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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위도>
 소설 <무위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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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소주(蘇州) 체체염방.
관조운은 혁련지가 따라주는 작설차의 그윽한 향기를 음미했다.

"사형은 언제 관가장에 들어가셨어요?"   

"한 달 정도 됐어."

"그새를 못 참고 여기로 도망쳐 왔나요?"

"음……, 선비의 유람이고, 대장부의 주유라고 해두지." 

"대장부치고는 행적이 초라하네요. 상행(商行)에 여념 없는 아낙이나 찾아 왔으니. 형수님께서 아시면 무어라 하시겠어요."

"소주와 양주에 와보지 않고 어찌 천하의 흐름을 알 것이며, 상업과 거래를 모르고 어찌 인세(人世)의 본류를 알 것인가. 그렇게 둘러댔지."

혁련지가 자신의 잔에도 작설차를 따른 다음 관조운을 향해 찻잔을 들었다. 

"사형, 태허진인께서 남기신 유품에 쓰인 시를 저한테 옮겨주셨잖아요."

"'네 제자를 생각하며(思四弟子)' 말인가."

관조운은 새삼스레 그건 왜 묻냐는 표정을 지었다. 

"퉁소와 문병에 적힌 시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림과 부채에 적힌 시는 언제 외웠죠?"

"소림 탑림에서 꺼낸 유품을 대나무통에 넣으면서 그림과 부채를 잠깐 펼쳐보았어."

"한번 보고 외웠군요."

"워낙 중요한 것이다 보니 단번에 뇌리에 박힌 거지."

"저랑 한번 읊어봐요."

"그럴까."

아, 아, 관조운이 짐짓 시구를 떠올리는 듯 목청을 가다듬으며 창가로 갔다. 창밖엔 짐을 가득 실은 배들이 운하를 오갔다. 혁련지도 관조운의 옆에 가서 나란히 섰다. 서산너머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해가 운하의 물길을 발갛게 색칠하고 있다. 잠시 후 관조운이 제목을 읊조리자 혁련지가 첫 행을 읊었다. 이어 그들은 나머지 행을 번갈아 읊었다.

思四弟子   (사사제자)
"네 제자를 생각하며"

太生春櫻 飛花雨   (태생춘앵 비화우) 
천지가 소생하는 봄에 핀 벚꽃은 꽃비가 되어 날리고
還鄕慓燕 跳撒水  (환향표연 도살수)
고향으로 돌아온 날쌘 제비는 물을 가르며 날아오르네
行雲滿月 深夜春   (행운만월 심야춘)
구름이 보름달을 지나가니 봄밤은 깊어만 가고
四弟故情 歲磨燦  (사제고정 세마찬)
네 제자의 오래된 정은 세월 속에 닳아서 더욱 빛나네
蛟龍落水 飛昇天  (교룡낙수 비승천)
떨어지는 물을 맞던 교룡은 하늘로 날아오르고
仰天揮酒 萬年情   (앙천휘주 만년정)
하늘을 우러러 술잔을 높이 들면 만년의 정이 쌓이도다
桃花時節 請弟會   (도화시절 청제회)
복숭아꽃 피는 계절에 제자들이 모일 것을 청하노니
江湖恩怨 何盡忘   (강호은원 하진망)
강호의 은원일랑 잊고 털어냄이 어떨까

시를 읊으니 새삼 스승 모충연과 세 분 사숙의 기구한 운명이 떠올랐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숙연한 기분이 들어 노을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혁련지가 입을 열었다.

"사형, 이 시에서 뭔가 찾은 것이 있어요?"

"느낀 점이 아니고?"

"그래요. 제가 말하는 건 시적 감상이 아니라 시에서 추리할 수 있는 이면의 지시에요."

"그러니까, 사매는 이 시에서 뭔가 지시하고 있다, 그런 의미인가?"

관조운이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맞아요, 진인께서는 무극진경의 행방을 이 시에다 숨겨놓은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한 거지?"

"사람들은 모두 네 유품에 적혀 있는 무극이십사요결(要訣)(주)과 그림에만 신경을 썼어요. 그것이 진경의 행방을 암시하거나 혹은 진경과 관련한 일종의 단서라고 추측한 거죠. 그런데 셋째 기사숙을 뵙고 나니 그 요결은 수련 과정에서 성취한 도의 경지를 묘사한 것뿐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진인께서는 사람들의 관심을 거기로 유도해 놓고, 진짜로 중요한 건 의외로 시에다 숨겨 놓았던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그 시는 그저 진인께서 제자들을 생각하는 시정(詩情)으로만 생각했던 거죠."

관조운은 눈을 감고 시를 다시 떠올렸다. 이윽고 눈을 뜨고 말했다.   

"글쎄, 시어(詩語)의 의미로만 파악해서는 장소나 행방을 가늠하기가 어려운데. 마지막 연에서 복숭아꽃 피는 시절에 제자들이 모이라는 게 무엇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는 시 전체를 관통하는 봄날과 제자들 간의 우애, 이 둘을 강조하는 시의(詩意)의 결말 정도로만 읽힐 뿐인데……."

혁련지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각 구(句)마다 전경후정(前景後情)을 읊는 전형적인 율시이지만 실은 장소적 의미를 교묘하게 숨겨놓았어요. 근데 사형은 문사(文士)가 아니랄까봐 시를 율격(律格)으로만 바라보니 보이지 않을 뿐이에요."

"격식에 갇힌 자의 한계라는 건가?"

"답은 시 안에 있어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관조운은 시를 다시 떠올리며 입으로 읊조렸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난 알 수가 없는데."

"각운(脚韻)에 대칭되는 구의 첫 글자에 답이 있어요."

"칠언율시의 각운은 1, 2, 4, 6, 8 구의 마지막 글자이니 이에 대칭된다면 3, 5, 7 구의 첫 글자란 말인가?"

"네, 그래요. 여기에 첫 행의 첫 글자를 연결해 보세요."

혁련지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태(太), 행(行), 교(蛟), 도(桃)는 두운(頭韻)인가?"

"아네요, 첫머리 운율을 맞추려는 게 아니라 장소를 말하는 거예요."

"아, 태행이라면 대행산을 말하는 거로구만. 그럼 교(蛟)와 도(桃)는?"

관조운이 무릎을 치며 말했다.

"교는 교룡을 일컬음이고 물이 떨어져 용이 승천하는 곳이 어디겠어요?"

"물론 폭포지."

"네, 맞아요. 태행산의 폭포를 얘기하는 거예요."

"팔백팔십 리 그 넓은 태행산에 폭포만 해도 수천 개일 텐데……. 과연 그 중 어디란 말인가……. 아, 도화시절이라면 대행산의 도화곡(桃花谷)?"

관조운이 다시 탄성을 질렀다.

"맞아요, 도화곡의 폭포."

혁련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매, 우리……?"

관조운이 미처 말을 다하기도 전에 혁련지가 검지를 들어 관조운의 입에 살짝 대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눈빛은 단호했지만 입가엔 미소가 어리었다.

추분이 지났건만 소주의 운하를 드나드는 바람은 아직 따뜻했다.

<끝>

(주) 오원자 유일명(悟元子 劉一明) 조사의 '단법24결(丹法二十四訣)'의 요체를 인용.
凝神生虛(응신생허) 虛玄通化(허현통화)
化精爲氣(화정위기) 氣達心開(기달심개)
開眞煉形(개진연형) 形熟歸無(형숙귀무)
無極有妙(무극유묘) 妙光是道(묘광시도)

연재를 마치며

"열불 나는 세상 소식판의 한 귀퉁이에 재미가 고여 있고, 용기를 북돋우는 샘이 하나쯤 있는 것도 괜찮을 성 싶습니다. 권모술수가 판치는 강호에서 좌충우돌하는 주인공의 분투가, 왜소한 현실을 잊기 위한 당의정으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추악한 현실에 당당히 맞서는 의협의 모습으로 읽히기를 바라며 무협소설 연재를 희망합니다."

2년 6개월 전 <오마이뉴스> 편집부에 연재신청 기획안을 제출하면서 적은 글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열불 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더 심해져 열불 나다 못해 터져버릴 것 같은 세상입니다. 마음 같아선 무극진경을 관조운의 손에 쥐어주고 극강의 무공으로 악당들을 확 휩쓸어 버리고 싶지만, 이게 바로 악당들이 원하는 세상 아니겠습니까.

잠잠한 강호, 고요한 천하. 조용한 질서 속에서 강자의 욕망만 인정되는 천하는 사는 재미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정의롭지도 못한 세상일 것입니다.

'무위도'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시중에 떠도는 무협판타지물과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 역사적 사실(史實)에 입각해 시대적 배경을 설정했습니다. 명나라는 초기 영락제까지 무력에 기반한 강력한 통치력을 보여주다가 이후 급격히 쇠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유연하지 않은 권력은 측근의 농간에 의해 변질되는 게 일반적인 속성입니다. 환관의 농락으로 권력의 질이 형편없이 떨어진 명나라 조정은 '성화제'에 이르러 잠깐 안정된 치세를 보입니다. '무위도'는 성화제가 보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직은 불안하면서도 권력의 안정화를 꾀하는 시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택했습니다.  

둘째, 무공이나 대결장면을 리얼하게 그려보려고 했습니다. 따라서 전음입밀이니 역용술이니 하는 무협판타지 특유의 장치는 배제했습니다. 대결 장면은 초식보다는 자세에 치중하고 구체적인 동작을 묘사하는 데 치중했습니다. 어느 독자분이 지적했듯 리얼한 측면을 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셋째, 단행본 한 권 정도 분량으로 맞추었습니다. 너무 긴 분량은 작가의 역량도 모자라거니와 밀도가 떨이지기 때문입니다. '무위도'는 200자 원고지 2550매 내외입니다. 그밖에 일부러 한자어와 고어체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가독성을 방해할 수도 있겠지만 나름 리얼리티를 살리고자 한 의도였습니다.

고백하자면 애초 구상했던 스케일이 축소된 점은 있습니다. 눈 밝은 독자라면 눈치채셨겠지만 무림맹의 수경대와 금의위가 갈등의 한 축을 담당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스토리가 복잡해지고 분량이 너무 늘어나 작품 전체의 밀도가 떨어질 것 같았습니다. 차라리 단행본 분량으로 길이를 맞추고, 등장인물 수를 간결하게 한 다음 갈등의 깊이를 더하자고 목표를 수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결말을 살짝 열어놓았습니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2부를 구상하겠습니다.  

연재를 허(許)해준 <오마이뉴스>에 감사를 드리며, 2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다시 격려해주신 독자분들께 다시 한번 사죄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탐욕과 탐욕이 충돌할 때 틈이 생기고, 그 틈을 파고드는 검(劍)이 있습니다. 예리하지 못한 검은 틈을 파고들 수 없고, 예리함은 평소에 벼려야합니다. 아수라 세상, 강호제현께서 부디 검을 벼르고 벼리시길.        

변방의 해풍 속에서,
황모 포권

덧붙이는 글 |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의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태그:#무위도 108, #무위도, #황인규, #무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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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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