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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등짐을 지고 히말라야 산악지대를 오르내리는 조랑말들. ⓒ 송성영
안나푸르나를 멀뚱멀뚱 올려다보며 란드룩 마을을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와 무거운 몸을 내려놓고 있는데 어디선가 방울소리가 들려왔다. 밖으로 나와 보니 무거운 등짐을 진 조랑말들이 비탈길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조랑말들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목에 매달려 있는 방울들이 힘없이 달랑거린다.

히말라야 산악지대를 오가며 짐을 실어 나르는 조랑말들이다. 녀석들은 제법 규모가 큰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어 놓고 풀밭에서 달콤한 휴식 시간을 갖는다. 등짐을 벗어놓은 녀석들은 마치 장거리 행군 도중에 무거운 군장을 풀어놓고 잠시 휴식을 취한 군사들 같다.

양 뒷다리로 엉거주춤 버티고 서서 오줌보를 풀어놓거나 풀을 뜯고 더러는 쪼그려 앉은 채로 풀을 뜯다가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녀석들은 먹는 것조차 힘든 모양이다. 졸다가 먹고 졸다가 먹고를 반복한다. 성기를 길게 늘어뜨린 놈도 있다.

무거운 등짐지고 올라와 서로 위로하는 조랑말들
무거운 등짐을 풀어놓고 풀밭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조랑말들. ⓒ 송성영
머리 맞대고 서로의 얼굴을 비벼대는 조랑말들 ⓒ 송성영
눈썹이 유난히 길어 순하디 순해 보이는 녀석들, 그중에 몇몇은 머리를 맞대고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듯 얼굴을 비벼댄다. 녀석들은 자식과 어미 혹은 동고동락을 함께 해온 암수 한 쌍인지도 모른다.

한 녀석이 무리에서 외떨어져 뜯어 먹을 풀도 별로 없는 곳에서 겨우 풀을 뜯다가 이따금씩 몸 굴리기를 한다. 가만 보니 발라당 나자빠져 있는 녀석의 배 부위에 상처가 보인다. 다른 녀석들은 짤랑 짤랑 경쾌한 방울소리를 내며 생기 넘치게 풀을 뜯고 있는데 녀석은 식욕도 없어 보인다.

방울소리는 왕성한 식욕을 과시하는 소리다. 하지만 외톨이 녀석의 목에서는 방울소리가 나질 않는다. 풀을 뜯다말고 껌뻑껌뻑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감당 못하며 졸고 있다. 방울소리를 꺼놓고 아무렇게나 누워 잠들어 있는 녀석의 발굽에도 피멍이 보인다. 종일토록 등에 진 짐만큼이나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뜨고 걷고 또 걸었을 것이다.
상처투성이의 외톨이 조랑말. 지친 몸으로 식욕조차 잃어버린 녀석이 나를 닮았다. ⓒ 송성영
저 상처투성이의 조랑말처럼 내 몸에서도 방울소리가 나지 않는다. 토마토 두 개와 빵 한 개가 전부였지만 식욕이 없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고사하고 한두 시간 정도 란드룩 마을을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와 다친 무릎을 감싸 안고 축 늘어져 있다.

잠들어 있는 외톨이 조랑말을 지켜보다가 공동화장실에서 누런 오줌 줄기를 내리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일주일 내내 세수를 하지 않은 것 같다. 긴 수염에 햇볕에 검게 그을린 것인지 때인지 거무스름한 얼굴이 뻣뻣하다.

외톨이 조랑말처럼 몸은 만신창이로 지쳐 있지만 어둠이 깊을수록 작은 불씨가 선명하게 드러나듯이 정신은 또렷해진다.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축축 늘어지는 몸을 일으키듯 땟물에 절은 옷을 홀라당 벗어놓고 샤워 꼭지를 틀어 찬물을 온몸으로 으스스 받아드린다.
갑자기 구름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란드룩 마을. ⓒ 송성영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자 갑자기 구름이 내려 앉기 시작하고 멀쩡한 사위가 어두워져 가더니 이슬비가 내린다. 게스트하우스 아가씨 말대로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린다는 몬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모양이다. 풀밭에 쓰러져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외톨이 조랑말이 빗줄기에 정신이 번쩍 드는지 몸을 벌떡 일으켜 풀을 뜯는다.

본능적으로 풀을 뜯고 있는 녀석을 보다가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바람이 분다. 살아야 한다.'는 시 구절을 떠올린다. 조랑말은 '비가 온다. 살아야 한다.'라는 의지로 부지런히 풀을 뜯고 있다. 등짐을 지려면 먹어야 한다. 비가 오지 않아도 살아야 한다.

녀석은 뱃가죽이며 발굽에 피멍이 아물기도 전에 죽지 않을 만큼의 등짐을 지고 또다시 길을 나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짐을 질 수 없는 낙오자에게는 죽음뿐이라는 사실 또한 직감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가는 이슬비를 맞아가며 뒤늦게 풀을 뜯고 있는 외톨이 조랑말을 보면서 란드룩 '헝그리 아이 게스트하우스'에 얼마나 더 머물러야 할 것인지를 생각한다. 답이 없다. 외톨이 조랑말의 방울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다른 동료들은 멍청히 서서 꿈벅꿈벅 무거운 눈꺼풀로 우물우물 되새김질 하고 있는데 상처 많은 외톨이 조랑말은 혼자서 달랑달랑 방울소리를 내며 부지런히 풀을 뜯고 있다.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문득 조랑말들이 자유롭게 풀밭에 풀려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산비탈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는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나 도망칠 수 있는 기회다. 그럼에도 그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초원을 자유롭게 누비고 다니는 말의 본성이 퇴화된 것일까. 무엇이 저 조랑말들의 본성을 길들여 고통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한 것일까. 고통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와 저 조랑말들과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나는 조금씩 굵어져 가는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는 종종 빗줄기를 타고 올라 머나 먼 전생의 동굴로 여행을 떠나는 상상을 하곤 한다. 비를 피할 수 있는 동굴은 가장 안락한 공간이다. 나는 그 동굴 속에 앉아 있다.

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설산에서 녹아내린 물 한 방울이 바다와 이어져 있고, 내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앞바다와 이어져 있듯이 빗방울은 까마득한 원시 동굴과 맞닿아 있다는 상상을 한다.

원시 시대에는 동물이든 인류든 비를 피할 수 있는 동굴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동굴은 비가 오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공간이 되었을 것이고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을 것이다.

동굴은 인류의 가장 소박한 생활공간이다. 인류가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만 소유했을 동굴의 소박한 삶의 형태와 일찍이 깨달음을 성취한 성인들의 정신을 결합한 삶을 살아왔다면 현재의 인류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을까. 적어도 지금처럼 좀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생명을 함부로 해가며 서로 증오하고 싸우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류를 파멸로 이끌어갈 무시무시한 살상무기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인류는 진화를 거듭할수록 그에 따른 욕망 또한 잔혹하게 진화되어 왔다. 정신 또한 사랑과 자비의 화신인 수많은 성인들의 깨달음을 통해 진화되어 왔다. 진화된 정신으로 잔혹한 욕망을 거둬낼 수 있다면 지금처럼 생명이 생명을 길들여 다스리고 부리고 억압하고 죽이는 끔찍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조랑말들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사슬
왔던 길로 되돌아 떠나는 조랑말들. ⓒ 송성영
빗줄기를 타고 부질없는 상상의 세계를 유영하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올 무렵 오락가락하던 비가 그쳤다. 조랑말들은 다시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주어진 시간, 주어진 공간에서 풀을 뜯고 주어진 잠자리에 만족하며 평생을 살아가는 조랑말들, 이제 또 어디로 떠나는 것일까.

처음 이곳에 올 때처럼 등에는 자루가 실려 있다. 하지만 빈 자루다. 비탈길을 내려서는 걸음들이 딸랑딸랑 목에 건 방울 소리만큼이나 가벼워 보인다. 하지만 저 빈 자루에 또다시 곡식을 가득 채우고 험난한 비탈길을 오르고 또 올라야 할 것이다. 끊임없이 짐을 지고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말몰이꾼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멀찌감치 앞장서 걸어가고 있다. 말몰이꾼이 보이지 않은 틈을 타 대열을 이탈할 수도 있는데 조랑말들은 늘 해왔던 일상처럼 앞에서 걷는 말꼬리를 따라 딸랑거리며 묵묵히 걷고 있다.

딸랑거리는 방울소리가 조랑말들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사슬처럼 다가온다. 조랑말들에게 저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방울을 달고 살아가는 것이 어디 조랑말뿐이겠는가. 사람인들 자본의 먹이사슬에 얽매여 온갖 속박과 억압의 고통스런 짐을 벗어던지지 못한다면 저 조랑말의 운명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상처투성이의 조랑말은 맨 뒤를 따르고 있다. 똑같이 빈 자루를 등에 싣고 있지만 불편한 걸음걸이로 점점 뒤처지고 있다.  어쩌면 저 길이 녀석에게는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길이 될지도 모른다. 나 또한 안나푸르나가 올려다 보이는 이곳 란드룩을 떠나면 영영 돌아올 날이 없을지도 모른다.

몸과 마음이 온통 상처투성이인 나를 닮은 조랑말이 저만치 비탈길 아래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인간은 조랑말이 아니다.'라는 단순한 생각을 했다. 인간은 저 운명의 사슬처럼 목에 걸고 다니는 '조랑말의 방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은 그 어떤 절대 신이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그 어떤 억압의 사슬을 스스로 풀 수 있다. 그 어떤 속박과 억압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속박과 억압의 고통을 직시해야 한다. 인간인 나는 끊임없이 그 고통을 직시하고 있었다.
안나푸르나 란드룩 마을, 한 민가의 벽에 내걸려 있는 말방울들. ⓒ 송성영
태그:#네팔 난드룩, #조랑말, #운명, #생로병사, #자유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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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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