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엊그제 세차게 몰아치던 비바람이 그치니 하늘이 두 배로 높아졌다. 교정에도 푸른 가을빛이 완연하다. 초록의 나무들과 황토색 운동장도 눈이 시린 푸른 하늘로 인해 더욱 선명하다. 숨 막힐 듯 푹푹 삶아대던 지난 여름 더위도 어느새 아스라한 추억으로 남았다.

반바지에 반팔 차림이던 아이들도 가을빛 춘추복으로 갈아입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무에 매달린 매미 마냥 에어컨 아래 들러붙어있더니만, 여기저기서 춥다며 창문 닫으라는 소리가 시끄럽다. 몇몇 아이들은 벌써부터 두툼한 방석과 무릎 담요를 챙겨왔다.

날씨도 풍경도 다 가을옷으로 갈아입었지만, 수업시간 교실의 모습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조금도 느낄 수 없다.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일지는 몰라도 독서의 계절이라는 건 다 헛말인 듯싶다. 요란한 시작종에도 아이들은 엎드린 채 미동도 없다. 교탁을 두드리고 손뼉을 연거푸 쳐보지만, 일일이 다가가 흔들어 깨우지 않는 한 그들을 일으켜 세울 수 없다.

이따금 나나 그들이나 '좀비'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렵사리 깨워봐야 채 5분도 안 돼 다시 쓰러진다. 시험에 그대로 출제하겠다는 '당근'도, 수업태도 점수를 감점한다는 '채찍'도 그들에겐 당최 통하지 않는다. 지금껏 영상 활용 수업과 토론 수업, 심지어 선물을 걸고 하는 역사 퀴즈 방식까지도 동원해봤지만 그들의 흥미를 이끌어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수능에서 필수 과목으로 지정됐으니 열심히 공부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은, 적어도 그들에겐 틀렸다. 어차피 공부할 아이들은 필수든 선택이든 열심히 준비하고, 공부에 흥미를 잃은 아이들은 이렇든 저렇든 관심 밖이다. 한국사가 수능 필수 과목이 되었어도, 하위권 아이들의 성적엔 거의 차도가 없다. 갈수록 양극화해가는 점수 분포가 그것을 증명한다.

사실 아이들을 공부시키는 데 있어서 오로지 시험으로 동기 부여를 하려는 건, 게도 구럭도 다 잃는 낡은 방식이다. 시험에 나오면 공부하고, 그렇지 않으면 손놔버리도록 유도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이는 공부의 재미와 의미를 알아가는 데 방해가 될 수밖에 없다. 차라리 매질을 해서 지식을 욱여넣을지언정, 오로지 시험만을 위해 공부하는 현실은 성찰이 시급하다.

"역사만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가 역사를 미주알고주알 알아야하는 이유를 솔직히 모르겠어요. 역사 공부가 무슨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받고 증명하는 절차라도 되는 건가요?"

퀭한 눈의 아이들을 부러 깨워 앉혀놨더니, 한 아이가 마뜩찮은 표정으로 따지듯 질문을 던졌다. 딱히 그 이유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역사 공부가 싫다는 뜻을 에둘러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곁에 있던 아이는 수학에 빗대어 미적분은 몰라도 사칙연산만 할 줄 알면 세상 살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없다며 거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험만 없다면 누가 공부하겠느냐는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아이들은 틀림없이 하품으로 대꾸했을 것이다. 분명 그보다 더 명쾌한 답변은 없을 테지만, 아이들은 그런 '모범정답'에 더 이상 감동을 받지 않는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현실 속 사례를 들어 설명해주지 않으면, 그 어떤 금언도 그들에겐 '공자 왈 맹자 왈'일 뿐이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기력한 아이들의 눈빛이 반짝인 순간

"너 역사 공부 안 하고 그렇게 잠만 자면, 나중에 설현과 티파니처럼 욕먹게 될지도 몰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최소한 기본적인 역사 지식 정도는 알아야하지 않겠니? 시험 잘 보고 못 보고는 그 다음 문제야."


"최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대하는 일본 총리의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고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니? 우리 국민들을 '무뇌아'로 보지 않는 다음에야 어찌 그런 망언을 서슴없이 내뱉을 수 있을까? 눈 부릅뜨고 이를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역사를 열심히 공부해야한다고 생각해."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갑자기 뜻밖의 '원군'을 만났다. 시키지 않아도 아이의 질문을 친구들이 받아서 그들의 언어로 답한 것이다. 그들에겐 얼마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설현과 티파니, 그리고 최근 아베 총리의 행태가 그 어떤 금언보다 역사 공부에 큰 동기 부여가 된 셈이다. 질문을 던진 아이는 순간 멋쩍어하면서도 친구들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한쪽에서는 조롱과 냉소가 버무려진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아베 총리의 망언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분개했지만, '역사를 모르는 아이돌'에 대해선 앞 다퉈 그들의 변호인을 자처하는 모양새였다. 익숙한 연예인 이름이 오르내리자 책상 위에 시체처럼 엎드려있던 아이들이 하나둘 깨어났고 이내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우리 반에 애국자들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네. 대통령이 큰 상이라도 내려야 할 것 같은데."

"전 세계적으로 한류 바람을 일으키며 나라의 이름을 빛내고 있으니, 되레 칭찬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해. 걸 그룹 멤버들이 그깟 역사 좀 모른다고 손가락질할 필요는 없지."

"그건 아니지. 유명한 연예인일수록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클 테니, 공인으로서 처신에 신경을 써야하지 않겠니? 나도 그들의 광팬이긴 하지만, 그들의 무지를 당연시 여기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해."

"그건 지나친 기대 아닐까? 우리가 연예인들에게 바라는 건 그게 아니잖아. 영어 선생님더러 수학 문제 못 푼다고 나무랄 순 없듯이, 연예인이 얼굴 예쁘고 춤 잘 추고 노래 잘 하면 됐지, 뭘 더 바래? 그들이 무슨 역사학자냐?"

진도도 못 나간 데다 몇몇 아이들의 엇나가기만 하는 조롱과 냉소가 듣기 거북했지만, 어떻든 역사 공부에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나름 의미 있는 수업이라고 위안 삼았다. 어쭙잖게 끼어들기보다 그들의 언쟁을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역사를 공부해야하는 이유를 두고 토론이 벌어지는 것도 낯설었지만, 무기력했던 아이들이 살아 꿈틀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했다.

간만에 '살아있는' 아이들을 보노라니 참 좋았다. 교과서와 칠판에 적혀 있는 학습목표는 무색해졌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조차도 아이들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역사를 공부해야하는 이유는 교과서의 머리말에서 살짝 다루고 넘어갈 게 아니라, 두고두고 곱씹어야할 역사교육의 본령일 테니 한낱 그때그때의 학습목표에 견줄 바가 아니잖나.

바로 그때, 뜨거운 토론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한 아이의 외마디 발언이 튀어나왔다.

"쓸데없는 이야기 그만하고, 시험이 코앞인데 이제 진도 나가죠."

반에서 1, 2등을 다투는 그의 날선 말에 왁자지껄하던 교실 분위기가 순간 '숙연'해졌다.

다시 교실은 잠깐 정신을 놓고 있었다는 듯 부랴부랴 교과서와 노트를 펼치는 '범생이'들과, 익숙한 대로 다시 책상에 엎드리는 아이들로 확연히 갈라졌다. 교실 풍경이 이십여 분 전 시작종이 막 울렸던 그때 그 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범생이'들의 요구도 챙기고, 동시에 무기력한 아이들도 깨울 수 있는 묘책이 어디 없나 머리를 싸매니, 되레 무력감이 몰려왔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