무 아래 봉화대처럼 솟아오른 하얀 모래탑은 후지산을 상징한다. 지나치게 인위적인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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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원의 특징은 자연에 가까운 경관을 조성한다는 점이다. 경관 조성의 원칙은 규모의 축소, 상징화, 경치의 차경(借景)이다. 먼저 규모의 축소는 산과 강의 경관을 축소하여 제한된 공간을 재현한다. 둘째, 상징화는 예를 들어 흰모래가 바다를 상징하는 데 쓰이는 것과 같은 추상성이다. 셋째, 차경이란 주위의 자연 경관을 정원의 일부로 이용하는 것이다.

은각사 정원이 주변경치를 축소, 상징하고 차경하는 인위적 모습인데 반해 세연정은 자연을 그대로 원용하고 기발한 착상과 자연과의 절묘한 조화를 바탕으로 구성된 한국 최고의 정원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세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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