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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가 두려운 가족들, '혐오'는 시민권을 요구했다
②-1 동성애는 '정교 분리' 사회의 좋은 리트머스지다
②-2 보수 단체 반 동성애 논리, 따져보면 오류 투성이

일상화된 혐오의 원인과 해법을 추적하는 '혐오 사회' 마지막 연재이다. 앞선 두 편에서 동성애 혐오homo phobia를 살펴봤으므로 여성혐오misogyny와 비교하며 마무리하면 혐오의 윤곽과 해법이 잡힐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각각 고대 그리스어 포보스phobos와 미소스misos를 어원으로 두며 생리적 혐오가 아닌 사회적 혐오를 말한다. -기자말

'여성혐오' 대신 다른 말을 써라?

여성혐오로 포털뉴스 검색을 해보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여성비하나 국어 사전적 의미로(미워하고 싫어함) 주로 쓰인 걸 알 수 있다. 미소스가 어원인 미소기니misogyny로 쓰인 경우도 간혹 등장하지만. 여성혐오를 '미소기니.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 못박은 도쿄대 우에노 치즈코 명예교수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는 2012년 4월에야 국내에 출간됐고 당시는 지금처럼 대중적 관심을 얻지는 못했다.

반면 2012년은 일베가 급부상하던 시점이다. 이때부터 일베를 다룬 뉴스에 '여성혐오'라는 말이 빈번하게 등장했다. 더불어 '여성혐오≒여성비하' 정도의 제한적인 의미로 또 일베 정도에 국한된 문제로 여기는 인식도 퍼졌다. 이전에도 여성을 개념녀/무개념녀로 나누고 손가락질 하는 'OO녀' 시리즈가 있었는데도. 사회적 맥락을 종합해 접근하지 못하고 개인 인성(또 다른 노력주의) 문제로 환원해 버린 것이다.

결국 2015년부터 여성들이 '여성혐오'를 본격적으로 미소기니와 거의 일치하는 의미로 사용하며 문제제기를 시작했을 때, 엉뚱한 답들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가령 '나는 여자 좋아하는데 무슨 여성혐오죠?' '남성 전체를 일반화하지 마세요' 같은.

구글 트렌드는 특정 시기의 특정 키워드에 대한 누리꾼의 관심도를 그래프의 상대적 높낮이로 나타내주는 기능이다. 지난 5월 강남 여성 선택 살해 사건 당시 화두가 됐던 '여성혐오'는 최고점을 찍었고 동시에 '여성차별'도 지난 8년간 가장 높은 관심도를 찍었다(기준 시점: 2016년 6월 23일 자정).
 구글 트렌드는 특정 시기의 특정 키워드에 대한 누리꾼의 관심도를 그래프의 상대적 높낮이로 나타내주는 기능이다. 지난 5월 강남 여성 선택 살해 사건 당시 화두가 됐던 '여성혐오'는 최고점을 찍었고 동시에 '여성차별'도 지난 8년간 가장 높은 관심도를 찍었다(기준 시점: 2016년 6월 23일 자정).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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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선입견과 다른 상황을 접할 때 느끼는 혼란과 불편함을 못 견뎌하며 애써 선입견을 합리화하는 심리적 태도를 '인지부조화'라 한다. 여성혐오를 하지 말자는 호소가 인지부조화에 막혀 답답하다는 하소연은 여성들 사이에서 종종 나온다. 나도 처음에는 인지부조화는 답을 찾기 힘들다고 봤다. 그런데 요즘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들이 여성혐오를 사회적 맥락과 종합해 여성차별(제도적 불평등), 선입견, 여성숭배/비하(동전의 양면), 가부장적 분위기, 성적 대상화 등을 포괄하는 용어로 쓰자 제기된 반응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혐오의 국어사전적 의미가 있는데 굳이 생소한 의미로 써서 위화감을 줄 필요 있느냐, 싱크홀이다, 개념 과잉이다, 제도적 불평등은 여성차별이라고 하면 되는데 개념 혼선으로 성찰 기회와 운동 동력을 불필요하게 소모한다 등.

대부분 선의에서 비롯됐고 고려할 만한 이야기다. 하지만 위 그래프가 증명하듯 지난 십 수 년 간 '여성차별'이 더 많이 쓰였어도 대중의 관심 밖으로 점점 밀려나지 않았나. 오히려 2015년부터 '여성혐오'가 더 많이 쓰이면서 '여성차별'도 다시 관심이 증가했다.

용어를 제한적으로 써야 성찰의 기회와 동력이 더 많이 보장되라는 추론은 경험적으로도 필연적이지 않은 듯 보인다. 전략적 효율성에 근거해 '여성혐오'라는 도구를 여성들이 쓰지 못하게 할 명분이 사라졌다. 본질은 다른 데 있는 거 같다. 여전히 궁금하다. 여성혐오는 정말 싱크홀일까? 위화감과 혼란이 정말 본질일까? 답은 '아니오'다.

'여성혐오'라는 용어 사용은 오히려 합리적이다

단어는 추상성이 높은 단어부터 구체성이 높은 단어까지 스펙트럼이 있다. 여성혐오 역시 추상성이 높은 단어의 역할을 하지 말란 법이 없다. 다양한 의미를 포괄하는 단어를 접했을 때, 왜 누구는 혼란에 휩쓸리고 누구는 아무렇지도 않느냐가 문제일 뿐. 나는 처음 여성혐오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국어사전적 의미의 혐오와 다른 생소한 의미란 걸 알았다. 그렇다고 왜 국어사전대로 안 쓰냐고 따졌을까? 아니다. 여성들이 무슨 의미로 여성혐오라는 말을 사용하는 걸까, 이야기를 들어보고 <생각>이란 걸 시작했다.

서울 강남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 여성 선택 살해' 피해 여성 추모 포스트 잇들.
 서울 강남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 여성 선택 살해' 피해 여성 추모 포스트 잇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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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학자가 혐오를 '미워하고 싫어함'이라고 정의했다고 또 대중이 그런 의미로 널리 쓴다고 그렇게만 써야 하는 건 아니다. 언어는 때때로 변화하는 가운데 진보한다. 나는 철학을 전공했고 서양 근대 철학자들이 '지각'이란 단어를 어떤 뜻으로 쓸지를 놓고 몇 백년 간 논쟁해 논의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과학에도 영향을 줬단 걸 안다(서양근대철학회 <서양근대철학의 열가지 쟁점> 참조). 추상성이 높은 단어가 사유를 이끌어낼 때가 있다.

여성들은 철학자처럼 된 거 같다. 자꾸 사람들이 여성비하를 여성혐오다 국한시키는데, 여성비하는 '미워하고 싫어하는' 개인 일탈에 국한된 게 아니라 사회적 맥락을 떼놓고 규정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걸 '인식'해버렸다. 사회적 맥락을 인식하기 시작하니 제도적 불평등, 가부장적 분위기, 성적대상화 등도 줄줄이 간파됐다. 혼란을 견뎌내고 맥락을 직시하게 하며 이해의 폭이 넓어지게끔 돕는 '힘'을 로고스logos 즉 이성이라 한다.

(결국 여성은 감정적이기만 하다는 편견도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여성혐오가 개념 과잉이란 지적은 어떨까? 역시 본질에 적중하지 못하는 비판이다. 고대 그리스 관련 기록에도 "여성을 혐오하는 남자조차 제 아내들은 칭찬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예전부터 여성혐오는 남성중심적 이분법(창녀/성녀)까지 포괄하는 확장성을 띤 개념이었던 거다(관련 자료: 'misogyny'의 역어로 '여성혐오'가 옳은가).

동아시아는 아니지 않느냐?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런데 민주주의democracy, 자율성autonomy, 진정성authenticity, 정체성identity 등의 개념들이 서유럽에서 먼저 시작됐다고 동아시아가 그것들을 실현할 잠재성조차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은 민주주의를 조금은 실현시켰고, 이제 여성이 혐오의 사회적 맥락을 인식하는 데 성공할 차례다.

혐오를 멈추게 하는 대안은 뭘까

그런데 대부분 중등교육, 고등교육을 받은 시민인데 왜 누구는 '여성혐오'라는 단어를 접하자 인지부조화가 벌어지고 누구는 혼란을 견딜 줄 아는 철학자가 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설득의 3요소로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를 꼽는다. 에토스는 '신뢰', 파토스는 '감정적 연대', 로고스는 '이성적 논리'를 뜻한다.

성소수자들의 문화행사인 제16회 퀴어문화축제 개막식이 열린 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한국여성민우회 회원들이 동성애자의 인권을 지지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 성소수자들의 문화행사인 제16회 퀴어문화축제 개막식이 열린 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한국여성민우회 회원들이 동성애자의 인권을 지지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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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가 엉터리면 상대를 설득시키기 힘들다. 반면 논리가 훌륭해도 청자와 신뢰나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 않다면 역시 설득이 힘들다는 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이다. 여성도 다른 맥락의 삶을 살아온 남성을 대상으로 논리만으로 여성혐오 구조 속에서 기득권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걸 주지시키고 태도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힘들다.

인지과학자 마투라나와 푀르스터도 인간 행동의 변화는 '머릿속 앎'의 주입이나 교정이 아닌 거듭된 체험을 통한 '몸에 밴 앎'의 변화에 있다고 설명한다(김광식 <인지문화철학으로 되짚어 본 동성애 혐오> 참조). '몸에 밴 앎'이 없는 상대에게 논리는 힘이 없다. 최근 성소수자, 여성운동도 실천적이고 연대를 추구하는 차선책으로 가시화되고 있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라는 표어도 그런 방향을 시사한다. 이 방향은 정석이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중요한 역사적 변화들은 말이 안 통하는 상대에게 군중이 분노의 힘을 몸소 체험시켜주며 이루어져왔다. 다만 혁명은 작용만큼 반작용도 뒤따라 주기적으로 뒤집어 엎어야 했고 많은 희생도 뒤따랐다. 물론 지금의 성소수자 운동, 여성운동은 인류의 대다수, 혹은 절반을 차지하는 상대와 무력투쟁을 하자는 게 아니고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해달라는 당연한 요구를 하는 것이므로 비교할 바는 아니다.

그런데 좀 더 '되돌리기 힘든' 변화를 이끌어낼 방법은 없는지 궁금하긴 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에토스는 '신뢰'뿐 아니라 '습속'이라는 뜻도 있다. 그는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아야 행복할지 포괄적으로 고민한 철학자다. <수사학>보다 더 중요한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그는 행복을 이성logos와 감정pathos의 중용 상태로 정의한다. 즉 이성이 감정, 습속(신뢰)보다 덜 중요하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여러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안하는 최적의 대안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사람들이 말logos로도 충분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뢰ethos와 감정적 연대pathos를 나눌 수 있는 습속ethos을 형성하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가장 강력한 해법은 교육으로 '둑의 구조'를 바꾸는 것

인간의 마음은 강 자체, 둑, 강과 둑이 만들어내는 흐름과 닮았다.
 인간의 마음은 강 자체, 둑, 강과 둑이 만들어내는 흐름과 닮았다.
ⓒ pix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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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욕구'는 강과 닮았다. 내면을 휘젓고 다니며 잠시도 놔두지 않는 생명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디로 흐를지 종잡기 힘든 가능성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류는 이성적 근거들을 주워 모아 둑을 쌓아올렸다. 둑의 구조는 사람들 사이의 신뢰ethos 즉 내면화된 사회 규범을 설계도로 삼는다. 둑이 완성되자 욕구는 일정한 방향으로 흐른다.

욕구와 '이성'이 균형을 이루며 만들어 내는 강의 흐름이 바로 '감정(태도)'이며 균형과 흐름 상태에 따라 감정(태도)의 종류도 다양하다. 욕구는 원초적 감정으로 출발해 이성의 보완을 거쳐 사회적 감정이 된다. 사회적 혐오도 포보스phobos와 미소스misos라는 두 종류가 있고 이것들이 사람의 마음이 어지럽힐 경우도 크게 두 가지가 아닌가 싶다.

감정의 폭주를 이성의 둑이 버티지 못하거나, 둑 자체가 왜곡된 구조로 쌓여 흐름을 왜곡해 4대강처럼 서서히 썩게 만들 때. 동성애 혐오homo phobia는 전자에 좀 더 가깝다. 죽음에 대한 원초적 공포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생존 욕구를 지닌 인류는 외부 오염원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자 혐오를 발동하게끔 진화했는데, 그것이 외집단이 아닌 내집단에까지 튀는 오류가 발생했다(마사 너스바움 <혐오에서 인류애로> 참조). 이걸 해결하려면 둑을 튼튼히 쌓아줘야 한다. 즉 성적 지향을 존중하는 사회 규범이 확립되어야 한다.

반면 여성혐오misogyny는 둑 자체가 왜곡된 구조로 쌓여 발생하는 현상에 가깝다. 사고 구조, 두뇌 회로가 남성중심적 가치관대로 굳어버려 이 패턴을 벗어나는 방식대로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해결 방법은 두 가지다. 분노한 자연이 둑을 무너뜨려 버릴 때가 있듯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는 것을 인식한 여성들이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하라' 인정욕구를 분출해 엎어버리는 것이다. 현재 여성운동이 주로 취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역사적 경험과 일치한다. 또한 어느 정도 변화를 이끌어낼 확률이 높다. 그러나 시대가 많이 변했고 현대인들이 마주치는 둑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견고하게 설계되어 있다. 리모델링을 노리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 무너뜨리는 데 성공하더라도 어쨌든 사람들은 다시 이성적 근거들을 주워 모아 새로이 둑을 쌓아올릴 것이다.

욕구를 그냥 아무렇게나 방치할 수는 없으니까. 그때 어떤 설계도를 갖고 둑을 쌓아야 다시는 여성혐오가 발생하지 않을까? 여기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나는 중·고등학교에 철학 교육, 성인지 교육을 도입하는 제도적 개선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말logos로도 충분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뢰ethos와 감정적 연대pathos를 나눌 수 있는 습속ethos을 형성'해주는 책임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여성혐오'라는 말을 사람들이 들었을 때 인지부조화에 빠지지 않고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볼 수 있는 이성적 힘이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성적 힘을 발휘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왜곡된 편견과 공포심에 휩쓸리지 않고 서로의 성적 지향을 존중하는 사회 규범을 쌓아올릴 준비도 될 것이다. 이성 그 자체로는 힘이 없다. 단, 이성을 잘 발휘하도록 습속을 형성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류는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태그:#동성애 혐오, #여성혐오, #우에노 치즈코, #페미니즘, #퀴어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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