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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위도>
 소설 <무위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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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장>

경부(京府: 북경) 도성 안. 황궁의 남쪽 정양문(正陽門)을 기준으로 동남쪽으로는 숭문문(崇文門)이 있고, 서남쪽으로는 선무문(宣武門)이 있다. 숭문문은 남방과 연결된 뱃길의 영향으로 상업이 발달하여 부가 쌓여 있고, 선무문은 과거를 보러오는 문사와 유생들이 모여들어 벼슬아치가 많았다. 이를 두고 동부서귀(東富西貴)라는 말이 생겨났으니 둘 다 작명의 의도와는 다르게 민심이 형성된 꼴이다.

선무문 밖에 형성된 주거지를 소회정공방(召回靖恭坊)이라 부른다. 소회방(召回坊)과 정공방(靖恭坊)을 합한 말로 전조(前朝) 원(元) 시절부터 주거지역으로 형성된 곳이다. 금의위 지휘사 모빈 장군의 저택은 정공방에 있다.

예진충은 모빈 장군의 저택이 보이자 발걸음이 빨라졌다. 고관들의 저택답지 않게 모장군의 사합원은 소박했다. 대문에 이르자 눈치 빠른 청지기 노인이 재빨리 문을 연다.

"장군님 계신가요?"
예진충이 묻자
"교위께서 오실 때 됐으니 찻물을 끓여놓으라고 진즉 이르셨습니다."
늙은 청지기는 예의를 갖춰 대답한다.

청지기가 안내할 것 없이 예진충은 홀로 안으로 들어갔다. 중정을 지나 접객실에 이르자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서 오게."
반가움이 뚝뚝 떨어지는 어투다. 접객실 거탁에는 날카로운 눈매의 장년이 앉아 있다. 단삼에 맨상투 차림이지만 따로 의관을 정제하지 않는 것은 방문객에 대한 무례가 아닌 친근함의 표시처럼 보였다. 그의 기다란 눈꼬리가 살짝 쳐지면서 말했다.

"오늘쯤 자네가 방문하리라 여겨 고려차를 준비해놨네."
예진충이 문간을 넘자마자 모빈 장군이 말을 했다.
"감사합니다. 진작 찾아봬야 했으나, 강호의 눈이 많아 이제야 발걸음을 했습니다. 장군님."
예진충이 한쪽 무릎을 꿇고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대며 예를 갖췄다.

"예교위. 어서 일어나게. 노대부의 강호 출타행과 피살 건이 이제 겨우 궁중 입방아에서 잦아들고 있다네. 그동안 은신을 할 수밖에 없는 자네 처지를 내 어찌 모르겠는가."
모빈이 예진충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고는 탁자로 데려갔다. 
하녀가 큰 도기물병에 찻물을 가지고 들어왔다. 모빈 장군은 다기를 펼쳐 예진충 앞에 잔을 놓았다.

"자, 마시게. 팔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마시던 고려차라네."
모빈이 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랐다. 아슴한 차향이 예진충의 코에 엷게 스며들었다. 그는 추절도를 떠올렸다.

추절도(椎絶島). 복건의 천주(泉州)에서 뱃길로 백오십리이니 바람을 잘 만나면 하룻길이지만 대개의 경우엔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배에서 지내야 겨우 도착하는 곳이다. 섬은 동서 오십여 리 남북 백이십여 리로 길쭉하게 뻗으며 안으로 약간 굽어 고구마 같은 모양새였다. 털털한 아낙이 광주리 채 고구마를 씻다가 그 중 하나가 떠내려가 외롭게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꼴이었다. 섬이 크지 않아 산물이 빈약한데, 시거든 떫지나 말 것을 그나마 비죽비죽 솟은 바위산이 대부분이라 사람들이 기댈 곳이라고는 바다 밖에 없었다.

백여 호가 될까 말까한 집들은 해안을 따라 띄엄띄엄 따개비처럼 붙어 있고 산 쪽으로는 조금만 들어가도 인가를 찾기 힘들었다. 그래도 산은 산인지라 주봉인 연화봉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가파르고 정상에 스무길이 넘는 바위가 연봉으로 이어져 있어 제법 웅장함을 드러냈다. 연화봉 바위 틈새로 난 좁다란 길을 따라 오십여 장 내려가면 너른 공터가 나오고 그 한가운데 저택이 게으른 황구(黃狗)처럼 엎드려 있다. 이런 곳에 어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저택은 의외로 규모가 있다.

가운데 거실을 중심으로 기역자로 꺾였는데 남향쪽으로 방이 세칸 늘어서 있고 거실과 직각으로 부엌과 광이 연이어 붙어 있었다. 거실은 앞뒤로 훤히 뚫려 있어 이곳이 추위에 민감하지 않은 남쪽 지방임을 말해주고 있다. 너른 마당의 둘레를 따라 탱자나무로 엮은 담이 쳐져 있는데, 담이 있으면 문이 있어야 할 것인즉 특이하게도 탱자나무로 엮은 담이 빙 둘러쳐 있어 출입문이 없다. 낮으면 허리, 높아야 가슴 높이 탱자나무 담장쯤이야 맘만 먹으면 언제라도 끊어내 출입구를 만들 수 있지만 담을 제거하거나 바깥출입하는 것은 엄연히 국법을 어기는 행위인 바 이곳은 일종의 옥(獄)인 것이다. 이름하여 위리안치(圍籬安置), 중죄의 판결을 받은 조정의 대신들에게 주어지는 유배형 중의 하나이다.

저택의 거실에선 수시로 칠현금(七絃)琴)이 탄주(彈奏)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도 듣는 이 없는 절해고도의 산중에서 무슨 재미로 금을 뜯을까 싶지만 연주자는 아랑곳 않고 하루에도 몇 번씩 연주했다. 금의 가락은 때로는 듣는 이의 눈시울이 절로 적셔지는 애절복통 가락이 흘러나왔다가 어떤 때는 듣는 이의 가슴이 벅차오르는 웅혼무변한 가락이 튕겨지기도 하였다.

금을 연주하는 사람은 이마가 넓고 눈이 깊어 범접할 인상이 아니었다. 코가 높고 하관이 가팔라 다소 매서운 기운이 느껴지기도 하나 가지런한 수염이 매서움을 감해 주고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매몰차기보다는 엄격함이 풍겼다. 그는 금을 연주할 때면 학창의에 문사건을 쓰고 정좌를 했다. 귀양살이에 악(樂)이라니, 형(刑)의 취지를 왜곡하는 듯싶지만 그의 깊은 눈에 서린 형형한 기운으로 볼 때 금이 한가한 문사의 정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웅지를 감추고자 하는 방편임을 알 수 있었다.

귀양살이 3년째. 간신의 무리들이 황상의 주위에서 벌떼 같이 윙윙거리니 황상께서도 임시방편으로 그를 고도에 보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유배형을 처한다고 교지를 내릴 때 황상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그를 다시 불러들일 것을. 지금은 때가 아니다. 전대(前代) 권신(權臣)들의 위세가 아직은 살아 있기에 섣불리 벌집을 건드릴 수 없음을 그도 황상도 알고 있었다. 짧으면 일년 길어야 삼년이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삼년을 꽉 채우고 있다.

그는 이곳 추절도에 와서 어릴 때 배웠던 금(琴)을 다시 잡았다. 첫 해 그가 주로 연주한 곡은 애잔한 정조였다. 변방에서 오랑캐와 싸우며 전장만 누빈 장수가 왜 구중궁궐에서 입만 놀리는 환관의 탄핵을 받아 유배에 처해졌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년이 흐르자 그의 금의 가락은 웅혼한 기상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무릇 나라의 장수라면 소인배들의 모략이나 음해에도 꺾이지 않아야 할 터 어찌 아녀자 같은 애상으로 장부의 의기가 주춤하겠는가. 그는 일부러 호방한 연주를 했다.

일 년이 지난 후 그의 금은 정(情)이 아니라 음(音)을 따랐다. 악기에 아무리 정을 담은들 음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랴. 음은 가락과 선율의 근본인 바 손가락 하나로 튕기는 음에 고저와 장단과 생멸이 있으니, 비록 단 한 번의 튕김이라도 깊이가 있다면 그 속에 정(情)과 의(意)가 포함되리라. 그 후 그의 연주는 가락과 선율을 좇지 않고 울림과 여운으로만 이어졌다.

그날도 석양 무렵 장수는 금을 무릎 위에 놓고 연주했다. 장수는 먼저 단음의 튕김을 만끽한 후 광릉산(光陵散)을 연주했다. 장수가 금에 한창 몰두해 있을 때 그의 등 뒤엔 어떤 장한이 조용히 서 있다. 장한의 오른손에 검이 들려져 있고 검날은 석양빛에 반사되어 붉은빛을 날름거렸다. 그러나 장한은 움직이지 않았다. 장수의 금이 가락을 탈 때마다 굵은 눈썹이 움찔거렸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다.

예진충은 이틀 동안 연화봉 바위 뒤에 숨어 표적의 일상을 관찰한 결과 저녁 무렵 금을 연주할 때가 적기(適期)라고 판단했다. 예상대로 표적이 금을 연주하자 그는 영묘신형(靈猫神形)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한 발짝 씩 움직일 때마다 금의 줄이 퉁겨지고 농현(弄絃)의 여운이 길게 이어졌다. 그것은 마치 폐부를 찌르는 것처럼 한 마리 짐승이 속에서 울어대는 것 같았다.

또 한발자국 움직이자 이번에는 맺히고 맺힌 한이 차오르다 마침내 터져나오는 것 같았다. 또 한발자국 움직이자 유리그릇의 가장자리가 가볍게 부딪치듯 명징한 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의 보법에 맞춰 음이 나오는 것인지, 음에 맞춰 그가 발자국을 떼는 것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그는 표적의 등 뒤까지 다가갔다. 그의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표적은 이어진 가락으로 선율을 뽑아냈다.

예진충은 검을 뽑고나서도 표적을 베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의 존재조차도 모른 채 정신없이 금을 연주하는 자의 등에서 낯익은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인의 등이었다. 육개월 전 예진충은 노인의 명을 받았다. 임무를 완수하였으나 그는 심한 부상을 입고 돌아왔다. 노인은 그를 위해 약을 달이고 상처를 돌보았다. 그가 거동을 할 수 있자 노인은 그를 데리고 향운봉 기슭을 누비며 약초를 캤다. 이건 윤슬(潤蝨)이다. 너의 상한 비장에 좋을 것이다. 이것은 형구(瀅久)다. 너의 찰상(擦傷)을 덧나지 않게 한다.

숲을 헤쳐가는 노인의 등을 보며 그는 강한 살기가 솟았다. 이 노인은 나에게 무엇인가. 자신은 왜 노인에게 매어 있는 것일까. 그는 허리에 찬 검경(손잡이)을 불끈 잡았다. 약초를 캐느라 숙인 둥그런 노인의 등은 가냘팠지만 바위처럼 단단해 보였다. 칼을 대면 그대로 튕겨날 것만 같았다. 그는 손에 힘을 풀었다. 길을 따라 가다 노인은 제 키보다 조금 나무에게 가서 열매를 땄다. 방포(方匏)라는 열매다. 너의 허혈을 풀어줄 것이다.

양팔을 들고 열매를 따는 노인의 등을 보고 그는 다시 한번 칼자루를 쥐었다. 노인의 등은 무방비였다. 손에서 땀이 났다. 검경이 그의 손에서 스르르 풀려났다. 오늘은 삼(蔘)이 보이지 않는구나. 내일은 적운봉 쪽으로 가보자구나. 내리막길을 걸어가는 노인의 등을 보고 그는 다시 한번 검경을 잡았다. 이번에는 날이 한 뼘 가량 빠져나왔다. 단 일획이면 된다. 노인의 등은 무심했다. 텅 비어 있다. 허공을 베는 검이란 얼마나 허무한가. 그는 검을 도로 넣었다.

집으로 돌아와 노인은 그에게 차를 한 잔 따라주었다. 왜 나를 베지 않았느냐. 내가 알기론 너는 나를 세 번 베려고 했었다. 노인은 찻주전자에서 나오는 찻물처럼 높낮이 없는 성조로 말했다. 왜 나를 사지(死地)에 보냈습니까? 겨우 살아서 돌아온 나를 치료하는 건 다시 한번 죽음의 문턱에 밀어넣고자 하기 때문입니까? 노인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너의 집안은 역모에 연루되어 구족이 멸하였다. 그 와중에 너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나는 너에게 한(恨)을 심어주려 했는데 너는 의(義)를 좇으려 하는구나. 머지않아 네가 나를 떠나겠구나. 노인은 차를 입안에 머금고 음미하더니 말을 이었다. 너의 검에 생각이 담기기 시작했구나. 생각은 검을 둔하게 한다. 검이 둔해지면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스스로 벗어나도록 해라. 노인은 짧게 말했다. 그의 몸이 완쾌되자 노인은 남해의 어느 섬에 가라고 했다. 표적입니까? 표적이 될 수도 있고 둥지가 될 수도 있다. 그건 너와 그 자의 인연에 달렸다.

표적이 될 수도 있고 둥지가 될 수도 있다는 자의 이름은 모빈(牟斌)이며 한때 이 나라의 장수였다고 했다. 눈앞에 있는 모빈의 등에서 노인의 등을 떠올리게 한 것은 노인의 의도였을까. 갑자기 말이 파고들어 예진충의 생각을 끊었다.

"수염 없는 자들이 보낸 객인가?"
장수는 금의 낮은 음을 퉁기며 말을 건넸다.

예진충은 검을 쥐고 장수의 앞으로 돌아나갔다. 그와 장수의 눈이 부딪쳤다. 시선이 파르르 오갔다. 불꽃이 일었다면 장수의 목은 그의 칼날에 날아갔을 것이다. 팽팽한 시선줄은 어느새 고요하게 허공에서 머물렀다. 장수의 눈길은 예진충의 시선을 거두었다.

"칼을 거두게. 살기가 없는 검은 지팡이만도 못한 것 아닌가."
모빈은 낮게 말했다. 예진충은 검을 검집에 넣었다. 
"수염없는 자들이 보낸 심부름꾼이 아니라면 짚이는 곳은 하나 밖에 없군. 북쪽의 저승사자 노인네가 보낸 손님인가."
"……"
예진충이 말이 없자 모빈은 금을 무릎 옆에 내려놓았다. 

"노인네의 망령이 여전하구나. 나라가 망한지 백년인데 아직도 허망한 꿈을 꾸다니."
모빈은 찻잔을 들어 입에 대고는 말했다.
"자네는 나를 왜 베지 않았나? 적어도 세 번의 기회가 있었을 터인데."
예진충은 흠칫했으나 대꾸하지 않았다.
"엊그제 수상쩍은 배가 오는 걸 보고 스스로 가늠해보았다. 수염 없는 자들이 보낸 자객이라면 나의 운은 다한 것이고 다른 객이 온다면 나의 명은 이어질 것이다."
예진충은 검을 풀어 바닥에 놓았다.

"자네의 무공이 보통 아닐세. 강호에서 자네의 검을 맞받을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하긴 북명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오죽하랴."
모빈은 손에 든 찻잔을 들이키고는 빈잔에 다시 차를 따랐다. 그리고는 예진충에게 권했다.

"마시게나. 자네가 올 줄 알았다면 찻잔을 하나 더 준비할 걸. 수염없는 자들과 무관하다니 내 자네를 유용하게 씀세. 나는 곧 유배에서 풀릴 것이네. 그걸 알기 때문에 수염없는 자들이 끊임없이 내게 자객을 보내고 있지. 자네가 등 뒤에서 칼을 뽑을 때까지 나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어, 연주를 하면서 음이 되돌아오는 걸 보고 비로소 누군가 뒤에 있다는 걸 알았지. 만약 자네가 황궁의 수염없는 자들이 보낸 객이라면 나는 지금쯤 황천길로 들어섰겠지. 이것도 인연이니 지금부터 자네는 나를 위해 일해주게. 쓰러뜨리지 못할 바에야 함께 하라. 아마 이것이 노인네의 심중일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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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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