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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밤거리를 환하게 밝히는 슈페티 점포의 모습
 베를린 밤거리를 환하게 밝히는 슈페티 점포의 모습
ⓒ 신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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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에서의 생활, 그리고 여행을 즐겁고 편리하게 만드는 것은 너무나 다양하다. 그 중 두드러지는 점은 늦은 시간에도 즐길 것이 많고,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이 많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베를린에서의 삶을 좀 더 편리하게 하는 곳이 있다. 바로 촌스러운 간판으로 어두운 베를린의 거리를 밤새 환하게 빛내는 슈페티(Späti)라고 불리는 편의점이다.

짧게는 자정까지 길게는 24시간 내내 열려 있는 슈페티는 아시아권 편의점과 비교했을 때는 비교적 단출한 수준의 물건만을 판매한다. 음료, 술, 담배류, 과자류, 간단한 식료품 그리고 꽃, 신문, 잡지, 여행용품과 생필품 정도가 판매품의 전부다. 게다가 점포 내부의 대부분은 술로 가득 차 있는 경우가 많다. 슈페티마다 파는 품목의 종류는 조금씩은 다르고, 인터넷과 문서 출력 등을 할 수 있는 PC방이 함께 결합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보통 평일 오후 8시에서 10시 사이에 대부분의 상점과 슈퍼마켓이 문을 닫는 독일 생활을 고려했을 때, 슈페티는 삶의 편의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존재이다. 밤새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벽에 갑자기 시원한 맥주와 안주를 먹고 싶을 때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조금만 걸어 다니다 보면 근처에 시원한 맥주가 가득한 슈페티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상점들이 아예 문을 닫는 일요일에도 마찬가지고, 베를린을 잘 모르는 여행객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편리한 곳이다.

슈페티 앞은 만남의 장소이자 동네의 작은 사교장이다.
 슈페티 앞은 만남의 장소이자 동네의 작은 사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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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독일 도시에도 트링크할레(Trinkhalle), 부데(Bude), 키오스크(Kiosk) 등 지역별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슈페티와 유사한 편의점이 있다. 이 상점들은 19세기 산업화 시기 당시 도시로 몰려들던 노동자들이 식수와 음료를 손쉽게 구입했던 상점으로부터 유래했다.

후에 술, 담배, 신문, 잡지 등이 판매 품목에 추가되며, 현재 베를린의 슈페티처럼 각 도시의 거리를 밤새 밝히는 점포가 되었다. 하지만 베를린에 비해서는 그 수가 많이 줄어든 상태고, 최근 더 다양한 품목을 갖춘 주유소, 편의점 등과 경쟁 중에 있다.

편의점이 새롭게 생겨난 산업화 시기의 변화와 더불어 베를린에서는 좀 더 특별한 사연이 더해졌다. 동·서독의 분단 시절, 동 베를린의 교대제 근무 야간 노동자들이 늦은 밤이나 새벽에도 식수 등의 음료뿐만이 아니라, 기본적인 필수품과 식료품을 살 수 있도록 늦은 시간까지 운영하는 판매점이 생겨난 것이다.

통일 이후 서 베를린에서는 이 판매점을 모델로 슈페티를 만들게 된다. 참고로 슈페티는 이러한 판매점의 정식 명칭(Spätverkaufsstelle)의 줄임말이자 즐겨 부르는 애칭이다.

그렇지만 슈페티를 단순한 편의점으로만 바라보기는 어렵다. 현재 베를린에만 약 1000개의 슈페티가 있을 만큼 베를린이라는 도시와 각 동네에서 주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떼놓을 수 없는 특별한 문화적 요소이기도 하다. 이를 증명하듯 슈페티를 문화재로 지정하자며, 슈페티에 대한 자세한 연구를 한 책이 따로 발간되었을 정도다.

여전히 이주 배경을 지닌 이들이 쉽게 주류 사회로 편입하기 어려운 독일 사회에서 슈페티나 꽃집 같이 근로 조건이 열악한 직업군은 보통 터키 혹은 아시아에서 이주해온 이주민 가정이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슈페티는 한 동네와 거리의 터줏대감 역할을 하기도 한다.

잠시 돈을 벌고 떠날 사람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지역사회에 자리 잡아왔고, 앞으로도 대를 이어서 가게를 운영할 사람이 주인이기 때문이다. 충분한 신뢰가 쌓이면, 집 열쇠 등을 가게에 잠시 맡겨놓을 수 있는 이웃이 되기도 한다.

동네마다 자리 잡은 슈페티는 지역 사회의 작은 중심지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슈페티 앞을 만남의 장소로 생각하기도 한다. 주변의 카페, 음식점과는 다르게 큰 부담 없이 있을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슈페티에서 맥주를 사서 점포 앞 인도나 벤치에 앉아 술을 마시다가, 새로운 이웃을 알게 되기도 한다.

최근 유로 2016이 시작하며, 슈페티 앞은 작은 축구 응원석이 되기도 하였다. 도시의 가치는 이렇게 다양한 기능과 사람들이 작은 규모로 함께 섞이고 부딪힐 때 더욱 빛이 나고, 베를린의 슈페티는 그것을 잘 증명한다.

슈페티는 특히 도심 내에선 400m 내외 보행권마다 위치하여, 시민들의 삶의 편의를 높인다.
 슈페티는 특히 도심 내에선 400m 내외 보행권마다 위치하여, 시민들의 삶의 편의를 높인다.
ⓒ 신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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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베를린 사람들의 삶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들던 슈페티는 최근 몇 년간 근본적인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베를린 노이쾰른(Neukölln) 지역에서부터 슈페티를 대상으로 한 지역 관청의 불시점검이 강화되며, 불법적인 상행위에 대한 벌금을 부과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 슈페티의 무엇이 불법이었을까? 현실과는 동 떨어진 법 때문이었다.

베를린의 점포 운영법(Berliner Ladenöffnungsgesetz)에 따르면 일요일과 공휴일에 관광책자, 지도, 사진용품 등 관광객을 위한 물건이 아닌 술과 같은 물건을 판매하는 행위 그리고 평일 중에 꽃, 신문, 빵, 유제품 외의 물건을 팔던 점포가 일요일과 공휴일에 점포를 운영하는 행위는 불법이다.

오랜 세월 베를린의 슈페티는 암묵적으로 연중무휴 24시간 운영해왔다. 이는 시민들에게 일상의 편의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의 일반적인 상점 운영시간에 익숙하지 않은 관광객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슈페티 주인 입장에서는 평일보다는 대다수의 상점이 문을 닫는 일요일이나 공휴일이 가장 소득이 좋은 날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불법이었던 것은 사실이었고, 이에 앞으로 합법적으로 점포를 운영하기 위해, 베를린 슈페티 주인들이 모여 베를린 슈페티 협회를 창설하였다. 작년부터 온라인 서명을 시작으로 올여름부터는 법 개정을 위한 주민투표 운동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올 9월 베를린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을 압박하며, 본격적으로 관련 법 개정을 요구하려는 것이다.

최근 베를린 관광청은 365/24 베를린이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내걸고, 365일 24시간 잠들지 않는 도시 이미지를 홍보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던 데는 베를린의 수많은 클럽, 술집, 음식점과 수많은 도시 공간 뿐만 아니라, 새벽에도 도시 곳곳을 거니는 사람들이 언제나 부담 없이 들를 수 있었던, 24시간 잠들지 않는 슈페티의 역할이 컸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도시의 문화적 측면에서도 사람들의 편의적 측면에서도 슈페티의 합법적인 운영을 위한 변화가 필요한 시점임은 분명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경남PRIDE상품에 기고된 글입니다.



태그:#독일, #베를린, #편의점, #도시,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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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과 도시를 이야기합니다. 1. 유튜브: https://bit.ly/2Qbc3vT 2. 아카이빙 블로그: https://intro2berlin.tistory.com 3. 문의: intro2berlin@gmx.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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