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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인규

이틀 전 사부님이 금릉에 잠시 출타를 하고 오겠다더니 손님을 데려온 모양이라고 혁련지는 생각했다. 그녀는 검을 아래로 쥐고 포권을 취하고는 허리숙여 인사를 올렸다.

"소녀, 혁련지라고 합니다. 어르신께서는 저희 사부님의 손이신지요?"
"허허, 중원의 예법 따윈 내 앞에서 잊어버리게."

노인이 손을 홰홰 저었다.

"어르신께서는 중원이 아닌 동천(洞天: 하늘로 통하는 굴로 신선이 사는 곳)에서 오신 분이신가요?"

혁련지가 눈꼬리와 입꼬리를 서로 마주보게 살짝 구부리며 물었다.

"허허, 처자가 제법 보는 눈이 있구먼. 저 먼 남쪽 남섬부주(南贍浮洲)에서 오랜만에 인간세에 구경나온 늙은이라고만 생각해라. 하하하핫,"

노인은 허연 수염을 바람에 날리며 웃었다. 

'흥, 자기가 무슨 신선이라고 남섬부주람.' 속에서 토라진 맘이 발끈했지만 겉으론 싹싹하게 웃으며 노인의 혀에 장단을 맞춰 주었다. 

"어머, 그럼 제가 미후왕(美候王: 서유기에서 돌원숭이가 손오공이 되기 전의 다른 이름)이라도 되었으면 좋겠군요."
"허허, 처자의 말솜씨가 미쁘기 그지없네 그려."

노인네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 차며 허연 수염이 덩달아 꼬리를 쳤다. 

"하오나, 선계에서 오신 영력하신 분이 저희 사부님을 왜 욕되게 하시는지요?"

혁련지는 좀전 노인이 스승을 빗대는 말이 가시로 남아 비꼬는 말투로 대거리했다.

"예끼, 처자가 성깔이 있구먼, 늙은이가 주책없이 한 소리했기로서니, 꼭 짚고 넘어가야 하겠는가. 모 뭐시기가 검술만 가르쳤지, 겸양은 가르치지 않은 모양이구먼."
"조사(祖師)께서 저희 사부님을 낮추시는 말씀에 제자된 도리로 어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혁련지가 어느새 노인의 호칭을 조사로 바꿨다.

"허어, 아까 자네는 스스로를 미후왕이라 하고 이제는 나를 조사로 바꾸는 걸 보니 천상 이름값에 해당하는 뭔가를 내놓으라, 이 뜻인 거 같은데……."

노인이 입가엔 여전히 빙긋한 미소가 매달려 있다.

오래국 화과산 수렴동의 원숭이 대장 미후왕은 남섬부주 삼성혈에서 어느 조사에게 손오공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도술을 전수받는다. 그 조사가 바로 수보리다. 혁련지가 스스로를 미후왕에 빗대고 그 다음에 노인을 조사에 빗대었다. 그 이면에는 당신이 스스로 선계에서 온 신선이라 했으니 나에게 도술이라도 하나 가르쳐주어야 하지 않나 하는 비유가 숨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인이 그에 화답하여 말한 것이다.

"에헴."

흰수염의 노인은 마당으로 걸어 나오더니 담장의 싸릿대 한 개를 뽑아왔다.

"너희 사부 모 뭐시기란 작자가 푸른학이 노니는 어쩌구 하는 검법을 창안했다구?"
"네, 이름하여 청학십삼식이라고 하옵니다."
"그러니까, 처자가 처음에 강바람에 돛단배 나가듯 시연한 것이 일식부터 칠식이고, 팔식에 이르러 동작이 막혔다, 이 말이지."

노인은 마치 남에게 들은 것처럼 말했다. 

"예, 그러하옵니다. 어르신."
"흠, 내가 아까 검식이 어쩌고 검로가 저쩌고 한 건 귓등으로 흘려버리게나. 하지만 참견한 죄가 있는데 그냥 갈 순 없으니, 내 한 가지 동작과 한 가지 수를 가르쳐 줌세. 이것만 익히고 나면 이 남(南)모를 만난 보람은 있을 것이네."

노인은 싸릿대를 오른손에 잡고 하늘을 향해 일직선으로 쭉 뻗었다. 이어 왼다리로 중심을 잡고 오른 다리를 접어 왼 무릎에 발바닥을 댔다. 왼손은 손날을 세우고 가슴 앞에 모았다. 마치 참선하는 승려들의 수인(手印) 같았다. 노인은 그 자세로 꼼짝 않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석상처럼 굳어져 있던 노인이 '타압!' 하는 기합과 함께 등을 땅으로 향하며 몸을 수평으로 눕혔다. 중심은 여전히 왼다리다.

그 자세에서 노인이 왼다리를 축으로 오른쪽으로 서서히 맴돌았다. 노인이 원을 도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마치 팽이가 도는 듯했다. 휭휭, 싸릿대 가지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나왔다. 그렇게 원을 돌던 노인이 어느 순간 멈춤과 동시에 처음의 자세로 되돌아갔다. 이번에는 팔과 다리가 반대였다. 어느새 싸릿대는 왼손에 쥐여서 있었다.

"이 동작을 완벽하게 습득한다면 내가 처음 얘기한 검로가 무얼 말하는지를 이해할 것이다."

노인은 격렬하게 원을 돌고도 거친 숨결 하나 내쉬지 않았다. 

"나머지 한 가지 수는 무엇이온지?"

혁련지가 공손하게 물었다.

"이 수는 무공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되는 적을 만났을 때 순간적으로 기만하여 위기를 모면하는 속임수라고 볼 수 있다네. 상대가 등을 보일 때 기습의 형태로 공격하면 성공 가능성이 꽤 높지."

노인은 혁련지에게 검을 달라고 하였다. 혁련지가 양손으로 검을 바치자 노인은 검을 쥐고 동작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하수가 뒤에서 기습을 하면 고수들은 대개 알아차린다. 기습할 것을 미리 예상한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 상대가 등을 보인다고 무작정 공격하면 이는 고수의 유인작전에 넘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어. 이 수는 그런 고수의 틈을 또 노린 것이다. 고수가 후방 공격을 막아내면 하수는 일부러 검을 놓쳐 버린다. 그렇게 되면 고수는 하수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방심하게 되지. 그때 검집으로 일격을 가하는 것이다. 검으로 허초를 만들고 검이 아닌 것으로 실초를 전개하니 이것이야 말로 허허실실이다."

동작을 끝낸 노인은 말을 멈추고 혁련지를 바라보았다. 혁련지의 또랑또랑한 눈빛에서 무얼 발견했는지 노인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품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강호의 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예의 완성이지만, 인생의 도에서 가장 우선하는 건 살아남는 것이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흐리면 발을 씻는 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

노인이 말을 마치고는 마당에 놓인 자리에 앉았다.

"존장께서는 어찌 소질의 어리석은 제자를 농락하십니까, 그려?"

어느새 나타났는지 모충연이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노인에게 장난기 어린 말투로 따졌다.

"허허, 자네의 애제자가 조르기에 어린애 같은 장난질하나 가르쳤을 뿐인데, 농락이라니, 모 사질의 흉이 과하구먼."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모충연을 맞이하였다.

남녀는 해가 어스름해질 때까지 북쪽 연봉을 따라 달렸다. 인근에서 가장 높이 솟은 높은 봉우리에 오르자 혁련지가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사형, 이쯤에서 내려가도록 해요."
"왜, 뭐가 보이나?"

관조운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보인다기 보다는 제 감이예요. 너무 돌아가면 소림사까지 가는 시간이 너무 걸리고, 그 사이 은화사나 금의위가 사숙님께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모르니까요."
"저들이 사숙님이 필요하니만큼 일단 치료를 해주겠지만, 그 후에는 뻔하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의 행선지를 밝혀내려고 할 거야."
"맞아요, 사숙님이 쉽게 발설하지야 않으시겠지만, 워낙 악랄한 자들이고 게다가 사숙님이 무공을 잃으셔서 저들의 혹형(酷刑)을 감당할지 의문이군요."

남녀는 능선에서 내려와 산중턱으로 향했다. 산중은 사람의 발길이라고는 전혀 닿지 않은 원시림이 펼쳐졌다. 칠부 능선부터는 관목보다는 키 큰 나무들이 빽빽이 숲을 이루었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허리 높이의 잡목을 헤치고 나가는 것이 영 성가셨다.

"사형, 제가 앞에 설게요."

혁련지가 허리에서 검을 뽑으며 말했다. 그녀는 앞장서서 잡목을 잘라내며 길을 만들었다. 앞서 가던 혁련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사형, 이거 봐요, 짐승이 다닌 흔적이에요."

혁련지가 관조운을 돌아보며 말했다. 관조운이 바닥을 자세히 살피니 희미하게나마 짐승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고 관목의 잎들이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발자국의 크기나 깊이로 봐서 곰이나 범처럼 큰 짐승 같은데,"

관조운이 허리를 굽히고는 발자국을 자세히 살피며 말했다.

"어쩜 멧돼지일수도 있어요. 아무튼 무작정 길을 내기보다는 짐승길을 따라 가는 것이 편할 듯 싶네요."

말을 마치자마자 혁련지는 다시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헤쳐나갔다.

스각스각 정강이에 닿는 이슬을 털어내며 잰 발걸음으로 가던 혁련지가 갑자기 '어이쿠' 하며 앞으로 쓰러졌다. 그녀는 발목에 감기며 자신을 넘어지게 한 것이 무엇인가 확인하려고 상체를 앞으로 내미는 순간 쏴악 하는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무엇인가가 혁련지를 덮어씌우더니 이내 그녀의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

뒤에 있던 관조운은 아차 싶어, 재빨리 손을 위로 뻗었다. 그러나 이내 발목에 밧줄이 감겨들더니 몸이 공중으로 뜨고 말았다. 혁련지는 그물에 갇혔고, 관조운은 발목이 하늘로 향한 채 거꾸로 매달렸다.


태그:#무위도, #무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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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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