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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오시오. 관에게 쫓기고 있다고 들었소,"

활을 든 사내는 담담한 목소리로 관조운과 혁련지를 맞이했다. 그의 태도는 딱딱했지만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자세한 얘기는 우리집에서 하기로 하고 날 따라 오시오. 관병들이 쉽게 발견하지 못할 것이외다."

활을 든 사내가 무뚝뚝하게 말을 던지더니 뒤돌아서 숲으로 들어갔다. 관조운과 혁련지가 활을 든 사내를 따라가자 그들을 안내한 사냥꾼은 계곡을 다시 건너 왔던 길로 돌아갔다.

활을 든 사내를 따라 반 시각을 가자 계곡의 오목하고 양지바른 곳에 제법 너른 터가 보였고 한가운데 아담한 집 한 채가 볕을 쬐는 강아지마냥 엎드려 있다. 서너 칸 초옥으로, 임시로 지은 산막이 아닌 너와지붕을 인 제법 튼실한 집이다. 집 옆 텃밭에는 수수, 조 등의 곡물이 심어져 있고 집 뒤로 감, 살구 등의 과실수가 있다.

사내가 울 안으로 들어서자 아낙과 어린 아이 둘이 문을 열고 나왔다. 큰 애가 칠팔 세, 작은 아이가 서너 살 정도 보였다. 아이들 역시 무명옷 위에 짐승 가죽옷을 배자로 걸쳤다. 아이들이 아비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짓다가 뒤에 손님이 따르는 걸 보고 도망치듯 엄마 뒤로 숨었다.

"외간 사람보기 힘든 아이들이 되다보니 몹시 낯을 가린다오."

사내가 변명조로 얘기했다.

"어서오십시오."

아낙이 뒤늦게 인사했다. 산중 사람답게 행색은 초라하지만 대처의 찌든 표정은 아니다. 사내가 아낙에게 음식을 부탁하고는 관조운과 혁련지를 거실 큰방으로 안내했다.

"주원외라고 하오."

사내가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금릉에서 온 관조운입니다."
"소주에서 온 혁련지라고 합니다."
"댁들을 우리집까지 모신 것은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오."

주원외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진씨에게 사정은 얼핏 들었소만, 좀더 자세한 사연을 들려주기 바라오."

그들을 안내했던 사냥꾼의 성이 진씨였던 모양이다. 관조운이 혁련지를 쳐다보았다. 혁련지는 머뭇거리지 않고 금위위와 동창에게 쫓기게 된 사연을 가감없이 얘기해 주었다. 다만 은화사라면 산중 사람이 알 수가 없을 것 같아 동창이라고 표현했다.
주원외는 시종일관 입을 다물며 듣다가 가끔씩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믿겠소이다."

그때 주원외의 아낙이 다상(茶床)을 가지고 들어왔다. 소박한 다기가 상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관조운은 깊은 산중에서 차까지 준비해놓고 사는 주원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운부산은 산세나 기후로 볼 때 차를 재배하기는 적당치 않은 곳이다. 그렇다면 대처에서 차를 구해왔다는 의미다. 

"우리는 명조(明朝)와 척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오."
"조정과 척을 졌다면……?"

관조운은 역모에 희생당한 후손들이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입 밖으론 주원외의 말끝을 되묻는 걸로 얼버무렸다. 

"나는 역모에 연루된 게 아니라 애초부터 명조를 거부한 사람이고, 진씨는 명조의 학정(虐政)에 희생당한 사람이오."
"알 듯 모를 듯합니다. 좀더 쉽게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혁련지가 주원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진씨는 형양 봉기 때 가족들이 희생 당하고 관군에게 쫓기다 이곳까지 숨어들었소."
"형양 봉기라면 선제 성화 황상 때 형주와 양양에서 일어난………?"

혁련지는 자칫하면 '형양의 란(亂)'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으나 마지막 순간에 삼켜버렸다. 

"그렇소, 벌써 이십여 년이 흘렀으니 한 세대 전이라고 할 수 있소."

형주와 양양 지방은 예로부터 삼림이 울창하여 유민이나 도적들이 숨어 살기가 좋았다. 명 태조 주원장은 이곳이 반란의 근거지가 될 것을 염려하여 금산구(禁山區)로 지정하고는 백성들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의 살림이 날로 피폐해지고 관리들의 탐학이 심해지자 스스로 유민이 되어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인 없는 땅을 개간하여 나름 생활의 안정을 꾀했다.

선선제인 천순제 시절엔 유민들의 수가 30만에 이르렀다. 처음 조정에서는 유민을 원적지로 돌려보내는 원적발환주의(原籍發還主義)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수가 너무 많고 반발이 심하자, 이들을 제도권 내로 포섭하는 부적안삽주의(附籍安揷主義)로 입장을 바꿨다. 현 거주지에 호적을 등재하고 세금의 의무를 지며 명조의 행정단위인 이갑제를 조직하도록 한 것이다. 폭정을 피해 도망쳐 온 사람들에게 다시 폭정의 굴레를 씌우고자 하니 당연히 반발을 초래하였다.    

드디어 천순제 8년 하남 서화현 출신 유통(劉通)이 스스로 왕(漢王)이라 칭하고 유민 4만여 명을 모아 기의(起義)하였다. 조정에서는 공부상서 백규(白圭)를 제독군무로 삼아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양측이 여러 차례 격전을 벌였지만 마침내 봉기군이 패했다. 유통은 전사하고 나머지는 사천과 섬서 등지로 흩어졌다. 난은 일시적으로 진압되어진 듯 했지만 조정과 유민 사이의 산발적인 충돌은 계속 이어졌다.

성화제 6년에 재차 봉기군이 결성되었다. 2차 봉기의 지도자 이원(李原)은 태평왕(太平王)이라 칭왕하고 현성을 공격하였다. 조정은 항충(項忠)을 형양총독으로 임명하여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항충은 봉기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유민들이 애써 개간한 땅도 황무지로 만들어버렸다.

형양 땅에 다시는 발을 못 붙이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마침내 이원도 사로잡혀 난이 진압되자 항충은 '평형양비(平荊襄碑)'를 세워 자신의 업적을 과시 하였으나 백성들은 이 비석을 타루비(唾淚碑, 눈물을 흘리게 하는 비석)라 불렀다. 살아남은 유민들은 각지로 흩어졌다.

진씨는 열두 살 때 부모님이 애써 일군 땅이 모두 파괴되고 가족들 모두 몰살당하자 이를 악물고 탈출해 지금까지 운부산에서 사냥을 하며 살고 있다고 하였다.

"나는 형양의 유민이 아니고 백련교도라오."

주원외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백련교도라면?
"그렇소, 미륵정토(彌勒淨土)를 염원하고 새로운 후천세상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오."

주원외의 눈에 빛이 났다.

백련교는 남송 시절 곤산 출신 모자원(茅子元)을 시조로 한 불교 정토종의 한 분파다. 백련교는 특정 교리만을 고집하지 않고 타 종교와의 융합이나 적용에 적극적이었다. 미륵불과 비슷한 구세주의 개념이 있는 경교(景敎)(주1), 도가의 음양처럼 선과 악의 이분법 세계관을 가진 현교(炫敎)(주2), 윤회와 같이 사후세계의 순환을 강조한 명교(明敎)(주3) 등의 교리를 흡수 융합하였다.

그러다보니 강력한 교리적 구심점이 없고 상황에 따른 교리적 해석이 분분해 백련교도들 사이에서도 종파분쟁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세계의 강력한 염원을 담은 미륵신앙과 만인이 평등하다는 핵심사상은 변치 않아 지배층에게는 항상 눈엣가시로 존재했다.

원나라 말기 오랑캐를 몰아내고 한족 조정을 세우자는 반원복송(反元復宋) 운동의 선두에 서는 바람에 한때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백련교도가 촉발한 반원운동은 이내 홍건기의(紅巾起義)로 발전했고, 여기서 주원장이라는 걸출한 무장이 탄생해 마침내 명나라까지 건국하였다.

국호 '명(明)'은 백련교도의 한 분파인 명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파다했으나 태조 주원장은 이를 부인하고 이내 백련교를 탄압했다. 권력을 쥔 자의 입장에서는 현세를 부정하는 미륵신앙과 기존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평등사상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주적(朱敵)과 같은 하늘 아래 숨 쉴 수 없소."

주원외가 단호하게 말했다. 주적이란 주씨 성을 가진 명조를 말함이리라. 그는 주원장의 배교(背敎)에 치를 떠는 것 같았다.

"명조(明朝)에 들어서 불알 없는 자들의 폐해가 크다고 들었소, 환관들이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하는 건 수많은 살육을 딛고 세운 주씨 가문의 응보일 뿐이오."
"대인께서는 사냥으로 업을 삼고만 계신 건 아닐 것 같은데요……."

혁련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소. 나는 이곳 산중에서 진씨와 함께 외부 세계의 동향을 파악하고 하고 있소. 대행산 깊숙이에 우리의 본거지는 따로 있소이다. 미래불이 오시는 그날을 위해 우리 교도들은 성심성의를 다해 준비하고 있소이다. 더 이상 캐묻지는 말아 주시오." 

주원외는 차를 들어 한모금 마시고는 이야기를 계속 했다.

"내가 그대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쫓기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우리 교의 가르침 때문이기도 하지만 강호인들마저 환관들에게 복속되는 걸 바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오."
"대인의 뜻, 마음 깊이 새기겠습니다."

관조운이 정중하게 말했다.

"내가 길을 안내해 주겠소. 관병의 눈을 피할 뿐만 아니라 황하 나루까지 큰 어려움없이 도달할 수 있는 지름길이 있소이다." 

주원외가 말했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주원외의 아내가 차려준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산중 너와집을 나섰다.

주원외는 길인 듯 아닌 듯 희미한 오솔길을 따라 북서쪽 가파른 사면으로 올라갔다. 두 개의 높은 봉우리를 넘고는 세 번째 높은 봉우리에 솟아 있는 바위에 올라 남쪽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가면 함진(崡津)라는 마을이 나올 것이오. 작령현 북쪽인데 황하를 끼고 있어 수운(水運)이 드나드는 곳이오. 그곳 나루에서 아칠이라는 사공을 찾으시오. 그에게 '배꽃이 봉우리를 맺었습니다' 라고 하면, '아직 바람이 차갑습니다' 라고 답할 것이오. 그런 후 주 처사가 보내서 왔다고 하면 정주나 개봉까지 가는 배를 주선해 줄 것이오, 그밖에 다른 어떤 얘기도 섞지 마시오. 사공도 당신들에게 대해 묻지 않을 것이오. 그럼 이만."

주원외가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베풀어 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관조운과 혁련지도 허리를 깊게 접으며 인사했다.

남녀는 가파른 비탈을 나는 듯이 내려갔다.

서녘 하늘 멀리 먹구름이 운부산을 향해 대군처럼 몰려오고 있다.

"곧 비가 내릴 모양이군."

주원외가 하산하는 남녀를 바라보며 혼잣말했다. 습한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주1)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트리우스교의 중국식 호칭이다. 당 현종 때 중국에 전파되었다. 
(주2) 고대 중동에서 발생한 조르아스터교를 말하며, 일명 배화교(拜火敎)라고도 함.
(주 3세기 경 페르시아에서 발생한 종교. 마니교라고도 칭하며 당 측천무후 때 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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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월, 수, 금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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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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