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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장> 상대부 노순광

소설 <무위도>
 소설 <무위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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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줄거리 요약본

돈하루(敦賀樓)는 개봉의 유곽이다. 그러나 보통 유곽이 아니다. 개봉의 난다 긴다 하는 재력가나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세도가들이 출입하는 유곽이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에겐 그저 호숫가에 고아(古雅)하게 있는 건물만 보일 뿐 그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조차 잘 모르고 있다. 대문은 언제나 굳게 닫혀 있고 어쩌다 열릴 땐 휘장을 드리운 마차만 드나들 뿐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이곳을 들어가고자 할 땐 다섯 칸 대문 옆의 접객실에 들러 먼저 용건을 밝혀야 한다.

정오 무렵 한 필의 말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돈하루의 대문을 향해 달려왔다. 말을 탄 사내는 회색 장포를 입은 중년인이다. 그가 굳게 닫힌 대문 앞에서 고삐를 당기자 말은 달려오던 관성을 멈추느라 히이잉 마성을 지르며 앞발을 높이 쳐들었다가 말굽으로 땅을 팠다.

눈썹이 진한 중년인이 말에서 뛰어내리는 걸 보자마자 어느새 나타난 장정 하나가 말의 고삐를 건네받고는 담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졌다. 중년인이 대문 옆의 접견실로 들어가자 말끔한 얼굴의 청년이 그를 맞이했다.

"귀하께선 어인 일로 오셨는지요?"

방문 시간으로 보나 차림으로 보나 이곳에 들를만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음에 분명했지만 청년은 예의 바르게 물었다. 

"북평에서 오신 어르신이 여기 계신 걸로 알고 있소."

예진충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청년이 장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나간 지 일각이 안 돼 아리따운 여인이 나타났다.

"쇤네 불미하여 상공께서 말씀하시는 북평 어르신을 가늠하지 못하겠사옵니다. 저희 누각엔 북평에서 오신 대감님이 수시로 드나드셔서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태도는 공손했지만 이곳엔 북평의 대감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여럿 있으니 잘 알고 오라는 의미였다.

예진충은 품에서 은화사 패찰을 꺼내려다 멈췄다. 상대부의 행적을 노출시키면 안 될 것 같아서다. 예진충은 나직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때 북평에서 벼슬 나부랭이를 거친 자들이 지난 세월을 못 잊어 아직도 대감이라 칭하는 자들 말고 엊그제 진짜로 경부에서 오신 분이 계실 것이오. 그분께 예모가 아뢰러 왔다고 전해주시오." 

예진충이 세게 나오자 여인은 멈칫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화려한 덧옷을 입은 미모의 중년 여인이 나타났다.

"대협께 실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랫것들이 몰라뵈서 그런 것이니 부디 해량해주시기 바랍니다. 예 총관님."

여인이 허리를 굽히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강호의 사내는 자질구레한 예법에 구애받지 않는다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시고 어르신께 안내나 해주시구려."

예진충은 손을 내저으며 사양을 하고 용건만 말했다.

"절 따라오시지요."

여인이 앞서자 예진충이 뒤를 따랐다. 접객실을 나오자 한눈에 봐도 잘 가꾼 정원이 펼쳐졌다. 키 큰 나무와 꽃나무가 조화롭게 배치돼 있고 사이사이로 수석과 기물을 배치해 마치 왕의 궁전에 온 것 같았다. 여인은 미로처럼 얽힌 길을 따라 한참을 가더니 이윽고 화려한 단청을 입힌 건물 앞에 섰다.

"이곳이옵니다. 그럼 쇤네는 그만."

허리를 굽히고 절을 하더니 여인은 종종걸음으로 온 길을 되돌아 사라졌다. 예진충은 오는 동안 잠복과 경계를 살피었으나 별 다른 징후는 없었다. 하긴 예검비화 채욱이 곁에 있는데 달리 무슨 호위가 필요하랴.

예진충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넓은 거실 한 가운데서 채욱이 서 있다.

"어서 오시오. 예 대협."
"채 대협께서도 무양하신지요?
"우리가 헤어진 지 며칠 됐다고 무양이고 자시고 할 게 있겠소. 단지 상대부 어르신께서 급작스레 출타하셔서 이 몸이 황망했을 뿐이오."
"……."

예진충이 별 말이 없자 채욱이 "그럼" 하면서 앞장섰다. 거실의 안쪽 문을 열고나자 다시 하나의 방이 나타났다. 채욱이 다시 방문을 열자 안쪽에 화려한 방이 또 나타났다. 방 한쪽 면에 발이 쳐져 있고 그 안에 커다란 태사의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상대부는 거기에 앉아 있다. 

"시생 문안드립니다."

예진충이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어서 오게."

가늘지만 무게감이 느껴지는 상대부의 목소리다. 남성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어딘지 모르게 배어있다. 상대부가 손짓을 하자 채욱이 벽에 달려 있는 수실을 당겼다. 상대부를 가리고 있던 발이 말려 올라갔다. 대면 접촉을 꺼리는 상대부가 발을 거둔 것만 해도 특별한 호의 표시다. 

두 달만에 보는 상대부의 얼굴은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맑았다. 저기 어디에 그렇게 깊고 어두운 흉중이 감추어져 있는가. 안 그래도 흰 피부에 엷은 화장까지 곁들였는지 오늘따라 얼굴이 유난히 환했다. 그중에서도 세필로 초서체를 쓰다가 살짝 삐친 것 같은 아미(蛾眉)가 도드라졌다. 꼬리가 긴 눈과 강퍅한 턱이 대비가 되어 사뭇 신경질적일 것 같으면서도 어찌보면 가냘픈 소녀처럼 여리게 보여 함부로 마음의 빗장을 잠그지 못하게 하는 인상이다.

한마디로 종잡을 수 없고 가늠할 수 없는 게 상대부의 표정이다. 그리고 그 어딘가에 날카로운 발톱처럼 집요함이 숨겨져 있다. 마흔둘인 자기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 웃길인 상대부지만 오히려 그의 조카뻘로 보이는 동안(童顔)의 비결이 무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설에는 신선술을 연마하고, 전진교의 도인술(導引術)에 빠져있다는 말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상대부에게 직접 확인한 건 아니다. 

"예 총관이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네만 일이 이렇게 늦어질 줄은 몰랐네."

담담한 어조이지만 왠지 모르게 힐난의 어투가 숨겨져 있다.

"죄송하옵니다. 모든 것이 시생의 불찰이고 무능한 탓입니다. 하오나……"
"하오나?"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成事在天)이라 했사옵니다. 애초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이 일에 끼어들어 시생의 발걸음을 더디게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네."

상대부의 목소리가 어린아이처럼 가늘게 변했다.

"죄송합니다."
"자네의 그 출중한 무예를 가지고도 해결하지 못할 변수가 무엇이란 말인가."
"먼저 장강편운 습평과 일운상인 모충연을 습격한 자, 우리 은화사 은가를 기습한 자, 이 모두가 생각 이상의 무공을 갖춘 자입니다."
"그들은 동일인인가, 아니면 각각 다른 자들인가?"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습평과 모충연은 사인(死因)이 달라 칼 솜씨를 직접 비교할 순 없었습니다. 습평의 경우에는 사체가 많이 훼손돼 정확한 솜씨를 가늠하진 못하지만 상처의 너비로 볼 때 협봉도나 파형검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상처의 깊이로 보자면, 그런 검 종류로 그렇게 깊이 들어간다는 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천하의 장강편운 습평한테. 그런 식으로 일격에 끝낼 수 있는 자라면 강호의 현 방파에선 찾을 수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모충연의 경우에는 기습을 당하는 바람에 검맥(劍脈)을 파악할 순 없지만 방외술을 시술한 것으로 보아 살수의 기예를 익힌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끝으로 저희 은가에 잠입한 자의 검맥 또한 갈피를 잡기 힘들었습니다. 임기응변에 능하고 검끝이 독사처럼 살아 있어 항룡검(亢龍劍)에 가깝지만 딱히 그렇다 할 수만도 없는 변화가 숨어 있었습니다."

"설명이 장황하구먼. 단적으로 말해 동일인으로 보는 것인가, 아니면 그 이상으로 보는 것인가?"
"시생의 생각으로는 동일인으로 봅니다."
"쉽게 가늠할 수 없다면서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뭔가."
"세 경우를 각각 떼놓고 보면 연결점을 찾기 힘들지만 이들은 한꺼번에 뭉뚱그리면 집히는 바가 있습니다."
"그래, 그 집히는 게 뭔가?"

"강호에 잘 알려지지 않은 변방무예의 맥이 있습니다. 무예의 씀씀이와 무공의 길이 중원과 심히 다를 뿐만 아니라 새외의 잡술이 가미되어 지극히 혼란스럽습니다. 중원의 변방에서 거하면서 이족(夷族)의 변술에도 능한 이들을 일컬어 외방의 네 기인(奇人)이라고 합니다."
"호오, 과인도 예전에 얼핏 들어본 것 같구먼. 채 대협은 들어본 바가 있소이까?"

상대부 노순광이 채욱을 향해 물었다.

"소인 역시 들은 적이 있지만, 강호에서 헛세월만 보낸 탓에 자세한 건 알지 못합니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채욱이 당황스레 대답했다.

"이들 사대기인(四大奇人)을 지칭할 때 동쪽의 동곽(東霍)선생, 남쪽의 남회(南恢)선생, 서쪽의 서벽(西闢)선생, 북쪽의 북명(北冥) 선생이라고 합니다. 우리 일에 개입한 자의 무공이 그쪽 유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옵니다. 하지만 새외 기인들이 중원의 일에 관여한 적이 없고, 또 있다한들 수십 년 전의 소문인지라 아직 단정할 순 없습니다."

예진충이 덧붙여 설명했다.

"우리 일을 훼방 놓은 자가 그들의 문하라면, 그 자는 사대기인(四大奇人) 모두에게 무공을 배운 자인가 아니면 그 중의 한명에게서 전수 받은 자인가?"
"시생의 생각으로는 그 중의 한명이라고 생각됩니다. 네 기인은 각자가 수만리 씩 떨어져 있는 관계로 서로 내왕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이차도 가장 적은 자와 가장 많은 자 사이에 한 세대 이상의 차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같은 뿌리가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고장에서 전설적 존재로 남아 있을 뿐인데 중원의 호사가들이 뭉뚱그려 외방의 네 기인이니 어쩌니 하며 한 통속인 것처럼 말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번 일에 끼어든 자가 외방의 기인에게서 무공을 전수받은 자라 생각된다, 이 말씀이오까?"

채욱이 중간에 나서서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외방 기인의 제자라면 일련의 사태가 설명될 수 있다고 봅니다."
"흠, 그렇다면 외방의 살수가 왜 중원의 비급을 노리는 것일까?"

상대부가 수염 없는 파리한 턱밑을 손바닥으로 쓸며 낮게 말했다.

"시생 그 점에 대해 아직 감을 잡을 수가 없사옵니다."
"그들도 진경의 무공이 탐나는 건 마찬가지지 않겠습니까?"

채욱이 끼어들었다.

"채 대협, 그런 식으로 쉽게 생각할 건 아니네, 진경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아닌데 변방의 괴인(怪人)들이 어찌 알고 미리부터 손을 쓴다는 것인가."

상대부가 채욱을 향해 말했다.

"우리 말고 진경을 노리는 자가 또 있다고 봐야할 것 같네. 우리가 주시하는 사이 그자가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손을 쓴 거지. 그 과정에서 외방의 고수를 불러들였다고 볼 수도 있고."
"대감님의 추론이 합당하십니다."

채욱이 맞장구를 쳤다.

"자네는 어느 쪽인가?"

상대부가 예진충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느……쪽이라면?"

예진충의 등줄기로 북풍한설이 쏴 하고 몰아쳤다.

"예 총관, 자네 무공의 뿌리는 네 기인 중 어느 쪽이냐는 것일세."
"그 어느 쪽도 아니옵니다. 시생의 무공이 중원의 본류와 다르다고는 하나 외방의 네 기인과는 무관하옵니다."

예진충은 대답을 하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나 어조가 평소와 조금이라도 달라진 건 아닐까 하고 스스로 점검해 보았다. 상대부는 대화를 나눌 때 상대의 미세한 떨림조차도 귀신같이 알아채는 재주가 있다. 보일 듯 말 듯 미세한 변화 속에서도 상대의 틈을 찾아내 집요하게 공격하는 게 바로 상대부의 특기다. 표정 한 번 말투 하나에 생사가 오가는 궁중 암투에서 그가 그토록 오래 살아남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비록 지금은 야인 아닌 야인으로 한 발 물러서 있지만, 언제고 제자리로 돌아가리라 믿는 그다. 아니 그렇게 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자신이 사조직화 한 은화사에 그렇게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안 되면 제거하라. 권좌에서 한 발 물러난 상대부가 뼈아픈 후회 속에서 깨달은 통찰이다. 언젠가 예진충이 곁에 있는 것도 모르고 혼잣말하듯 이 말을 뇌까렸다.

아니 어쩌면 그에게 들으라고 일부러 한 말일지도 모른다. 상대부가 가장 후회하는 일 중의 하나가 현 금의위 지휘사로 있는 모빈 장군을 실각시키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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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PERD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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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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