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광복 71주년을 맞이하여 충남 태안지역 항일애국지사인 우운 문양목 선생의 선양사업이 계속 추진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그가 국권 회복을 위해 활동했던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찾았다. 특히, 우운의 유일한 생존 혈육인 윌리엄 문옹을 만나 우운 선생의 살아생전 기억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인근 스탁턴 공동묘지에 잠들어있는 우운 선생 묘소 이전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편집자말]
왼쪽에서 다섯번째가 문양목 선생 지난 8월 20일 무한도전 방영분에 등장한 우운 문양목 선생. 우운 문양목 선생은 충남 태안에서 태어난 자랑스런 애국지사로 이역만리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 왼쪽에서 다섯번째가 문양목 선생 지난 8월 20일 무한도전 방영분에 등장한 우운 문양목 선생. 우운 문양목 선생은 충남 태안에서 태어난 자랑스런 애국지사로 이역만리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 MBC 무한도전 화면 캡쳐


지난달 20일,  MBC <무한도전>은 대표적인 애국지사 '도산 안창호' 선생의 발자취를 다룬 미국 특집, '도산을 찾아서'를 방송했다. 리뷰를 쓰기에는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본방 당시의 감동으로 두 번 세 번 재방송을 보면서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본능을 끄집어내고 싶었다.

<무한도전>은 먼 이국땅인 미국에서 일제치하의 위기에 빠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독립자금을 모으고, 수많은 연설을 통해 독립 의지를 고취시켰던 도산 선생과 도산이 후손들에게 남긴 '애기애타(愛己愛他)' 정신과 독립에 대한 염원을 가슴에 새긴 채 살고 있는 그의 후손들의 모습을 담았다.

도산 안창호는 1906년 상항한인연합감리교회 창립멤버 상항한인연합감리교회 벽면에 걸린 도산 안창호. 사진 아래에는 1906년 창립멤버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교회에서 우운 문양목 선생도 주일학교 한글교사를 맡은 것으로 교회 100년사에 기록되어 있다.

▲ 도산 안창호는 1906년 상항한인연합감리교회 창립멤버 상항한인연합감리교회 벽면에 걸린 도산 안창호. 사진 아래에는 1906년 창립멤버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교회에서 우운 문양목 선생도 주일학교 한글교사를 맡은 것으로 교회 100년사에 기록되어 있다. ⓒ 김동이


샌프란시스코한인연합감리교회에 전시돼 있는 도산 안창호의 발자취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LA에서 주로 활동하던 선생이 중국 상하이를 오갔던 증명서. 오늘날 여권으로 보면 될 듯. 중국 증명서를 보면 1922~1923년까지는 상해에서 Teacher로 1년, 1923~1924년까지 만주 등에서 1년은 Travel로 기록되어 있다. 샌프란시스코한인연합감리교회에 전시돼 있다.

▲ 샌프란시스코한인연합감리교회에 전시돼 있는 도산 안창호의 발자취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LA에서 주로 활동하던 선생이 중국 상하이를 오갔던 증명서. 오늘날 여권으로 보면 될 듯. 중국 증명서를 보면 1922~1923년까지는 상해에서 Teacher로 1년, 1923~1924년까지 만주 등에서 1년은 Travel로 기록되어 있다. 샌프란시스코한인연합감리교회에 전시돼 있다. ⓒ 김동이


방송 이후 "정말 감동적이었으며 한편으론 매우 부끄러웠다",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보기 정말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다시 한 번 도산 안창호를 비롯한 안중근, 유관순 외에 이름 없이 우리나라를 위해 희생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줬다, 정말 고마운 방송이었다" 등 시청자들의 큰 호응이 이어졌다.

방송을 시청하던 도중 기자는 문득 호국보훈의 달이던 지난 6월 24일부터 다녀온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취재가 떠올랐다. 취재는 충남 태안군의 자랑스러운 애국지사인 우운 문양목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 현재 부지 마련, 예산 확보 등의 사유로 제동이 걸린 우운 선생의 선양사업이 제동 없이 추진되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방송을 시청하던 도중 도산이 만든 의열단과 관련된 영상이 방영되는 순간 등장한 한 장의 단체 사진이 기자의 눈을 휘둥글게 만들었다. 처음 보는 사진이었는데, 그 사진 속에 그토록 찾아보려고 수소문했던 문양목 선생의 모습이 보였다. 도산과 우운 문양목이 함께 찍은 한 장의 사진은 우운 선생의 선양사업에도 분명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문득 지난 6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4시간여 떨어진 230마일을 달려 도착한 레딩(Redding, 미국 캘리포니아 주 북부 샤스티카운티의 중심 도시로 '북부 캘리포니아의 보석'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림)에서 만난 우운 문양목 선생의 유일한 생존 직계 혈육인 셋째 아들 윌리엄 문(93)을 만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당시 윌리엄 문을 만나러 가는 내내 만남에 대한 설렘과 그동안 이역만리서 애국지사의 후손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생각에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던 기억도 떠올랐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은 우운 문양목 선생은 누구

 '문양목 평전'에 실려 있는 우운 문양목 선생 존영.

'문양목 평전'에 실려 있는 우운 문양목 선생 존영. ⓒ 문양목 평전


그렇다면 우운 문양목 선생은 누구인가를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자 충남 태안의 대표적인 애국지사인 옥파 이종일 선생과 함께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은 우운 문양목(1869년 6월 7일~1940년 12월 25일) 선생은 도산 안창호 등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해외 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애국지사다.

1995년에나 돼서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은 우운 선생은 2004년 6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며 국가보훈처 주도로 문양목 선생의 인물사진과 공적 관련 사진 전시회를 비롯해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을 다룬 학술강연 개최, 포스터 1만 매 배부, 특집기사 게재 등의 홍보활동을 통해 전국에 우운 선생을 알리게 된다. 당시 국가보훈처는 문양목 선생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면서 그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1894년 동학 농민전쟁에 가담하여 1907년 하와이로 피신하고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대동보국회를 결성 대동공보 간행, 1908년 스티븐스가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하자 그를 방문하여 발언 취소를 요구하고, 장인환, 전명운 의거를 지원, 1908년 7월 한인 소년병학교 사관양성을 통한 항일무장투쟁 지원, 1910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으로 활동하면서 1940년 서거하실 때까지 독립운동을 하신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선정하게 됐다."

"생계 이외의 시간은 오직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아버지 문양목"

우운 선생의 유일한 생존 직계 혈육인 셋째 아들 윌리엄 문 윌리엄 문은 취재진의 방문에 준비를 한 듯 2004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돼 국가보훈처에서 제작한 달력을 꺼내 취재진에게 보여줬다. 우운선생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아들 윌리암 문(93)옹이 훈장과 훈장증을 들어보이고 있다.

▲ 우운 선생의 유일한 생존 직계 혈육인 셋째 아들 윌리엄 문 윌리엄 문은 취재진의 방문에 준비를 한 듯 2004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돼 국가보훈처에서 제작한 달력을 꺼내 취재진에게 보여줬다. 우운선생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아들 윌리암 문(93)옹이 훈장과 훈장증을 들어보이고 있다. ⓒ 김동이


"아버지 문양목은 스탁턴에서는 한약방도 운영하셨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청소업체인 클리닝샵도 했습니다. 리들리에서는 김브라더스 농장에서 일을 하셨는데, 어렵게 생계를 꾸리면서도 남은 시간은 오직 독립운동을 하셨기 때문에 어릴 적 아버님과 보낸 시간은 좋은 기억이 없습니다."

다시 시계를 6월 25일로 되돌려보자. 마침내 도착한 레딩의 한 주택. 윌리암 문 옹이 취재진을 반갑게 맞이한다. "반갑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어설픈 한국말로 취재진을 반기는 윌리엄 문 옹. 집안에 들어서자 2004년 6월 문양목 선생이 국가보훈처로부터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돼 제작된 액자가 한 켠에 놓여있었다.

자연스레 이어진 인터뷰. 하지만 셋째 아들 윌리엄 문 옹의 기억 속에 아버지 문양목과 보낸 어린시절의 추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부터 청소업체, 세탁소, 한약방, 농장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녹록치 않았던 형편으로 인해 문양목 선생은 힘든 생계를 꾸려나갔고, 생업 이외에는 전부 독립운동에 투신했기에 어린 윌리암 문과의 추억을 만들 시간 조차 없었다.

윌리엄 문 옹은 "아버지는 엄격하신 분이셨고, 한학을 많이 하셔서 그런지 별로 대화를 하지 못했다. 특히 아버지는 영어를 잘 몰랐고, 저는 한국말을 잘 몰라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별로 없었다"며 "아버님하고의 기억도 별로 없다. 아버지는 일 때문에 늘 바쁘셨고, 리들리시의 김브라더스 농장에서 일을 하셨으며, 남은시간은 독립운동을 하셨기 때문에 아버님과 보낸 시간은 좋은 기억이 없다."고 회상했다.

다음은 윌리엄 문씨와 가진 인터뷰다.

 우운 문양목 선생의 유일한 직계 혈육인 윌리엄 문과 취재진이 기념촬영했다.

우운 문양목 선생의 유일한 직계 혈육인 윌리엄 문과 취재진이 기념촬영했다. ⓒ 김동이


- 고국(한국)의 소식은 전해듣고 계신지요.

"이미영(전 MBC아나운서, 고종사촌)씨하고는 자주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소통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패밀리 라이프(안부)를 묻는데, 1년 전쯤에는 사진을 한 장 보내줬는데 아버지와 관련된 사진이라더군요." (확인결과 문양목 선생 추모각 사진이었음-기자 주)

- 현재 살고 계신 레딩(Redding)에는 언제 오셨나요.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었는데 1956년에 레딩으로 왔습니다. 캘리포니아 UC버클리대에서 의과대를 다녔습니다. 베티(부인)는 간호학과를 다녔는데 대학교 때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1남 1녀를 두고 있습니다. 마취 전문인데 1956년에 인턴을 마치고 레딩에 자리가 나서 외과의사와 함께 온 지 60년이 됐습니다. 아들도 현재 마취 전문의이고 5분 거리 레딩에 살고 있습니다"

- 아버지 문양목의 살아생전의 기억을 듣고 싶습니다.
"2차 대전 당시 아버님과 스톡턴(Stockton, 미국 California주 중부의 도시)에서 살 때 일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인삼을 파셨습니다. 인삼으로 약재를 만들어 파셨는데 여기서 베티(부인)와의 인연이 있습니다. 당시 베티 아버님께서 몸이 안좋았는데 아버지가 운영하던 한약방에서 산 한약을 드시고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베티를 알지는 못했었구요.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아버지는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고, 세탁소도 했고, 청소하는 일(클리닝샵)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습니다. 해서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사실 때는 백일규(대동보국회 중앙회장 역임)라는 분과 같이 술을 자주 드셨는데, 백일규는 버클리에서 첫 번째로 졸업한 한인으로 아버지와는 가장 친한 친구였고 돌아가셨을 때는 추도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청소하는 일을 하셨는데,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1941년) 수족이 생겨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됐고 그 때 멘티카로 이사를 갔습니다. 원래 멘티카에서 살다가 집만 놓고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클리닝샵을 하다가 뇌출혈이 생겨 다시 멘티카로 가서 살다가 1년이 되기 전에 또 뇌출혈이 생겨 병원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멘티카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버지는 엄격하신 분이셨고, 한학을 많이 하셔서 그런지 별로 대화를 많이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영어를 잘 몰랐고, 저는 한국말을 잘 몰라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별로 없었습니다. 아버님하고의 기억도 별로 없습니다. 아버지는 일 때문에 늘 바쁘셨고, (한인이민역사기념각 공원이 있는) 리들리시의 김브라더스 농장에서 일을 하셨으며, 남은시간은 오로지 독립운동을 하셨기 때문에 아버님과 보낸 시간은 좋은 기억이 없습니다. 아버님에 대한 기억은 부모님과 샌프란시스코의 한인연합감리교회를 다녀 그곳으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하여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셨고, 동학운동을 했다는 것만은 뚜렷하게 알고 있습니다."

우운 선생의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 현재 윌리엄 문이 간직하고 있는 아버지 문양목(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사진. 어머니 문찬성(문양목 왼쪽 옆)과 윌리엄 문의 누이, 형의 모습도 보인다.

▲ 우운 선생의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 현재 윌리엄 문이 간직하고 있는 아버지 문양목(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사진. 어머니 문찬성(문양목 왼쪽 옆)과 윌리엄 문의 누이, 형의 모습도 보인다. ⓒ 김동이


- 문양목 선생의 자녀가 네분인 걸로 알고 있는데, 다른 분들의 근황을 여쭤봐도 될는지요?    

"제일 큰형님은 유명한 병리학자였고, 형님의 아들이 의사고, 딸의 자식 둘이 의사, 딸이 간호사, 저도 의사, 아들도 의사, 부인 베티도 간호사로 전부 의료방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형님들과 누이 다 돌아가시고 혼자 남았습니다."

- 선생께서 남기신 유품은 없으신지요. 그리고 선생의 고향에서 기념관이 조성되면 기증할 의사가 있으신지요.
"유품은 많지 않습니다. 사진이 많았는데, 헨리 안(LA한인회 소속으로 현재 거주지 및 연락처 수소문 중)이라는 사람이 아버지의 자서전을 저술한다고 해서 대부분의 사진을 갖고 갔는데 연락이 두절됐습니다. 벌써 30년이 넘었는데, 중간에 한번 연락이 돼서 사진을 가져오라고 했더니 다시 연락이 끊겼습니다. 매우 안타깝습니다."

- 영사관으로부터 선생의 훈장을 직접 수여받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건국훈장 독립장은 대한민국의 3등급 훈장으로 공적이 뚜렷한 애국지사에게만 수여되는 영예스런 상징입니다. 1995년에 되어서야 뒤늦게 훈장을 받게 됐는데, 후손으로서 소감을 밝혀주신다면요. 훈장을 볼 수 있을까요?
"아주 자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누이가 있어서 누이가 받았습니다. 아버지 고향에 뜻깊은 기념관이 생긴다니 훈장과 훈장증을 기증할 의사가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가져간다면 줄 수도 있습니다."

- 현재 선양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문양목 선생 기념사업회 등에서 향후 선생의 묘역을 모국의 국립묘지로의 이장을 추진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에 대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누이가 살아계실 때 국립묘지 이장을 추진한 적이 있는데 누이의 반대가 심해 무산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여기 사셨는데 여기에 계시는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쉽게 판단을 못 내리겠습니다.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 문양목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셨던 고 이대위 목사님은 고국의 국립묘지에 묻혀 후세들에게 그 정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국립묘지로 이장된다면 국가에서 관리도 해주고 선생의 평생의 업적이 후세에 길이 전해질 것입니다.
"신중하게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이장을 하면 어머님도 함께 모셔가는 것입니까? 깊이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 스탁턴에 있는 파크뷰 공동묘지의 선생 묘역을 참배했습니다. 그런데 선생의 묘역 바로 옆에 후손분께서 잠들어계신다는 말을 관리인으로부터 들었는데, 묘비가 없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혹 사연이 있는 것인지요.
"누가 묻혀 있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문양목 선생의 부인인 문찬성 여사께서 잠들어 계셨고, 파크뷰 공동묘지 사무실에서 작은 묘비를 세워주기로 했다고 전하자) 잘 됐군요."

우운 문양목 선생 추모제향 우운 선생의 고향인 충남 태안군 남면 몽산리의 선생 생가지 인근에 조성된 사당에서는 매년 선생을 기리는 추모제가 열려 선생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 있다.

▲ 우운 문양목 선생 추모제향 우운 선생의 고향인 충남 태안군 남면 몽산리의 선생 생가지 인근에 조성된 사당에서는 매년 선생을 기리는 추모제가 열려 선생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 있다. ⓒ 김동이


- 선생의 업적을 드높이기 위해 선양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후손들에게 당부의 말씀이나 전해드리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고향의 신문사에서 관심을 가져주셔서 더욱 감사드립니다. 지난 20년간 매년 문제빈씨에게 기부를 해왔습니다. 다시 기부를 할 의사가 있습니다. 연락처와 주소를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잖아도 그동안 기부(도네이션)할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전을 쓰신 분께 너무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너무 값진 선물입니다."

윌리엄 문도 모르는 납골이 문양목 묘비 옆에 있다?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스탁턴 공동묘지에 잠든 문양목 선생 기자는 지난 6월 25일 우운 문양목 선생이 잠들어있는 스탁턴 공동묘지를 찾아 참배한 뒤 문양목 평전을 선생의 묘소 앞에 바쳤다.

▲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스탁턴 공동묘지에 잠든 문양목 선생 기자는 지난 6월 25일 우운 문양목 선생이 잠들어있는 스탁턴 공동묘지를 찾아 참배한 뒤 문양목 평전을 선생의 묘소 앞에 바쳤다. ⓒ 김동이


한편, 기자는 윌리암 문 옹과의 만남에 앞선 지난 6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도 2시간 남짓 떨어진 스탁턴의 파크뷰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는 문양목 선생의 묘소도 찾았다.

엄청나게 광활한 공동묘지 규모에 놀라면서 기자는 문양목 선생의 묘소를 찾기 위해 공원 사무실로 향했다. 선생의 묘지 위치를 확인한 취재진은 혹시나 하여 공원사무실측에 문양목 선생의 후손이나 또는 한국인의 묘소가 있는지 찾아달라고 부탁한 뒤 선생의 묘소로 차를 몰았다.

공원사무실의 도움을 받아서인지 어렵지 않게 선생의 묘소를 찾은 취재진. 하지만 인근의 화려한 일본인들 묘소와 비견돼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선생의 묘소에 애통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의문점 하나. 공동묘지 특성상 묘비와 묘비 사이의 공간이 거의 없이 빼곡하게 들어선 다른 묘소들과는 달리 문양목 선생의 묘비 옆은 비석도 없이 잘 정돈된 푸른 잔디만이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문양목 선생이 잠들어있는 파크뷰 공동묘지 관리인과 취재진이 묘비 없는 묘지에 대해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확인결과 원안에는 문양목 선생의 부인인 문찬성 여사가 묻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문양목 선생이 잠들어있는 파크뷰 공동묘지 관리인과 취재진이 묘비 없는 묘지에 대해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확인결과 원안에는 문양목 선생의 부인인 문찬성 여사가 묻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 김동이


잠시 후 이런 의문점은 쉽게 해소됐다. "누구인지는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묘비 없는 무덤이다" 공원관리인 파블로씨의 말이다. 작은 묘비 하나 없는 무덤이라니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파블로씨는 "파크뷰 공동묘지에는 묘비 없이 묻히는 경우는 없다. 이유를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묘비를 땅에 묻는 경우도 있다"고 말한 파블로씨는 곧바로 확인에 들어갔고, 확인 결과 묘비는 묻혀있지 않았다. 결국 납골만 묻힌 셈이다.

윌리엄 문 옹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던 묘비 없는 무덤은 확인결과 문양목 선생의 부인인 문찬성(본명 이찬성)이 묻혀 있었고, 묘비만 문양목 선생과 함께 세운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윌리엄 문의 허락을 얻어 파크뷰 공동묘지 사무실에 연락해 작은 묘비라도 세워 달라고 요청했고, 사무실 측에서는 긍정적으로 작은 묘비라도 세워주겠다고 약속했다.

도산 안창호 우운 문양목 태안 샌프란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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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스타팀에서 방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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