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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충은 눈앞의 사내를 대적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사내를 따돌리고 말을 타야 했다. 그럴 기회가 주어질까. 곽충은 호흡을 최대한 끌어들였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절기를 펼쳤다.

비선팔무 5식 제형환위(劑形幻衛)와 6식 표형비쾌(豹形飛快)를 동시에 시전했다. 비선팔무의 5식과 6식은 뇌우와 화포가 동시에 작열하는 것처럼 일시에 공격력을 극대로 끌어올리는 초식이다. 제7식과 제8식이 따로 있긴 하지만 아직 경지에 오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방어의 극대화에 중점을 둔 초식이라 작금의 상황과는 맞지가 않았다. 곽충은 이번의 공격이 성공은 고사하고, 어느 정도 성과라도 있길 빌었다.

그의 목표는 눈앞의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몇 발 물러서게 하고 그 틈에 도주를 하는 것이다. 과연 적은 몇 발자국 물러섰다. 이전 공격에서 조금도 거리를 주지 않던 것에 비하면 이상할 지경이었다. 곽충은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상대가 물러서자마자 뒤를 돌아 말을 향해 뛰었다. 기마술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는 나뭇가지에 묶어 놓은 고비를 풀 여가도 없이 검으로 줄을 끊어버렸다. 동시에 신형을 날려 안장에 올라탔다.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번개 같은 동작였다.

곽충은 고삐도 잡지 않은 채 '이랴' 하며 발뒤꿈치로 말의 뱃구레를 힘껏 찼다. 말이 놀라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그는 말의 목을 잡고 상체를 잔뜩 웅크려 말의 뒷잔등에 붙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말이 채 몇 걸음도 가지 않아 그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지고 말았다.

곽충은 왼손으로 오른쪽 어깻죽지를 감싸 안고 땅에서 뒹굴었다. 그의 뒷등과 어깻죽지 사이의 곡원(曲垣)혈에 반짝이는 뭔가가 박혀 있다. 이어 반짝이던 물체가 공중을 치솟더니 검은 옷 사내 무영객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수리검이다. 손바닥만한 단도의 끝에 줄을 매달아 비도(飛刀)로 사용한 다음 회수하는 원거리 공격무기다.

무영객은 곽충이 자신의 한 수에 절명하는 동료를 보고 겁을 먹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눈빛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눈에서 뭔가의 망설임이 살짝 비쳐졌다. 이 자는 도망가려 하는군. 그의 예상을 증명해준 건 애송이의 이어진 공격였다. 스스로는 사력을 다해 공격을 하고 있음에도 엉덩이가 뒤로 빠지고 무게 중심이 뒤쪽으로 몰리고 있다. 여차하면 뒤로 돌아서겠다는 의중이 자신도 모르게 드러난 것이다. 물론 본인은 그걸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상대의 기세와 자세를 한눈에 파악하는 것이 곧 상수다. 상수는 하수의 길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출수해도 기선을 점할 수 있다. 애송이가 필사적으로 휘두르는 검은 제법 위력적이었지만 위험하지는 않았다. 무영객은 일부러 몇 걸음 후퇴했다. 이때다, 싶었는지 애송이는 말을 향해 달려가 한 번의 동작으로 안장에 착지했다. 기마술은 제법이었다. 나뭇가지에 묶인 고삐줄을 풀 새도 없이 검으로 끊어버린 것도 칭찬할만한 임기응변이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자신 같았으면 검을 한 번 더 휘둘러 나란히 있는 동료 말의 급소를 찔렀을 것이다. 그래야 뒤쫓아 오지 못할 뿐 아니라 놀란 말로 인해 공격자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 고삐도 없이 말의 목만 잡고 뛰쳐나간 동작 역시 훌륭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결정적인 실수는 등을 보인 것이다. 하수가 상수 앞에서 등을 보인다는 건 스스로를 방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무영객은 품에서 수리검을 뽑아 날렸다.

애초에 무영객이 애송이를 검으로 제압하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곽충과 그의 수하 복장에 새겨진 '비(飛)' 자를 보고 비룡문이나 비룡표국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룡문의 제자든 비룡표국의 표사이든 간에 운부산의 깊은 계곡으로 향하고 있다는 건 십중팔구 담곤과 관계된 자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애송이를 심문하면 담곤의 행방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곽충은 못 쓰게 된 오른팔 대신에 왼손으로 검을 지탱한 채 비스듬히 누워 있다. 무영객이 다가가자 엉덩이를 질질 끌며 뒷걸음 쳤지만 이내 나무둥치에 막히고 말았다. 무영객은 곽충의 검날을 잡고 손에서 빼냈다. 그리고 나무에 기대 반쯤 눕히고는 물었다.

"비룡표국 담 국주에게 가는 길이냐?"

갑자기 애송이가 대답도 하기 전에 몸을 부르르 떨더니 입가로 게거품을 흘렸다. 무영객은 아차 싶어 애송이의 몸을 안고 살폈다. 안색으로 보나 경련으로 보나 독을 삼킨 것 같지 않았다. 애송이의 상투 사이로 검붉은 피가 실지렁이처럼 스멀스멀 내려오더니 목 부근에서 주르르 흘러내렸다. 말에서 떨어질 때 머리를 다친 모양이다. 애송이가 떨어진 자리를 보니 끝부분이 빨갛게 된 돌멩이가 뾰족한 끝을 세우며 성난 아이처럼 서 있다. 기마술만 훌륭했지 낙마술은 익히지 않은 모양이다. 무영객은 다급하게 물었다.

"담 국주는 지금 어디 있나?"
"반…야…봉. 사, 사조 어른. …그, 금의위가 사조 어른께 가고 있다는 전갈이옵니다."

뒤죽박죽된 애송이의 머릿속엔 자신의 임무만 메아리치는 모양이다.

"이봐, 담 사조는 운부산 어디에 있는 거야?"

무영객이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 다시 물었다.

"사, 사조 어른께 전합니다. ……지금 은화사가 사조 어르신께……."

애송이는 여전히 자신이 전해야 하는 전언(傳言)만 뇌까리고 있다. 아무래도 이 자를 살릴 길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런 수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드넓은 운부산에서 담곤을 어떻게 찾나 고민하다 조복에게 연락하려는 참이었는데, 마침 이 자가 금의위가 담곤에게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줬다. 덕분에 조복을 찾는 수고와 걸음을 아낄 수 있었다. 길이 보이는 높은 곳에서 기다리다 금의위가 나타난 후 조복에게 연락하면 될 일이다. 무영객은 사체를 절벽 밑으로 던지고는 남은 한 마리 말의 고삐를 잡고 숲으로 들어갔다.

한바탕 드잡이질을 했더니 지혈해 놨던 상처가 터져버린 것 같았다. 옷자락을 헤쳐 상처를 보니 피가 다시 흘렀다. 아무래도 꿰매야 할 것 같았다. 무영객은 품안에서 생선 힘줄로 만든 실과 바늘을 꺼냈다. 살갗을 파고드는 바늘땀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지면서도 자극이 주는 묘한 쾌락에 후드득 진저리쳤다. 노인은 나에게 고통의 쾌락을 주었지. 지옥에서 만나면 이승에서 얻은 고통을 모두 돌려주겠어, 노인. 그런데 노인이 가르쳐 준 의술은 꽤 쓸모가 있군. 그동안 실전에서 얻은 상처가 모두 씻은 듯 나았으니까. 노인의 처방에 따르자면, 이 경우 상처가 아물 때까지 하루이틀은 꼼짝 않고 있어야 한다.

이번 일은 먼저 조복의 손을 빌려야 할 것 같군. 조복이란 자, 나름대로 솜씨도 있고 무엇보다 동기가 확고해 믿음이 갔다. 인간적인 믿음이야 터럭만치도 없지만, 그 자의 일에 대한 욕심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설프고 모호한 신념보다 돈이라는 확실한 동기가 있다는 게 오히려 그를 신뢰하게 했다. 일의 성공을 확신할 순 없지만 가능성이 꽤 있다. 일단 맡겨놓고 그자의 뒤를 따르자. 자신이 받게 될 보수의 상당액을 넘겨야겠지만 지금 상태에서 무리할 순 없다. 무모함과 목숨을 바꾸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무영객은 계곡 사이로 드문드문 몸을 드러내는 임도에 시선을 두며 비스듬히 몸을 눕혔다.

조복은 금의위 대원 다섯 명과 은화사 요원 둘과 함께 운부산에 들어섰다. 은화사에서 온 사람은 자신을 척숭이라고 했고 다른 한 명은 그의 수하였다. 그들은 선발대 격으로 먼저 출발해 요소를 차단한 다음 본대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장반 풍천의와 영반 신렵은 금의위 대원을 좀더 충원하여 뒤따르기로 했다.

천애의 협곡이 좌우로 이어져 한낮이건만 어두컴컴했다. 길이 좁아 말들이 달릴 수가 없어 일렬로 천천히 가니 누가 보면 마치 유람이라도 나온 듯했다. 따각따각 발굽 소리만 계곡에 울려퍼졌다. 뒤따라오던 대원 하나가 이곳을 조수협이라고 알려줬다. 새들마저 갇혀 그런 이름이 주어졌단다. 매복이나 봉쇄를 한다면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은 천혜의 길목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과연 새들도 쉽게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단애의 폭이 좁고 깊었다. 새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렸다. 조복은 귀를 기울였다. 까악, 깍, 까악…. 조복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며 관모의 끈을 풀었다 다시 매었다. 그러고 나서 오른손을 들었다. 그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누군가와 연락을 취하는 동작이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조복은 조수협의 입구에 대원 둘을 매복시켰다. 만약 담곤과 일행이 산장에서 몰래 빠져나온다 하더라도 조수협만 지키고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할 것이다. 조수협을 통과해 다시 고개를 넘자 이어 구사곡으로 이어지는 계곡이 나타났다. 조복은 구사곡에 세 명의 대원을 매복시키고 척숭과 은화사 대원 하나 그리고 전광과 자신 이렇게 넷이서 숲길로 들어서는 찰나.

"잠깐, 마차가 있습니다."

앞서 가던 전광이 소리를 질렀다. 과연 길가 덤불 속에 마차를 숨겨 놓은 게 보였다.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위장을 했지만 누구나 주의 깊게 살피면 알 수 있을 정도로 어설펐다. 굳이 숨긴다기보다는 그저 눈에 잘 안 띨 정도로 위장해 놓았다. 그자들은 우리가 뒤따르는 걸 모르거나 아니면 급하게 다시 되돌아 나오려는 모양이다. 조복이 생각했다.  

"우리도 이 정도에서 매복을 하며 본대와 은화사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어떻소."

조복이 척숭을 향해 말했다.

"일단 담곤의 거처부터 확인합시다."

척숭이 답했다.

"좋습니다."

조복이 흔쾌히 말하고 앞장서자 척숭과 은화사 요원 그리고 전광이 뒤를 따랐다. 숲길로 이 각쯤 가자 너른 공터가 보이고 그 뒤론 깎아지른 절벽이 솟아 있다. 공터엔 가옥 두 채가 나란히 서 있다.  

조복은 뒤돌아 척숭을 보았다. 척숭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자 그들은 말없이 마차가 있는 곳까지 되돌아 나왔다. 절벽 위로 오르지 않는 한 나오는 길은 이곳 밖에 없다는 걸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이곳에서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본대가 오면 산장을 포위하는 걸로 하지요."

조복이 말했다.

"그렇게 합시다. 하나 거듭 말씀 드리지만, 풍장반이 이끄는 본대가 오더라도 감시와 경계만 하고 나머진 우리 은화사에게 맡겨두기 바라오."

척숭이 무뚝뚝하게 대답을 했다.

"알겠소이다. 그렇게 하죠."

조복은 대답하면서 속으로 웃음이 나왔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척숭과 은화사 요원은 숲 가장자리 나무를 은폐물로 삼아 몸을 숨기고 조복과 전광은 반대편 길에서 몸을 숨겼다.

시간은 어느덧 오시가 되었다. 조복은 주위를 둘러보고 전광과 자신 밖에 없는 걸 확인하자 등에 멘 장검을 풀러 허리에 찼다. 그리고 전광을 돌아보며 말했다

"전 사방, 나를 따라 오게."
"넵."

전광도 등에 멘 장검을 풀어 손에 쥐었다.

"어딜 가시는 거요?"

건너편 숲에서 척숭의 걸걸한 목소리가 따지듯 들려왔다.

"산장 주위를 정찰을 하고 오겠소이다. 우리가 모르는 길이 혹 있을 수 있고, 담곤이 아직 산장에 있는지도 확인해 보아야 하지 않겠소."

조복이 대꾸했다.

"부디 경거망동 말기 바라오."

척숭의 대답이다.

"염려 놓으십시오."

조복의 속으로 욱 했으나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조복은 척숭의 눈을 벗어나자 정찰은 고사하고 산장으로 바로 향했다. 공터에 이르자 조복은 자세를 낮추어 산 쪽으로 에돌아 자운헌 주위를 탐색했다. 전광은 조복의 뒤를 묵묵히 따라왔다.

조복은 전광의 이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전광은 자신이 명령하면 군말 없이 따랐다. 은화사의 지시사항을 그가 모르는 바도 아니었으나, 직속상관인 자신의 명령만 따랐다. 그는 상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부류이다. 조복은 은화사가 오기 전, 아니 그보다 풍천의가 이끄는 본대가 오기 전에 자신의 볼 일을 봐야 했다.

뻐꾹, 뻐꾹, 뻐꾸기 한 마리가 숲에서 울어댔다.

덧붙이는 글 | 월, 수, 금요일, 주 3회 연재합니다.



태그:#PERD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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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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