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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 알밤을 물에 담그면 속에서 밤벌레가 나온다
▲ 알밤 손질 주은 알밤을 물에 담그면 속에서 밤벌레가 나온다
ⓒ 김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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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목 바지저고리에 밀짚모자를 쓰고 목장갑에 장화까지 신은 남편의 모습은 제법 그럴싸한 농부 같다. 나도 헐렁한 면 셔츠에 통 넓은 바지를 챙겨 입고 양말목을 바지 위로 올리고 장화를 신고 장갑을 꼈다. 챙 넓은 모자도 썼다.

이렇게 입성을 야무지게 하지 않으면 벌레들이 옷 속으로 스며들어서 온몸을 물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는 남편이 쓰쓰가무시병에 걸려서 생사를 넘나든 적도 있었다. 이렇게 둘이서 거창하게 폼을 잡고 하는 일은, 뒷동산에 올라 (시댁이 40년 전에 심은) 밤나무에서 떨어진 알밤을 줍는 것이다.

산이 집 뒤뜰과 이어져 있지만 나무들이 너무 우거진지라 무서워서 순금이(진돗개)도 데리고 갔다. 산짐승도 무섭지만 나는 뱀이 더 무서워서 긴 작대기로 땅을 연신 쿵쿵 찧어야만 했다.

작고 맛있는 토종알밤은 이미 다람쥐나 청솔모가 싹쓸이해 가고 없었다. 남아 있는 밤은 굵기는 하지만 단맛이 적다. 그나마 벌레가 먹어서 밤알이 가볍다. 두 양동이 정도를 주워서 물에 담그니 그새 하얗고 살찐 밤벌레가 기어 나와서 둥둥 뜬다.

벌레 먹은 밤은 물에 뜨니 가려내기도 좋다. 둘이서 이마를 맞대고 벌레 먹은 밤을 골라내고 있는데 지나가시던 할머니가 말을 거신다.

"거그서 뭐혀?"
"밤을 주웠는데 먹을 게 별로 없네요."
"그랴? 이 참 축하허네. 내가 다리가 부실혀서 상 타는디 못 가봐서 미안쿠만."

소문이 나서 붓글씨를 가르치게 된 남편

고향으로 낙향한 화가가 서예 붓을 잡았다.
▲ 황윤수 화가 고향으로 낙향한 화가가 서예 붓을 잡았다.
ⓒ 김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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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나이 70세 가량의 어른 학생들의 붓글씨 시간.
▲ 열공하시는 어른들 평균 나이 70세 가량의 어른 학생들의 붓글씨 시간.
ⓒ 김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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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귀향 겸 귀촌한 지 올봄으로 만 10년을 넘겼다. 장성에서 나고 자라 고등학교까지 졸업을 하고 대학 진학을 하는 바람에 서울 살이 41년을 하고 돌아온 고향이다.

설과 추석, 부모님 생신 때, 1년에 평균 네 번은 내려왔었지만 볼일이 끝나면 바로 상경하는 까닭에 친구들이나 친척들을 만나서 차 한잔 할 여유도 없는 생활이었다. 그러다가 귀향을 하니 다정한 친구도 없고, 살뜰하게 말 한마디 걸어주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소문이 나서 후배 한 분이 일부러 모임을 만들어서 사람들과의 만남이 시작됐고, 필암서원에서 붓글씨를 가르치게 됐다. 남편은 다섯 살 때부터 백부님께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연필이 아닌 붓으로 글씨를 썼단다.

성인이 되어서도 쉬지 않고 꾸준히 좋은 선생님께 서예를 배우면서 써 온 붓글씨이기에 필력으로 치면 65년을 써온 셈이다.

필암서원에서 6년을 재능기부를 했더니 시나브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몇 군데서 글씨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이 왔다. 남편은 기꺼운 마음으로 수락했고 덕분에 무료하지 않은 시골 생활을 했다.

남편에게는 작은 철칙이 있었다.

그것은 '공부는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기에 학력은 절대로 자랑거리가 아니라는 것과 재능은 나누는 게 당연하니까 떠벌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덕분에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생겼다. 남편이 서예 대상을 타자 군청에서 보도 자료를 배포했는데, 남편의 전직을 '초등학교 교사'로 쓴 것이다. 실제로는 남편은 '고등학교 교사'였고 대학강사로도 일했다. 나는 군청 담당자에게 전화를 해서 잘못된 정보라며 정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남편은 나와 성격이 달라 빙긋이 웃기만 하고 아무 말이 없다. 나는 발끈하며 괜히 남편에게 시비를 걸었다.

"당신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에요. 혹시라도 나를 아는 사람들이 이 기사를 읽어봐요. 그러면 '남편이 S대를 나왔네, 박사네 했는데 아닌가봐'라고 생각할 거 아니에요"
"아니면 됐지, 남이 뭐라는 게 뭐 중요해요."

내가 속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 속 터진다.

남편은 자기가 대상 탄 것보다 제자들 상을 더 기뻐해

유두석 장성군수에게 상패를 받고 있다.
▲ 군민상 유두석 장성군수에게 상패를 받고 있다.
ⓒ 김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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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남편은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가르치면서 조용히 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배우는 입장에서는, 뭔가 인정을 받은 실력을 가진 선생님에게 배운다면 기분도 좋고 더 신명 나는 일일 것 같았다. 하여 남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제발 좀 제자들 생각해서 대회에 작품을 보내 보라고."

몇 번의 대회 출품을 한 결과 올 여름에 대한민국향토미술대전에서 서예부문 대상을 받았다. 나는 이때다 하고 남편에게 생색을 냈다. "거 보라고, 내 말 듣기를 잘 했지요"라며. 또한 내 예상도 맞아 떨어졌다. 제자들이 얼마나 좋았으면 현수막을 두 군데나 걸었을까!

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특선과 입선을 했다. 남편은 자기가 대상 탄 것보다 제자들의 상을 더 기뻐했다.

좋은 일은 꼬리를 물고 따라 왔다. 지난 10월 4일에는 장성군민상을 받게 되었다. 군민상은 누군가의 추천이 있어야 후보에 올라간다고 했다. 후보에 오르면 군의원들과 각 단체장들이 심사를 해서 결정한다고 했다.

상의 명칭은 <교육문화예술부문 장성군민의상>이다. 붓글씨로 10년을 고향에서 봉사한 결과물인 것 같다. 고향으로 돌아온 지 10년! 이제야 고향에서 장성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것 같아 감개무량했다.

그렇게 두 번의 상을 탔더니 그에 대한 인사를 할머니께서 하신 것이다. 할머니께서는 당신 자식 일처럼 기뻐하시며 진심으로 축하를 해 주셨다. 남편은 "부끄럽습니다"라고 응대했지만 나는 싱글벙글하며 "고맙습니다"라고 응대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뒤에 남편이 조심스럽게 한마디 했다.

"당신 그렇게 좋아요? 그동안 조심조심 사느라고 마음고생 많이 하더니."
"예, 좋아요. 마음 고생한 것의 열 배 백 배 좋아요."
"하지만 더 조심해야 돼요. 너무 좋은 티 내지 말고, 행여라도 자랑하지 말고.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자칫하면 작은 일에도 오해를 살 수가 있어요."

고춧가루에 쑥떡, 옥수수까지... 올겨울 먹거리 준비

벌레가 갉아 먹고 남은 배추는 마치 방충망 같다.
그렇다고 약을 할 수도 없고!
▲ 이 게 뭘까요? 벌레가 갉아 먹고 남은 배추는 마치 방충망 같다. 그렇다고 약을 할 수도 없고!
ⓒ 김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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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에 뜬 밤을 건져내며 생각했다.

'그래, 돈이 다가 아니지. 평생을 교직에 있으면서 동료들에게 '김 선생은 소나무 위에 앉아 학처럼 이슬만 먹고 사세요'라는 말을 들으면서 살아 온 사람이니. 다 늙어서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니까 안 변하는 게 이상할 거 하나 없다.'

어디서 뭔가를 터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기울여보니 깨를 터는 소리 같았다.

"여보, 이거 깨 터는 소리 맞지요? 우리 들깨 사야 되는데."

남편도 가만히 들어보더니,

"어이구 제법이네. 듣기만 하고 깨 터는 소린 줄도 알고.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시골 아낙네 다 됐네."

서둘러 밤 손질을 마치고 소리 나는 곳으로 갔다. 울타리 너머 밭에서 아주머니가 들깨를 털고 있었다. 들깨 다섯 되를 팔라고 하자 식구들 먹을 것밖에 없다면서 다른 집에서 사라며 한 집을 일러주었다.

시골에 사는 특혜 중에 하나가 약을 안 친 농산물을 먹는 것이다. 식구들끼리 먹을 만큼만 무농약 농사를 짓는데 어쩌다가 많이 지어서 남는 집을 찾아서 구매를 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재수가 좋은 것이다.

내가 망설이면서 대답을 안 하자 아주머니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있다가 한 집에서 전화가 왔다. 들깨를 다섯 되 정도는 팔 수 있다고 했다. 콩도 세 되는 팔 수 있다고 했다.

수지맞았다. 고춧가루도 부탁을 해 놨겠다, 봄에 뜯은 쑥으로 쑥떡도 해서 얼려 놓았겠다, 옥수수도 삶아서 냉동실에 넣어 놨겠다, 올겨울 먹거리는 거의 준비가 된 것 같다. 푸성귀는 텃밭에서 나는 걸 먹으면 된다.

텃밭에 물을 주자니 기가 막혔다. 배추 잎이 마치 방충망 같다. 잎은 배추벌레, 방아깨비와 사마귀까지 합세해서 다 뜯어 먹고 거의 줄기만 남았다. 저거나마 먹으려면 오늘 해거름에는 벌레를 잡아야겠다.

그리고 올겨울에는 두 달 동안 '金庚柰(김경내)'만 쓰다가 쉬고 있는 붓대를 다시 잡아야겠다.


태그:#상복, #서예대상, #군민상, #귀향, #귀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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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시원한 청량제, 겨울에는 따뜻한 화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쓴 책 : 김경내 산문집<덧칠하지 말자> 김경내 동시집<난리 날 만하더라고> 김경내 단편 동화집<별이 된 까치밥> e-mail : ok_0926@daum.net 글을 써야 숨을 쉬는 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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