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모어와 에단 호크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세이모어와 에단 호크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영화사 진진


1970년생 영화배우 에단 호크는 1927년생 피아니스트 세이모어 번스타인을 어느 저녁 식사 자리에서 처음 만난다. 그즈음 에단 호크에겐 고민이 있었다. 에단 호크는 물질적 부, 유명세 등은 허상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또 나는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그러다 우연히 만난 세이모어와와 대화를 하게 된다. 에단 호크는 말한다. 세이모어와의 대화를 통해 그간 연기를 하며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노라고.

에단 호크가 연출하고 직접 출연하기까지 한 다큐멘터리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는 84분간 세이모어의 눈빛과 손끝,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좇는다. 영상에서 세이모어는 학생을 가르치고, 제자와 대화하고, 틈틈이 카메라를 향해 앉는다. 적절한 템포의 장면 전환과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 그리고 세이모어의 혜안이 담긴 이야기 덕분에 영상은 지루할 틈이 없다.

세이모어 번스타인은 이미 여섯 살 되던 해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연주할 줄 알았고, 열다섯 되던 해 남을 가르칠 수준에 이른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다. 젊은 시절엔 저택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대중적인 유명세와 평단의 호평 속에서 원하면 계속 화려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세이모어에게 중요한 건 유명세나 호평이 아니었다. 유명 음악가로 성공하는 것도 아니었다. 음악 그 자체였다.

쉰 살이 되던 해. 세이모어는 드디어 무대에 서는 게 자연스러워졌다고 느낀다. 공포도, 막다른 벽에 다다른 느낌도 들지 않는다. 이제야 무대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자 세이모어는 어머니도 모르게 고별 무대를 준비한다. 대중을 상대로 한 마지막 연주를 끝마치고 세이모어는 학교로 가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재능을 낭비하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면서.

"내 재능을 학생들에게 주기로 했다."

세이모어를 본 순간 그를 믿게 된 에단 호크


세이모어는 제자와 대화 중 자신이 연주를 그만둔 이유 세 가지를 든다. 상업적인 면이 싫고, 불안감이 싫고, 창작가가 되고 싶었다는 것. 그런 면에서 그는 자신은 아마추어 뮤지션이라고 말한다. 상업적인 목적 없이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세이모어.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세이모어. ⓒ 영화사 진진


아흔이 된 세이모어는 지금도 뉴욕의 작은 스튜디오에 살면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영상의 많은 부분이 세이모어가 학생을 옆에 앉혀 놓고 피아노를 가르치는 모습으로 채워진다. 피아노를 앞에 두고 물결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는 선생과 제자의 모습은 피아노와 먼 삶, 예술과 먼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거리감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에게도 세이모어처럼 삶의 기교가 아닌 삶의 태도를 가르쳐주는 어른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그랬다면 우리는 조금 더 용기 있게 살 수 있었을까, 더 열정적으로 삶을 대할 수 있었을까, 내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었을까. 나는 세이모어의 모습을 보며 왜 에단 호크가 세이모어를 처음 본 순간 그를 믿을 수 있게 됐는지 알 것 같았다.

영상에서 어떤 이는 세이모어에게 말한다. 당신이 좋은 이유는 친구일 때나 음악인일 때나 차이가 없기 때문이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세이모어는 말한다. 삶에서 이러한 통일감, 조화로움을 느끼기 시작한 건 무대를 견뎌내면서 부터였다고. 도망치지 않고 견뎌냈더니, 징징거리는 대신 연습량을 늘렸더니, 이렇게 됐다고.

말하지 않는 세이모어

 영상 속 세이모어의 모습.

영상 속 세이모어의 모습. ⓒ 영화사 진진


한 사람의 음악 인생, 예술 인생을 담은 영상은 잔잔히 흘러간다. 세이모어는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는 대신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조곤조곤 들려준다. 그는 카메라 앞에 홀로 앉았을 때를 제외하곤 대체로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답을 요구할 때만 되묻는 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에단 호크는 많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올 때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많은 걸 얻는 것으로는 행복을 느낄 수 없었고, 인생에서 가장 큰 성공이 가장 큰 실패였다는 걸 깨달은 에단 호크는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고 운을 뗀다. 그 뒤 자기가 원하는 건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방법을 모르겠다고.

그러자 세이모어는 연기를 통해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으냐 되묻는다. 모르겠다고 대답한 에단 호크는 쉽게 말을 잇지 못한다. 카메라는 에단 호크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잡는다. 말 없이 고민하던 에단 호크를 향해 세이모어는 또 다시 느끼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역시 말을 잇지 못하던 에단 호크는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야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 감동에 찬 목소리로 느꼈다고 대답한다.

세이모어는 음악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연습이 필요한 이유를 이해한다면, 음악적 자아와 개인적 자아를 조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럼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거라고. 비단 음악을 통해서만일까. 우리도 우리가 하는 일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꾸준히 연습할 이유를 이해한다면, 조화로운 삶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행복하고 충만한 삶에도.

영상에서 세이모어가 한 말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아래의 말이었다.

"삶이 원래 그렇다는 걸 전 일찍부터 알게 됐던 것 같아요. 갈등과 즐거움이 함께 공존하는 게 삶이라는 걸요. 이게 삶이에요.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음악에도 화음과 불협화음이 있어요. 그런데 화음은 불협화음 후에 더 아름답게 들려요. 불협화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화음이 아름답다고 못 느끼겠죠."

 세이모어 35년만의 연주.

세이모어 35년만의 연주. ⓒ 영화사 진진


영상의 마지막에선 35년 만에 대중 앞에 선 세이모어의 연주를 들려준다. 곡의 끝에서 세이모어는 마지막 한 음을 오래도록 연주한다. 음이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음과 함께 공존하려는 듯이. 연주가 끝나고 음이 사라지자 세이모어의 목소리는 말한다.

"내 두 손으로 하늘을 만질 수 있다니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에요."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황보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에단 호크 세이모어 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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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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